0.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 전쟁포로를 대하는 방식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 공통인듯 합니다. 미군이 이라크를 치러 들어갔을 때도 이라크 군인 시신을 훼손하고 모욕한 것이 알려져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도 베트남에 참전했을 때 베트남 사람들에게 몹쓸 짓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한국군이 강한 전투력으로 베트남에서 명성을 떨쳤다고 알고 있지만, 베트남에는 지금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무려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부녀자들을 강간했습니다. 우리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어떠했습니까? 이번달 초에 위안부 피해자인 배춘희 할머니가 91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증언자들은 54명 뿐입니다. 정신대라니요, 위안부라니요, 사람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성관계로 위로한다는 발상 자체가 악마적입니다. 다음 사진을 봅시다.



 이 아래 깔린 사람들은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아마도 죽었거나 중상을 입은듯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위로 군홧발을 갈기는 군인이 있습니다. 나만큼 다른 사람도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고, 생명이 있으며, 이 인간의 가치와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면 이렇게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생존과, 폭력이라는 그릇된 방식에 마비된 인간의 정신은 이러한 것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일들은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15장 언저리에 와있습니다. 거기에는 로마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로마 제국이 강하고, 훌륭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로마도 폭력 위에 세워진 제국입니다. 로마는 그 제국의 기초를 무수한 십자가 위에 세웠습니다. 자유를 억압받았던 사람들이 로마가 부당하다고 외쳤으나, 그들의 외침은 다 십자가 아래서 묵살 당했던 것입니다. 로마에게 까불면 다 죽는다는 엄포 아래, 사람들의 목숨을 짓이겨 벽돌을 쌓았습니다. 타인의 인격과는 전혀 관계 없이, 그저 로마 제국에 속한 사람들만 평화롭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이 로마의 거짓 평화 앞에 한 사람이 전쟁 포로마냥 무자비하게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무수한 전쟁 포로들처럼 인격 모독적이고 폭력적인 대우를 받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며, 예수의 입장에서 '아 그 분은 대단하시다. 어떻게 참을 수 있었지? 그 분은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나보다' 이런 생각을 하지만, 사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저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않는 저 무리들이 어떤 이유로 저렇게 하는지, 혹시 나도 저 무리들 중에 한 사람이 아닌지, 다른 사람을 사람 이하로 대하고 있는 악마적 본성이 나에게는 없는지 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1. 


마가복음 15:16~32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군병들이 예수를 전쟁 포로처럼 끌고 옵니다. 모시고 오지 않습니다. 아마 머리채를 쥐고, 멱살을 잡고, 그저 죽여 없애버리면 그만이라 생각하며 질질 끌고 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브라이도리온'입니다. 이 말은 라틴말인데, praetor는 군사령관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군사령관이 지체 높아 보이지만 별 것 있겠습니까?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 서는 사람입니다. 이 군사령관이 집무를 보고 있는 곳을 가리켜 '프라이토리움'이라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로마에 반항하는 혁명가로 고발했기 때문에, 예수는 로마 군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세운 로마의 최후 문제 해결 방법이 이렇습니다. 자연법으로 유명하고, 여러 훌륭한 사상가들이 로마에 있었으나, 결국 로마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었습니다. 그렇게 프라이토리움, 폭력 지도자 앞으로 끌려간 예수, 그리고 그 지역에 주둔해있던 모든 군대가 그 폭력의 현장으로 집결합니다.


