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릿말] : 십자가와 새 시대(1:1~10)

    A. 인삿말(1:1~5)  
    B. 책망 : 서신의 배경(1:6~10)

  *[감사] 단락이 없음

  II. [본론] : 복음

    A. 복음의 진리(1:11~2:21)

    B. 복음의 변호(3:1~5:12)

    C. 복음의 삶(5:13~6:10)

 

  III. [맺음말] : 십자가와 새 창조(6:11~18)

 

II-C. 복음의 삶(5:13~6:10)

 

  우리는 새로운 단락으로 넘어왔습니다. 약속과 율법의 관계 속에서 복음을 규명한 바울은 이제 이 복음과 교회의 삶을 연결시킵니다. 흔히 이 본문 앞 부분을 "신학"으로, 그리고 오늘 본문을 "윤리"로 구분하곤 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갈라디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갈라디아 교회의 현재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상황과 동떨어진 일반적인 윤리들을 나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오늘 본문이 갈라디아서의 절정이자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바울은 여전히 갈라디아 교회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자유를 위한 부르심"은 지금까지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잘 요약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해산의 수고를 겪고 있는 이 이방인 예수 공동체가 이 "자유를 위한 부르심"을 규범없음의 상태로 오해할까 염려합니다. 율법을 따르지 말라고 했더니, 어떤 규범도 배격하는 태도를 띌까 염려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메시아를 발견한 사람의 율법 재사용'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율법은 이제 실효성을 가진 법이 아니라, 복음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기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의 실상이자 결말입니다. 그리고 그 '우리'는 단 하나의 규범을 실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 그것이 어디에 쓰여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사랑의 결과이고, 사랑으로 새로워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교회입니다.

 

갈라디아서 5:16~2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 교회들의 문제는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약속의 보증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표지'입니다. 몸 밖에 써있는 그 어떤 글자들도 아브라함 자손임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성경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직 성령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상속을 받기 위한 광야의 여정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광야를 걷는 이 언약백성이 맞서 싸워야 하는 대적이 있으니, 곧 "육체의 소욕"입니다. 율법 아래 있으려는 태도는 표면상의 문제이고, 그 심층부에는 언약백성의 대적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을 폭로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를 따르는 사람은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을 글자로 옭아매어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인간성은 율법으로 압박하면 할수록 그것을 범하고 죄의 몸집을 불립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상술합니다. 이 타락한 인간성이라는 괴물은 여러 머리들을 가지고 있는데, 바울은 이것을 세 부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욕망'이고 이 욕망에는 성(sexuality)이 그 중핵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통제되지 않은 욕망은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그 결과 발생하는 것이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율법에 의해 분열이 임박한 갈라디아 공동체는 지금 3기에 들어서려고 하고 있습니다. 겉은 번드르르하게 율법으로 올바른 생활을 하겠다고 하지만, 이미 그 수단으로 율법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중증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이 일을 전부터 경계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상속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같은 메시지가 고린도전서 6:9,10에도 나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신이 상속자임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속자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보증은 성령입니다. 혈과 육은 상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5:50).  그러나 믿는 이가 호흡하는 하나님은 이 상속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을 받아 신령한 몸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자신이 상속자임을 확인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 갈라디아 교회는 육체를 따름으로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광야를 걷고 있는 언약백성에게 미래시제로 제시된 상속의 이미지는 가나안 땅 분배를 상기시킵니다. 육체를 따르는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상속받을 수 없음을 이들은 율법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육체의 소욕과 맞서 싸우는 언약백성에게는 반드시 약속의 땅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마침내 차지하게 될 땅을 히브리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불렀습니다(요한계시록 21:7 ). 이 상속의 날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는 비로소 완성될 것이고 분배될 것입니다. 이 통치 완성과 분배의 이야기가 '유업'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상속자는 통치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분배받아 하나님과 함께 창조세계를 통치하는 아담의 역할을 완수할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와 있지만, 아직 그 통치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갈라디아서 4:29). 그러나 그날에는 광야의 여정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온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교회는 성실하게 성령을 따라 광야를 횡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으로 요약되는 그 횡단 방법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 방법은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사랑이고, 후자는 정(욕)과 욕심을 죽임입니다. 저는 저 '정(욕)'을 그간 '겪음'이라 번역해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 할 때 저 '고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와 함께 하는 경험과 탐심의 결말이 메시아의 죽음임을 알고, 그 죽음에서부터 삶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 외에는 부활의 권능에 동참할 수 없고, 육체의 소욕과 맞서며 광야를 건너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향이 십자가에서부터 죽고 새로 시작되는 것이 새롭게 지음받는, 그래서 혈과 육이 상속받을 수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분배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갈라디아서 5:25,2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성령으로 사는 것의 반댓말은 육체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육체'라고 말했던 것이 몸뚱이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셨을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는 '타락한 인간성'의 의미로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삶은 반드시 정죄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삶은 설령 율법을 범한다 할지라도 용서될 뿐 정죄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삶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바울은 '열매'라는 단어로 담았습니다. '믿음'은 다시 말하면, 1)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삶이고, 이 삶은 2)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며, 3) 사랑이라는 유일한 규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절대 땅에 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4)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문화는 체면의 문화, 명예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한 평가가 중요했던 때입니다(물론 이것은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체면과 명예는 사람의 행동을 적절하게 절제할 수 있게도 하지만, 남들보다 우월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기도 합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구하고 있는 "헛된 영광"이 무엇인지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며, 서로 격동하게 하고 결국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그 "헛된 영광의 추구"가 육체의 일임을 증명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여기까지 읽은 갈라디아 교인들은 과연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가던 길로부터 돌아섰을까요? 아니면 바울과 이 편지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길을 고집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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