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릿말] : 십자가와 새 시대(1:1~10)

    A. 인삿말(1:1~5)  
    B. 책망 : 서신의 배경(1:6~10)

  *[감사] 단락이 없음

  II. [본론] : 복음

    A. 복음의 진리(1:11~2:21)

    B. 복음의 변호(3:1~5:12)

    C. 복음의 삶(5:13~6:10)

 

  III. [맺음말] : 십자가와 새 창조(6:11~18)

 

III. [맺음말] : 십자가와 새 창조(6:11~18)

 

-맺음말 연구

  우리는 고대의 편지 구성을 따라서 갈라디아서를 연구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맺음말]로 들어왔고,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춰서 이 [맺음말] 단락이 갖는 특징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맺음말에는 1) 평화의 축도, 2) 권고, 3) 인삿말, 4) 자필, 5) 은혜의 축도 등이 나옵니다. 1)번과 5)번의 축도문은 편지의 첫 인사와 짝을 이루며 편지 전체를 감싸주는 역할을 합니다.  맺음말에는 편지 전체의 내용이 짧게 권고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편지를 끝맺는 인사가 들어갑니다. 고대의 편지들은 대부분 대필자에 의해 쓰였습니다. 하지만 맺음말은 대필자가 아닌 발신자가 마무리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바울의 편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편지는 발신자의 진정성과 친밀함을 담아내고, 법적 효력 또한 얻게 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갈라디아서의 맺음말을 살펴봅시다.

 

갈라디아서 6:11~13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맺음말을 다른 편지들처럼 자필로 작성합니다.

 

-핍박을 피할 수 없는 이유 : 법과의 기이한 관계

  갈라디아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론이 제시됩니다. 유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하기 위함이며 이것은 십자가와 정반대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은 특별한 민족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들만 유일신을 섬긴다면, 이것은 로마에 크게 위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만 잘 통제하면 제국에 위해될만한 일은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따랐던 이들은 예수에 대한 경배는 특정 민족에 국한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민족들이 마땅히 그이를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국의 입장에서도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유대교의 외양을 갖는 것은, 로마 제국의 외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한 핍박을 회피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율법을 말미암은 의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즉 법에 의한 올바름이 십자가 위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그리고 로마인에게는 로마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 없이도 사는 이들은 법으로 쌓아올린 제국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법이 아닌 토대위에서 살고 있음을 온 몸으로 현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법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는 아주 중요한 물음입니다. 그들은 법과 종속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오히려 법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법 없이 달성한 이들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지와 바울의 메시지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만일 누군가가 율법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말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속이는 위선이요, 그는 법의 목적 마저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위선을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헛된 영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평판을 위해 법을 말하고, 법을 실천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인간성을 비껴나간 행위가 되기에 곧 위선입니다. 위선을 경유하지 않는 법의 성취는 산상수훈의 핵심이기도 한데, 그 길은 인간성 자체가 새로워지는 길 뿐입니다. 그 새로워진 인간성은 법을 의지하지 않고도 법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사랑'이라 말해왔습니다.

 

-새 창조 : 글자가 보존할 수 없는 규범

 

갈라디아서 6:14~18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κανών)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바울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소들로 구성되고, 또 원소의 질서대로만 움직이는 사랑없는 세상이 십자가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세상에서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랑없는 세상이 굴러가는 원리로부터 탈구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구할 것 없기에, 바울은 마치 이 세상에서 죽은 것 같은 살아갑니다. 다른 차원의 존재이지만 여전히 이 세계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좀비와 같은데, 좀비나 프랑켄슈타인은 정확히 부활에 대한 악의적 패러디입니다. 세상과 다른 질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좀비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의 모습이고,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의 의미입니다. 즉 그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채, 세상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서문에서부터 바울이 자신을 이 신적인 단절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같은 내용을 이번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죽음,

  자신에 대한 세상의 죽음'

 

  이 거룩한 단절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고, 이것은 갈라디아서 1:4와 공명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과의 단절을 이야기한 바울의 문장은 곧장 새 창조로 이어집니다. 메시아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 죽음과 무덤을 텅 비게 만들어버린 부활은 곧 믿는 이의 삶의 "규범"이 됩니다. 이 "규범"이라 번역된 단어는 '캐논'인데 성경 66권 정경을 일컬을 때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본래의 의미는 '자(ruler)'입니다. 이 규범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과의 불연속성, 부활을 통한 세상과의 연속성.

 

  바울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평화의 축도를 전합니다. 이것은 다른 편지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것입니다. 대개 평강의 축도는 편지를 받는 교회 공동체 전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마치 교회에서 축도할 때 "이 설교 내용 대로 행하는 자에게만" 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새 창조를 지켜나가는 것이 무척 중요했기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뜨악할만한 축도를 그것도 자필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새 창조를 사는(행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호명합니다. 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율법을 따름으로 이스라엘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을 명백히 겨냥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돌아가야 이스라엘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살아야만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율법의 길이 아니라 약속과 믿음으로만 걷는 길입니다.

