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384 나의 갈 길 다가도록[각주:1]


민수기 20:1~13


1.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넘어온지 한 달도 안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홍해가 갈라지는 장관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를 유랑해야 한다는 사실에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고라'라는 사람은 모세가 아닌 자신이 지도자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고, 고라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모두 땅에 삼켜지는 큰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출애굽할 때 소고를 치며 찬양하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넘어온지 한 달도 안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미리암이 죽자, 이스라엘 전체에 불안이 고조됩니다. 게다가 이 죽음은 고생스러운 죽음입니다. 가나안 땅에 금세 당도해서 호사를 누릴 줄 알았더니, 미리암은 평생 누릴 것도 못누려보고 이 사막 한 가운데서 죽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세의 측근인 미리암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생스러운 삶을 살다가 죽는 것.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렇게 살다 죽는 게 싫어서, 원망을 쏟아냅니다. 심지어 이렇게 끔짝힌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차라리 고라의 자손들이 땅에 삼켜졌을 때, 나도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들은 자신들의 고생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또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광야에서 고생스럽게 살다가 죽을 바에야, 그냥 죽어버리는게 낫다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도 마음을 돌리기는 커녕, 산과 바위에게 어서 우리 위로 떨어져서 나를 죽여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이들은 이스라엘의 인간성을 고치시려는, 그래서 이스라엘과 함께 온세계를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자랑스럽게도 "주님의 총회"라 부릅니다. 이들은 "주님의 총회"가 광야에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광야로 이스라엘을 이끄신 분은 주님인데도 말입니다! 이들은 씨 뿌릴 땅, 무화과, 포도, 석류, 마실 물이 넘쳐나는 지상 낙원이 주님의 공동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광야는 이전에 있던 이집트보다도 못한 곳이니 말 다했습니다. 어쩌면 이때부터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 싹이 돋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주님의 공동체 여러분,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주님"은 어떤 주님이십니까? 절대 고생을 주지 않을 주님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생을 주십니다. 고생 속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생도 고생 나름입니다. 우리는 이 '고생'이란 말을 반으로 잘라야 합니다. 반으로 자르면 고생은 이렇데 두 가지로 나뉩니다. 내가 하는 고생이 있고, 남이 하는 고생이 있습니다. '나는 고생하면 안될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고생해선 안돼'라고 생각하고 움직이면, 그게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게 왜 우리를 고생시키냐고 화를 내고, 모세는 니네 때문에 내가 고생이라고 화를 냅니다. 양 쪽 모두가 "너 때문에 고생"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가 죄 짓고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고생 속에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바위를 향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바위도 듣고 사람들도 들을 것입니다. 모두가 고생하는 중에 그 말이 서로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을 것입니다. 고생 속에 피어나는 따뜻한 말은 고생을 의미있게 만듭니다. 고생을 고생 아니도록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도, 말씀이 우리의 고생을 아름다운 것으로 새롭게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모세는 말하지 않습니다. 칩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쌓인 분풀이를 바위에게 하듯이, 바위를 두 번이나 내리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본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바위만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너 때문에 고생'이라고 손가락질 할 때, 바위만이 말 없이 물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얻어맞고서도 바위는 물을 내주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해 고생하고 있는 것은, 오직 이 바위 밖에 없습니다. 후에 바울은 이 바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4

(우리 조상들은 모세에게 속하여...)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시간, 그 바위 앞에 섰습니다. 내 스트레스를 쏟으며 그 바위를 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바위에게 말을 거시겠습니까? 그럼 그 바위가 그 사람에게 죽음마저도 씻을 수 있는 자신의 잿물을 내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수를 얻은 사람은, 남의 고생은 지우고 자신의 고생은 스스로 지려고 할 것입니다. 로마서 구절을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15:1~2
  우리 '할 수 있는 이들'은 '할 수 없는 이들'의 연약한 면들을 짊어져야 하는 빚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맞는 것은 참기쁨이 아닙니다. 우리 각사람은 서로를 위해 집을 지어 주며, 우리 이웃이 하나님을 기뻐하도록 도웁시다.


  1. 2절 가사는 본문과 잘 들어맞았으나, 3절 가사는 문제가 있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이 곡 전에는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였는데, 이 곡 역시 3절 "밝고 빛난 천국에 나의 영혼 들어가겠네" 두 곡 모두 "천국"과 "영혼" 개념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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