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릿말] : 십자가와 새 시대(1:1~10)

    A. 인삿말(1:1~5)  
    B. 책망 : 서신의 배경(1:6~10)

  *[감사] 단락이 없음

  II. [본론] : 복음

    A. 복음의 진리(1:11~2:21)

    B. 복음의 변호(3:1~5:12)

    C. 복음의 삶(5:13~6:10)

 

  III. [맺음말] : 십자가와 새 창조(6:11~18)

 

II-B. 복음의 변호(3:1~3:29)_(1)

1. 중요한 키워드들과 그 키워드들을 묶는 "큰 이야기"

 

[1]

갈라디아서 3:1,2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편지 전체를 요약하는 [머릿말]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바울이 했던 이야기는 자신의 사도됨과 자신의 계시받음을 둘러싼 교회 공동체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 속에서 드러난 복음의 성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복음의 내용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갈라디아 사람들아"와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가 새로운 주제 제기를 암시합니다). 바울이 이제 설명할 주제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밝히 보인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십자가의 빛 아래서 다음의 키워드들을 나열합니다. "너희의 성령 받음". "율법", 그리고 "믿음".

[2]

갈라디아서 3:3~6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먼저 '성령'과 '육체'를 대립시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을 놓고 '율법'과 '믿음'을 대립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표를 그려볼 수 있지요.

 

3:2 율법의 행위 믿음
3:3 육체 성령
3:5 율법의 행위 믿음

 

  즉 갈라디아의 믿는 이들이 겪고 있는 율법이냐 믿음이냐의 문제는 '성령'이냐 '육체'냐의 문제와 결부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육체'는 몸뚱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인간성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 대립되는 키워드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관련하여 설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키워드들을 십자가를 통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큰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바로 아브라함 언약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2:1~3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생활방식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의")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 그것이 '아브람'을 '아브라함'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그에게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이 생길 것이라는 것과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고(혹은 저주를 받고) 그들이 마침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창세기 12:1~3) 이 "아브라함의 언약"이 무척 중요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해서 11장으로 이어지는 타락의 맥락을 끊어내고, 하나님의 반전을 준비하기 시작한 장이 창세기 12장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약속하신 것이고, 이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에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가 완성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중대한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고, 아직 그 땅이 주어지지 않았기에(히브리서 11:13), 그 주어지지 않은 땅을 아브라함과 함께 누가 상속받을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남습니다.

 

  '성령'에 대해서도 생각해봅시다. '성령'도 '상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업'은 '상속'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상속의 보증이 되고, 이 상속의 약속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즉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가 그 상속의 보증으로 받는 것이 성령입니다(고린도후서 5:4,5 참조). 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큰 민족의 일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받는 길이 '믿음'입니다("그 안에서 또한 믿어"). 

  위의 본문에 나오는 "속량"은 출애굽 용어입니다. '자유롭게 함'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를 자유롭게("속량", 아폴뤼트로시스)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소유 중에 사람을 먼저 해방하시고, 이후 자신의 창조세계 전체 마저도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즉 "성령의 보증받음"은 자신이 자유를 얻은 사람이며, 아직 상속물인 창조세계의 해방이 남아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시작에 아브라함 이야기를 두고, 끝에는 만물의 상속으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 안에서 '성령이 상속을 위한 보증'이며, 이 성령을 받은 이들이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3]

갈라디아서 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런즉"이란 접속사는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근거로 결론을 내릴 때 쓰는 말이지요. 앞에서 바울은 아브라함 언약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그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므로, 믿어서 성령받은 이들이 "아브라함의 아들(후손)"임을 천명했습니다. 이것은 갑작스레 변경된 기준이 아니라, 본래 히브리 성경에 미리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라 말합니다(아직 신약성경은 완성되지도 않았을 때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이방인이 오직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에 참여하여 그 복을 누리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들 아브라함 후손이라 생각했던 유대인의 사고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2. 그럼 율법은 왜 주신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에 대해서 여러 
여러 물음표들을 남깁니다. 그럼 율법을 지켜온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또 믿음으로 아브라함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면서도 그 사이에 율법은 왜 주신 것일까요? 여러분들도 이런 질문을 한 번쯤은 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혼란스러운 문제 앞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라면 모를리없는 성경 구절 네 가지를 인용하며 짧게 설명을 덧붙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구절들은 ㄱ) 신명기 27:26, ㄴ) 하박국 2:4, ㄷ) 레위기 18:5, ㄹ) 신명기 21:23 입니다. 

 

[4]

갈라디아서 3:10~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ㄱ)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럼 율법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바울은 저주라 답합니다. 율법은 유대인을 저주 아래 붙잡아 두었습니다. 즉 율법은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게 하기는 커녕, 그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을 그 복의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왜냐하면 율법 행위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음(의롭게 됨)'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ㄴ)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에 의해 의인이 될 수 없다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바울은 믿음이라 답합니다. 
율법과 다른 길이 '믿음'의 길입니다. 의인, 즉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 언약과 연결됩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라 

