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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5:1~13
모두가 여러분의 에클레시아 안에서 벌어지는 '포르네이아'에 대해 듣는데, 여러분에게 이러한 포르네이아는 이방인들 중에서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아내와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우쭐댈 뿐 도리어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 가운데서 그런 (없던) 일을 한 자를 내쫓지 않는 것입니까?
5장에 들어와서 바울은 '포르네이아'에 대해서 말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음행'이라 번역되어 있는데, 오늘날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음행인지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는 시대입니다. 성경은 '결혼 밖에서의 성적 관계'를 음행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자기 새엄마와 결혼한 그 사람은 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보며, '아 근친상간을 하지 말라는 것이군' 하고서 넘겨선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포르네이아가 이방인들 중에서도 없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바울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이 포르네이아를 공동체 전체가 아무런 문제가 아닌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 우쭐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는 선과 악을 넘어선 초윤리를 따르는 자들'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부인과 살림을 차린 사람이라도 공동체가 받아줄 수 있으며, 영과 육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가지고 '그러한 일은 육적인 일이니, 영적인 우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며 거드름을 피웠을 것입니다. ('영'은 안과 밖을 따질 수 없는 '숨'이며, '육'은 몸뚱이가 아닌, '타락한 아담적 인간성' 자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에클레시아 전체가 참으로 창조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희랍어로 '일(에르곤)'은 농작물 경작에서 온 단어입니다. 곧 창조적 과업을 수행함을 뜻합니다. 이 땅에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 곧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의 에클레시아는, 근친상간도 충격적인 판에,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우쭐대는, 이 땅에 없던 추악한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실은 비록 몸은 떠나 있으나, 그래도 숨으로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처럼, 이미 판단을 내렸으되,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한자를 이미 판단했습니다. 여러분과 내 숨이 함께 모일 때, 우리 주 예수의 힘도 함께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사탄에 내어주어야 합니다, 이는 그 살몸을 멸함으로써 주의 날에 그의 숨이 건져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에클레시아와 '몸으로' 함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숨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처럼 판단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판단하지 말라'는 금언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타인에 대한 판단은 불허되었지만, 지금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몸, 에클레시아는 곧 바울 자신입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은 '공동체와 개인이 하나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체주의 때문입니다. 공동체와 하나되어 무비판적이 되었다가, 인류가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하나됨은 전체주의가 아닐 뿐더러, 오늘날에도 '연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국가주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개인주의로 돌아서는 양자택일에 빠져선 안됩니다. 개인과 에클레시아는 하나되되, 내부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곧 '자기 자신을 판단함'입니다.
기독교의 내부 비판 전통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유대교 안에서 나타난 유대교 비판 운동이었습니다. 더불어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했고, 회개는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근본적인 내부 비판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돌아봄'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내부비판은 끊임없이 솟는 샘물과도 같이, 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지침이 됩니다. '내가 틀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대로 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에서 머물면 포류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붙잡고 살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메시아. '나는 틀렸고, 메시아는 옳으십니다.' 여기가 제자리를 찾는 시작점입니다. 내부비판의 시작, 샘물의 근원입니다.
같은 근원에 선 사람들은, 다시 말해 같은 뮈스테리온을 지나온 사람들은 설령 몸이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뮈스테리온을 지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메시아 예수를 인정하는 몸적 삶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들은 숨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숨은 실제입니다. 바울은 숨으로 연결된 메시아의 몸,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내부 비판적 판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주십시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과 숨줄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광야 공동체와도 같습니다. 왜 '광야'라는 말을 붙였느냐 하면, 현실이 정녕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풀 한포기 돋아날 수 없도록 황량한 사막, 그 곳이 현시대입니다. 바울은 포르네이아를 저지르는 사람을, 에클레시아가 뻔뻔하게 받아주지 말고 어서 광야로 내보내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의 살몸을 멸하기 위함'이라 말합니다. 이 '살몸'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몸뚱이가 아닙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죄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비뚤어진 인간성, 곧 아담성 자체를 육체라고 부릅니다. 즉 이 비뚤어진 인간성은 '오구오구' 관용해주는 것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분명한 기준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가 저지른 포르네이아는 에클레시아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으니, 그를 내보내어, 그로 하여금 비뚤어진 인간성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에클레시아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 밖이 곧 사탄이 활개치는 영역입니다.
바울은 '주의 날', 즉 지금은 오는시대와 겹쳐있는 현시대가 끝장나는 날에 그의 숨이 건져지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이 쓰였는데, 이 말은 신학용어이기 이전에 일상용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구원은 건저지는 것입니다.
포르네이아에 빠진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고린도후서>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2
케네스. E. 베일리의 구성에 따르면, 이 부분부터(5:6) 6:8까지가 고린도전서 내(內)의 두 번째 논문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여러분의 자랑은 '온전함'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작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오랜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새로운 반죽, 누룩 없는 반죽이 되십시오. 즉 우리의 유월절, 희생당한 메시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랜 누룩으로가 아닌, 썩고 '포르네이아'한 누룩으로도 아닌, 오직 빛나는 판결과 '참' 안에 있는 누룩없는 빵입니다.
'온전(칼론)'을 명사로 보느냐 형용사로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1) 여러분의 자랑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2) 여러분의 자랑은 온전함이 아닙니다.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포르네이아의 사건을 두고 자랑삼는 이유를 짚어낼 수 있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혜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온전하게 되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온전함은 일상에서 서로 분열하면서도,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는 기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온전함도 아닐뿐더러, 온전함을 자랑해선 안됩니다.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가져오는 것이 출애굽 내러티브입니다. 유월절, 그 뮈스테리온을 지나 광야로 나왔던 언약백성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급하게 출애굽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꼭 먹으라고 말씀하셨던 음식들 중에 누룩없는 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출애굽의 빵에 누룩이 없었든, 에클레시아라는 반죽에는 오랜 관습도, 포르네이아도, 들어가선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 빵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빛나는 판결'과 '참' 이 있을 뿐입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순전함'과 '진실함'이라 번역했습니다. 순전함이란 올바른 판단 아래 있다는 뜻이고, 희랍어로 진실(참)은 '알레떼이아'인데, 이것은 망각을 넘어 기억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이 이 문단 마지막에 둔 이 두 단어가, 출애굽 내러티브와 잘 어울립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에클레시아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길 바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앞서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에게 포르네이아하는 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썼습니다. 현시대의 넘쳐나는 포르노이아의 사람들, 또는 탐욕스런 사람들, 또는 그림자를 따르는 이들 모두를 뜻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피하려면 현시대 밖으로 완전히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포르네이아하거나, 탐욕스럽거나 그림자를 따르거나, 악담하거나, 뭐에 빠졌거나, 강요하고 빼앗는 동료 기독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 마십시오.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해 내가 무엇을 판단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판단해야 하는 사람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그 악인을 우리로부터 내쫓으십시오.
바울은 포르네이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시대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만일 이러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 속에 들어가거나, 모든 상거래를 비롯한 일상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머리 깎고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어울리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에클레시아 내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내부 비판이 제대로 기능해야 합니다. 에클레시아 안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과는 함께 어울리지도, 함께 성찬을 나누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이 에클레시아 밖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판단을 맡겨둡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것은 나에게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아(大我)'로서 에클레시아 안에서는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친필로 기록하여, 자신의 분명한 뜻을 전달합니다. 오늘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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