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은 대단히 미끄럽습니다. 제가 이 말을 처음 본 것은,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라는 책에서였는데요. 이 사람은 '성스러움' 이라는 말이 미끄럽다고 얘기했습니다. 즉, 언어로 규정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다만 언어는 그 성스러움의 외연만을 표현하는 것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거룩, 존귀, 이러한 단어들이 다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단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단어에 대해서 막상 말하려고 하면, 잘 표현이 안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미끄럽기 때문입니다.


  이 미끄러운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그 문제에 대해서 논의되었던 역사를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1. 서양-3분설과 2분설

  3분설은 인간을 '영','혼','육'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록>이라는 책에 나온 내용인데요. 여기서 영은 지성과 의지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혼은 감정을 담당하고요, 육은 감각을 담당합니다. 이 경우 인간에게는 영이 있지만, 동물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과의 교감이 가능한 것은 바로 혼의 차원에서입니다. 감정적인 차원에서 동물과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계와 인간의 교감은 혼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2분설은 인간을 '영혼'과 '육'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혼'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영이 고등기능과 하위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요. 고등기능은 2분설의 영과 마찬가지로 지성과 의지, 하등 기능은 감정입니다. 만약 하등기능만 기능하는 영혼은 영혼이 망가진 것이죠. 중추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감정보다는 지성과 의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감정에 대해서도 분출과 해소보다는 절제가 많이 요구되고요. 

  3분설이든 2분설이든, 미끄러운 '영'에 대해서 설명하고자하는 일종의 시도들이었어요. 어느 것도 완전한 설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강조점을 알아둘 필요는 있죠. 3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이에요. 감정을 통해서 혼을 가진 생명체들과 교감하기 때문에, 감정이 중요해져요. 2분설은 인간의 지성과 의지입니다. 감정은 지성과 의지의 방해물입니다.

  둘 다 께름찍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세계와의 교감을 '감정'의 차원에서 보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같고, 아니면 지성과 의지를 강조하느라 감정을 소홀히 다루는 것도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좋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하나는, 세계와 인간이 교감하기 위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감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감정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2. 동양-인물동성론
   
  조선에서는 18세기에 인물동성론이라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즉, 인간성과 동물성이 같냐, 다르냐의 두 파가 갈라진 것입니다. 이황도 율곡도 이 논쟁의 대열에 참여하셨던 분들이고요.  뭐 이런걸로 논쟁을 열심히 했냐 싶지만, 이건 당시의 주자학의 패러다임을 결정하는 엄청 중요한 논쟁이었어요.

주제는 인성과 동물성의 동이에 관한 문제, 그리고 인간 심체의 본질적 성격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고 심체에는 악의 흔적이 없다는 외암의 생각과,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구분되며, 심체의 내부에도 악의 종자가 심어져 있다는 남당의 생각은 부딪쳤고, 여러 학자들이 두 진영으로 편을 가르며 논쟁은 치열해졌다.  

   <조선 유학의 거장들>, 한형조, p.193

  당시 주자학의 세계관에 대해서 짧게나마 설명을 하는 것이, 이 논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자학은 세상의 이치를 '이'와 '기'로 설명합니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때 '이기론'을 잠깐 다뤄요. 여기서 '이(理)'는 만물의 질서입니다. 세상은 이 질서가 다스립니다. 그래서 한자로도 이 이가 다스릴 이. 기는 그 이가 다스리는 물질계 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와 기에 대한 너무 미진한 설명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이해를 위해 대강 덮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이 만물을 다스리는 '이'가 '기'를 어떻게 다스리냐는 것이냐"에서 학자들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이'가 만물을 직접적으로 다스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저 의미에 지나지 않다는 사람들로 나눠진 것이죠. 전자를 유위, 후자를 무위라고 합니다. 

  유위는 이가 현실에 직접적으로 개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동물은 완전히 다릅니다. 도덕을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도덕이 있지만, 동물은 없잖아요?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도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더불어 인간이 가진 생리적 욕구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됩니다. 이것은 동물적 요소에 불과할테니까요. 

  반면, 무위는 이는 직접 개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은 기의 활동이며, 다르지 않습니다. 둘 다 생리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무위를 주창한 대표적인 경우가 율곡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명론으로 빠진 것은 아닌듯 합니다. 한형조 선생님은 율곡의 생각을 이렇게 요약하시더라고요.

천지간의 생명들은 제각각이면서도 유기적 전체의 지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우주적 과정을 오케스타라의 협연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여기 보이지 않는 지휘자에 해당한다. 어째서 이것을 주재라 할 수 없단 말인가. 그것은 장엄한 통찰이다. 