  ㄷ)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의 길은 믿음의 길과 다른 것인데, 만일 율법을 행하려는 것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는, 법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정당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가 바로 죄 없는 메시아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율법 가운데서 율법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ㄹ)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의인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바울도 유대화주의자들도 갈라디아 교인들도 모두 입을 모아 '예수'라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그 예수에 대해서, 오늘 본문의 첫 구절에서 제시했던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율법의 저주 받음"이었음을 말합니다. 예수는 율법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셨으나, 하나님은 그 예수를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인정은 율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 예수는 율법에 따라 살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저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법을 신경쓰지 않으면서도 법의 목적 이루는 삶이고, 성경은 이러한 법을 넘어서는 삶을 가리켜 '믿음'이라 불러왔던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증명된 것은 믿음이지 법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법의 공백과도 같습니다. 법이 묻는 질문 속에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신 예수는, 결국 자신의 몸으로 법이 지향하지만(범법을 저지르지 않는 삶) 성취할 수 없는 삶(사랑의 삶)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계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지성소 안에 감춰두신 것이었고, 이제 마침내 드러나 성전의 휘장은 찢겨 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제가 앞에서 인용한 에베소서 1:14에도 등장했던 단어 "속량"이 이뤄졌습니다. '속량'은 출애굽 용어입니다. 예수를 통한 이 새로운 출애굽은, 법과 죄의 악순환 속에 갇혀 살던 사람이 이제 사랑의 삶으로 출애굽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계시 된 것은 율법의 결말인 무고한 사람의 죽음과, 그 죽음을 통해 드러난 믿음과 사랑이었습니다. 그 믿음과 사랑이 바로 참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이러한 삶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 성경 인용문들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즉 죽임 당한 메시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새롭게 구성되었고, 이들이 상속자이며, 따라서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이면서도 상속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을 통해 성령을 받았고, 이 성령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는 상속의 보증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바울은 율법을 따르는 삶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육체'라 말합니다.

 

  이로써 바울이 처음에 제시했던 키워드들이 거시적으로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배경으로 두고, 그 중심에는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두고서 모두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율법

 

[5]

갈라디아서 3:15~18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바울은 이제 메시아의 계시가 드러난 이후, 우리가 율법을 어찌 바라봐야 하는지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성경을 인용이 아니라 당시 일반적인 '유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언약"이라 번역하는 희랍어 디아떼케는 '유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디아떼케의 '유언'이라는 의미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설명하는 방식은 히브리서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히브리서 9:16,17) 논점은 간단합니다. 유언/언약은 체결되는 순간 아무렇게나 없앨 수 없을 뿐더러, 그 내용을 쉽게 변경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언약 이후에 생긴 율법은 언약을 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언약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율법은 믿음을 폐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 언약과 십자가 위에서 계시된 믿음의 삶 사이에 있는 율법은 임시적인 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임시법을 건너 뛰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나오는 자손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땅(유업)의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해야 합니다.

 

로마서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로써 우리는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의 몸,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대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율법은 두 몸(유대인과 비유대인)을 전제해야만 작동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삶의 완결성과 율법의 임시성을 전제합니다. 또한 어떤 공동체에서 살 것인가의 결과로 이어집니다. 한 몸의 공동체이냐, 두 몸의 공동체이냐.

  18절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의 주어가 '율법'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τῷ δὲ Ἀβραὰμ δι’ ἐπαγγελίας κεχάρισται  θεός.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호의를 베푸셨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법지킴에서 오는 정당성이 아니라, 약속에 따른 하나님의 호의(은혜, 베풂)입니다.

 

[6]

갈라디아서 3:19~22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1]에서 [5]까지의 내용을 이야기 하고나니, 이제 하나님께서 '임시법으로서의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해 알아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입니다. 이때 "중보"는 모세입니다. 복음 앞에 선 유대인은 이 "중보자"를 모세로 둘지, 아니면 그리스도로 둘지의 선택에 직면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선택 앞에 갈라디아 교회들도 직면했습니다. 만일 모세를 선택한다면,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분열된 세계관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은 하나이시고 어느 한 편만 위하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율법과 약속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율법과 약속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약속 안에서 율법이 임시적인 기능을 갖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들 중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율법은, 인간을 새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타락을 자극하며 그 참담한 인간성을 드러낸다. 이로써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죄 아래 가둔다.

-이것의 목적은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을 통해 죄를 정죄하고/신실한 삶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신실한 자들을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4. 너희는 누구?

 

[7]

갈라디아서 3:23~29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은 다시 주어를 바꾸어 "우리"를 말합니다. 이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들이 존경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유대인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사도들은 "믿음이 오기 전", 즉 메시아 예수를 통해 신실함의 삶이 드러나기 전에는 율법 아래 갇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정적인 기능만이 아니라, 메시아에게로 인도하는 후견인 교사로서의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고 말합니다. 몽학선생은 '후견인 교사'로서 자녀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를 훈육하는 노예 교사를 말합니다. 즉 임시 교사입니다. 이 몽학선생 아래서 이스라엘은 보호받으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인간으로의 변화를 경험할 수 없었고, 이것은 유대인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찌 "사도"가 된 것입니까? 메시아 예수를 만나 이 임시교사 아래 있지 않고 믿음으로 아브라함 언약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어를 바꾸어 "너희"를 말합니다. 이들도 유대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 언약에 참여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을 세례로 표현했고, 이 세례를 통해 메시아와 연합했음을 고백한 기억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생생했을 것입니다. 즉 이들은 율법이 목적하는 바를 이미 달성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같은 방식으로 아브라함 언약에 참여한, 그래서 하나의 식탁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한 백성이 탄생한 것이고, 이 백성 안에서는 유대인, 헬라인, 종, 자주자, 남자, 여자에 대한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이 위대한 하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분할할 수 없는 하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 하나에 '다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이 내용들이 아브라함 언약의 맥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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