  이 프라이토리움에 모인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이라면 지긋지긋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신이라면 신인줄 알고 얌전히 있으면 될 것을 허구헌날 폭동을 일으키니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또 출동해야 하고, 출동해서 내 동료들은 때론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이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니, 정말 짜증날 일입니다. '이 유대놈들 진짜 다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명박 대통령 시절 전경 근무를 한 친구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촛불집회 할 때마다 서울쪽 근무하는 전경들 엄청 고생하지 않습니까? 시민을 상대로 물대포도 쏴야 하고, 방패 뒤에서 한 마디도 못한채, 피곤해서 아스팔트에 자기도 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출동하니 짜증이 엄청 났을 것입니다.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은 로마에 덤빌 생각 하지 않습니다. 로마 역시 황제가 신이라는 사실만 인정하면, 건드리지 않는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저 사실, '로마 황제가 신'이라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그동안 역사 속에서 지켜온 가장 중요한 사실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그 십계명 1,2계명말입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살고자 하는 유대인들만이 줄곧 로마에 저항해 왔습니다. 그래서 전경들, 아니 로마군인들도 그들에 맞서 계속 출동해야 했고요. 그 과정에서 양쪽 다 많이 다치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로마 군인들 앞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람이 포로로 끌려왔으니, 평소에 자신들이 유대인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분노와 짜증과 스트레스를 다 쏟아 붓기에 딱 좋습니다. 누군가를 바보 취급하고, 놀리고, 괴롭히는 것이 다 그러한 것이죠.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억눌린 감정들을 한 사람에게 탈탈 쏟아냅니다. 왕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입으로는 조롱하면서 그에게 평안을 주기는 커녕, 막대기로 머리를 두드리고, 걸쭉한 침을 뱉고, 그 앞에서 절하는 시늉을 합니다. 그리고는 한참 자기들끼리 낄낄거린 이후에, 다시 옷을 벗겨 십자가로 끌고 나갑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그저 무수한 포로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포로는 사람이 아닙니다. 포로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2.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예수께서는 이미 이틀의 심문 속에서 지쳐있고, 매를 많이 맞아 몸이 다 망가져서 십자가를 매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그의 아들은 루포라는 사람인데, 이 루포라는 사람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등장합니다. 이 집안을 좀 추적해봅시다.


롬 16:13, 새번역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예수 공동체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가 A.D. 30년인데,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A.D. 50년경에 바울은 다시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지역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의 끝자락에 '이 사람, 저 사람 문안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 명단에 '루포'가 있습니다.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 루포의 집은 사도였던 바울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시몬의 가정은 모두 예수를 이 세상의 왕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은, 이것이 당시 로마 군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포로였기 때문에, 로마 군인이 짐을 지라고 명령하면 군말없이 5리를 짐을 지고서 가야 했습니다. 루포의 아버지가 남들보다 착하거나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몬도 그저 폭력이 두려워서 시키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힘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도 힘없이, 시몬도 힘없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기 위한 언덕을 따라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굴욕적인 사건에 참여했던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세상의 왕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그 한 사람이 세상의 왕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만 믿은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 전부가 예수가 그러한 분이 맞다고, 그 로마 속에서 목숨 걸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여간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마가복음 마지막 장인 16장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십자가 사건으로 돌아옵시다. 루포의 아버지 시몬과 예수가 도착한 곳은 '골고다'라 불리는 언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어나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곳을 '해골'이라 불렀습니다. 그 해골 언덕에서 로마 군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고는 옷감이 귀했던 그 시절이었기에, 예수의 옷을 갖으려고 서로 제비를 뽑았습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운에 맡겨 자신들의 이익을 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로 이들, 자신들의 이익을 구하고자 눈에 보지지 않는 무언가를 믿는 이들이, 똑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믿어, 자신의 모든 이익을 포기하는 한 사람의 손에 굵은 대못 박아 넣었습니다.


3.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없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그리고는 때가 되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들어 올렸습니다. 시간은 제 3시였습니다. 유대인의 시간은 우리와 좀 다릅니다. 유대는 오후 6시가 한 날의 시작입니다. 창세기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후 6시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쓰는 시간에서 6을 더하면 유대 시간이 나옵니다. 즉 제 3시면, 오전 아홉시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모이는 이 시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시간. 대체로 범죄는 어두울 때,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벌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역사상 가장 부당하고 무자비한 살인은 백주대낮에, 그것도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동안에 벌어졌습니다. 양 옆에는 로마에게 폭력을 되갚아주자고 주장했던 혁명가들이 예수와 함께 매달려 있습니다. 예전에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


마가복음 10:37 

그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이 '없음'입니다. 이 구절이 우리가 가진 개역성경에는 빠져 있습니다. 다른 번역본에는 이런 구절이 써있기도 합니다. "So the Scripture was fulfilled which says, "And He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그가 범죄자들의 틈바구니에 던져졌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이 십자가에 매달린 폭력 희생자를 봅니다. 그리고는 그 예수를 모욕합니다. 


"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놈아, 니가 너를 구원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봐!"

"남들은 구원하더니, 정작 본인은 구원을 못하는구만"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봐. 그럼 우리가 믿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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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욕들이 다 뒤집힐 것입니다. 누가 뒤집으십니까? 예수께서는 저 모욕들을 참으시는 반면, 하나님은 저 모욕을 참지 않으십니다. 옳은 사람의 고난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저 모욕들을 다 뒤집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저 모욕들을 뒤집히는 현실을 비로소 보게 될 것입니다. 곧. 이 사건 뒤 3일 뒤에 말입니다.



2014年 6月 넷째주 성도교회 청소년부 설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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