<조선 유학의 거장들>, 한형조, p.204

  '유위'를 주장한 사람들은 현실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이'를 말했습니다. 무위를 말한 사람들은 현실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숨어있는 '이'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유위를 주장한 사람들이나, 무위를 주장한 사람들이나, 이 모든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논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서양과는 대단히 다른 접근입니다. 서양에서는 인간을 분석하고 구성요소를 나누어서, 동물과의 차이를 규명하려 했다면, 동양에서는 인간과 동물을 분석하기 앞서, 세상 전체의 질서가 무엇인지부터 규명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창조된 모든 것-성령

  한 스무줄 쓰려고 했던 글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뭘 알아야 하고, 뭘 믿어야 하는 것이죠? 동서양의 의견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상을 보여줄 수 있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이것을 쉽게 풀어서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새 저의 고민입니다. 

  저는 이 구도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창조된 모든 것 - 성령

  이런 설명은 어떨까요? 

  누군가 책을 썼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이 타자를 쳐서 책으로 출간되지 않았을 적에도, 이미 그 사람 머리에는 그 책에 대한 구상이 있었을거에요. 그런 그 책을 아직 쓰지 않은 그 사람을 가리켜  '창조의 정신' 이라 부릅시다.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을 만나서 묻습니다. "책 언제써요?" 그 사람이 답합니다. "아직 쓰진 않았는데, 머릿 속에는 있어요. "

  저자의 머리속에는 아직 그 책을 쓰지 않았으나 그 책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저는 그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후, 창조의 정신인 그 사람이, 이제 그 정신 속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구체화시킬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 결과 유럽과 남미를 아우르는 제목의 저서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즉, 창조의 정신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어떠한 물질로서 드러난 것이죠. 

  제가 또 묻습니다. "책 나왔어요?" 그 사람이 대답하겠죠. "여기있어요."

  그 책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책을 구상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저도 그 책을 통해 느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래서 제가 말합니다. "아, 그 책 좋더라고요" 저자가 말합니다. "정말 좋죠?"

  잘 생각해보세요. 저자가 책을 쓰기 전에 머릿속에 있던 것도 '책'이죠. 그리고 그 머릿속에 있던 것이 현실로 구체화 된 것도 책입니다. 즉, 종이와 본드로 구성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을 보고 제가 느낀 것도 책이죠.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세 가지 책을 만납니다. 창조자의 정신, 그 정신이 현실속에서 물질로 구체화 된 것. 그리고 그 물질로 구체화된 것을 보고 느끼는 감상. 이 세 가지가 모두 책입니다.

  이것을 기독교 전통에서는 삼위일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한 이 세계는 삼위일체가 반영되었습니다. 창조자의 정신이 있었고, 정신이 물질로 구체화되고, 그 물질을 통해 우리는 창조자를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창조자의 정신이 시간과 공간으로 흘러 들어왔고, 창조된 모든 것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위이자 유위인 것입니다. 신은 드러내지만 숨어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세상과 관계 하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의 활동으로 인해 만물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 저도 있고, 당신도 있고, 동물도 있죠. 그리고 그 창조된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느낍니다. 마치 쓰여진 책을 통해서 저자의 숨결을 느끼듯 말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일종의 성전인 것이죠. 성서에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으로 가득한 성전을 그려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된 이 세상은 창조주의 작품이고, 그 작품들은 그 저자의 손 길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인간은 신의 작품이자, 신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이중적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의 정신 안에 있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간과 공간안에서 구체화되었으며,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4. 결론

   결론입니다. 생각을 바꿉시다. 성령이 그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성령은 아무도 가둬놓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니까요. 성령은 바람이죠.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는 그 바람에 나를 던지는 것이죠. 나를 비우고 그 바람이 나와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내 안에 있고, 나도 성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어느 개체 안에 있고 없고를 감히 누가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엔 성령은 무한히 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미 창조세계에는 하나님의 영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내가 성령을 데려가지 않고, 성령이 나를 데려갑니다. 나만 데려가지 않고, 세상 전체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바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을 뿐, 이미 이 세상은 창조주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이제 질문을 해결해야죠. 동물은요? 동물은 창조되었습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쓰여진 책처럼 말입니다. 창조자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창조의 감동을 마구 뿜어냅니다. 그 동물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사자로 표현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들로 하나님 자신을 설명한 것입니다. 왜 일까요? 이 세상 전체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전체에 하나님의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 혹은 인간 안에 영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우주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 즉, 하나님의 질서에 반응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반응하지 않는다면, 여기서는 2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 봤습니다. 영혼의 하등기능만을 사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타락 이후 동물들도 달라진 부분들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은 인간에 비해 하나님 영의 질서에 잘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새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이동을 시작하고, 번데기를 벗고 나오는 나비의 장면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들은 만물의 질서에 순응합니다. 인간처럼 순리를 거스르고 이를 악물고 반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욕심과 거짓으로 채우고 바람을 막진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인물동성론을 주장한 사람들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이끌어가는 영은 도덕을 그 하위요소로 취하지만, 그것은 도덕에 국한 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죠.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작품과 교감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이건 주거침입, 저작권 위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개체에만 집중했던 서양과도, 그리고 답을 찾지 못했던 동양과도 대화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영], [동물], [인간]에 대한 질문이, 결국 [성령]과 [피조물] 그리고 [세계] 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되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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