 

  바울은 지금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규범'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 불연속성과 연속성의 길은 매순간의 판단을 요구하는 일이지, 특정 글자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재 자체의 새로움이고, 이 새로움은 하나님께 기대어있지 글자에 기대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글자에서 안락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이 바울의 주장이 얼마나 해괴하게 들렸겠습니까? 어떤 참고문헌도 찾을 수 없는 주장을, 예수에 기대어 하고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교회에게 뭣이 중헌디

  다시 정리해보자면, 바울은 십자가로 죽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할례를 받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도,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의 정체성도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손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분 자체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남겨둡니다. 그럼 무엇을 바꿔야 합니까? 바울은 한 단어로 말합니다. 새 피조물. 개역성경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의역하며, 그 새 창조의 대상을 개인으로 한정 짓고 있습니다만, 원문은 훨씬 풍성한 의미를 보여줍니다. 15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도 뭣(τί)도 아니고 무할례도 뭣도 아니라, 새 피조물(새 창조)이.

  οὔτε γὰρ περιτομή τί ἐστιν οὔτε ἀκροβυστία, ἀλλὰ καινὴ κτίσις.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크티시스'입니다. "창조", "피조물", "피로세계"를 지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 "새 창조"를 "뭣(a certain, 거시기)"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봅시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원칙은 할례자는 할례 받고, 무할례자는 무할례자로 남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분은 "뭣"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해야 할 중대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분을 철폐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반대로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중대사안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뭣도 아닌 문제는 얼른 정리를 하고, 지금 교회가 집중해야 하는 주제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 창조"인 것입니다. 

 

  비슷한 구절이 고린도후서 5:17에도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뭣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새 창조). 첫 것은 비껴갔고, 보라, 새것이  되어 버렸다.

  ὥστε εἴ τις ἐν Χριστῷ, καινὴ κτίσις· τὰ ἀρχαῖα παρῆλθεν, ἰδοὺ γέγονεν καινά·

 

  이 "뭣"을 남성 대명사로 이해할 수도 있고 중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갈라디아서의 용례를 따라 고린도후서 5:17의 티스(τις)도 중성으로 이해합니다. 즉 메시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어지는 18절을 보아도 분명합니다. 18절의 주어가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메시아 안에 있는 만물에 대해서 말할 때 저 '티스(뭣)'를 사용했습니다. '거시기'는 메시아 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새롭게 되어버린 무언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관심사이며 진정한 중대사안입니다.

 

  그 중대사안은 언제나 감추어져 있는데, 그것은 이 중대사안이 시간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고린도후서 5:17에 사용된 바울의 시제들은 우리의 숙고를 요구합니다. "첫 것이 비껴갔다"는 말은 에어리스트 시제를 사용하고, 이 시제는 시간과 무관합니다. 그저 장면을 보여줄 때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즉 첫 것이 비껴가버린 장면을 떠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것이 비껴가버린 장면 속에서 비로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완료 시제를 사용하며, 이미 벌어진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새 것이 되어버림 사건입니다. 즉 첫 것이 이미 지나간 자리에 이미 새 것이 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와도 공명하는데, 이사야는 새 만물이 늘 하나님의 눈 앞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6: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이 구절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새 하늘과 새 땅을 짓고 나면, 항상 하나님 앞에 있을 것이다. 2) 새 하늘과 새 땅은 항상 하나님 앞에 있으며, 이것이 후에 출현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2)번으로 이해한다면, 창조는 곧 출현입니다. 새 것의 도래입니다.

 

  이 새 것의 도래가 교회의 "뭣"입니다. 사람만이 새 것이 아니라 만물이 새 것으로 출현할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만물의 새로운 사용방식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다루어야 할 중대사안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돌아가 할례와 무할례의 구분을 철폐하는 것은 민족을 다루는 새로운 생활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이전에 제국들이 벌였던 타락에 물든 옛 습관으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바울은 격분합니다. 

 

  메시아 안에서 새 것이 출현함. 그리고 교회는 메시아 안에 있고, 이제 교회가 다루는 만물이 새 것으로서 그 새로운 양상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만이 교회에게 중요합니다.

 

-바울의 마지막 권고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라는 권고 사항이 이어집니다. 바울은 몸에 할례의 흔적을 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권속이 되려는 자들을 끝까지 신경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흔적은 할례가 아니라 예수의 흔적 뿐입니다. 거기사 새 창조의 입구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고 이 편지의 마지막인 은혜의 축도에서 바울의 고민이 느껴집니다. 이들이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머무는 형제들로 남기를, 바울은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마지막 문장을 썼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메시아 예수 우리 주님의 그 은혜가 너희의 그 숨결들과 함께, 형제들아, 아멘.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μετὰ τοῦ πνεύματος ὑμῶν,ἀδελφοί· ἀμήν.

 

  "프뉴마"는 '성령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인격', 혹은 '인생 전체의 방향성'을 지칭할 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영"이라 번역하는 그 단어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추상적인 단어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관사가 붙어있고("그 은혜"), 그 은혜는 형제들의 그 인격들/인생의 방향성과 함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갈라디아서를 잘 이해하셨다면 몸으로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들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살릴 것은 지금 바로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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