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전서 3:5~4:1
그러면 여러분은 아볼로가 진정 무엇이라고 여깁니까? 바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님이 맡겨 주신 대로, 여러분 각자를 신실하게 한 섬기는 이들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심는 사람도, 물 주는 사람도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이나 똑같고, 각자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입니다.
일상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글쓰기를 봅니다. 바울은 밭에 물을 주어 식물을 자라게 하는 일을 가지고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에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처음으로 '부른' 사람입니다. 그 부름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듣고 메시아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 화답하여 나온 이들이 고린도의 에클레시아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에베소 지역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숨님'에 관한 소식을 들은 아볼로가 바울의 뒤를 이어 이 에클레시아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의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누가 더 나은지 견주며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풀어내는 방식은 참으로 일상적입니다. '식물을 심고 물주는 일'을 통해 자신과 아볼로는 세력을 구성하는 거짓된 중심이 될 수 없음을 천명합니다.
여기서 '섬기는 이들'이라고 번역된 말은 '디아코니아'로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컨데 오늘날로 치면 식당의 웨이터입니다. 바울은 아볼로나 나나 식당의 웨이터니 그저 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날랐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원예를 예로 들면, 자신은 심고(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개척했습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아볼로는 나중에 고린도 에클레시아에 들어가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심고 물을 준 일일 뿐, 정작 식당 요리사이자 지배인으로서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각자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맏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대목이 나오자,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구절이 나오는 마태복음 20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의 예수님 이야기가 보여주듯, 우리는 흔히 믿음은 값없이 얻는, 말 그대로 선물이요,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그 대목이 전체 이야기에서 어디를 차지하는지 아는 것은 필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부활로 가져올 오는시대 직전에 주어진 말씀이었고, 포도원에 들어온 처음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즉 먼저 믿고 있던 사람이나(예컨데 유대인), 나중에 믿었던 사람이나(예컨데 이방인), 상관없이 모두 오는 시대의 뮈스테리온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서들은 이미 오는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는시대 안으로는 노력없이 거저 들어왔으나, 들어오고 나서의 삶은 당연히 우리의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열정페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대가가 있습니다. 오는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그 지혜로운 고용주는 우리의 노력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말하는 중에 '팔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팔복이 바로 오는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규범입니다. 흔히 인간은 팔복대로 살 수 없지만, 예수님은 가능하므로,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 팔복을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그릇된 해석입니다. 팔복은 살라고 주신 말씀이요, 오는시대를 살아가는 신실한 이들의 삶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반드시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거저주심을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처럼 토대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그 위에 어떻게 지을지 주의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미 놓은 것 외에 다른 토대를 놓을 수 없으니, 그 토대는 바로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심고 물주는 일을 통해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상황을 설명한 바울은, 이제는 건축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바울의 설명이 일상과 밀착해 있다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속한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러한 일상의 어휘들을 사용해 하나님의 일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학문적인 용어와 연구도 좋겠지만, 모두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소통의 언어가 더 좋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고린도 에클레시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건물'은 '성전'이 분명합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의 거저주심(은혜)를 따라 놓인 토대 위에서만 지을 수 있습니다. 그 토대란 바로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아무리 집을 잘 지어도 토대가 부실하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죽고 살아나신 메시아 예수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토대입니다. 그 어떠한 삶도, 또한 그 어떠한 죽음도, 그 토대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우주적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그 메시아 예수의 토대 위에서, 아볼로나 자신은 집을 지어가는 건축가라 말합니다. 그냥 건축가가 아니라 지혜로운 건축가입니다. 유대인에게 지혜는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였습니다. 지혜로운 건축가만이, 하늘과 땅을 하나되게 하는 성전을 창의적으로 지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누구나 자신이 그 위에 어떻게 지을지 주의해야 합니다'라고 한 것은, 그만큼 우리의 고민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충 지을 수도 없고, 정해진 룰이 있어서 그저 생각없이 몸만 움직일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덧붙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일'이라는 말은 그저 우리가 무언가를 힘들게 해야 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았기에 할 수 있는 '창조적 과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생각해야 하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삽니다.
바울과 아볼로 모두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주의를 기울여 메시아 예수의 터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가들입니다. 그러니 이 둘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바울 편이라, 누구는 아볼로 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누가 이 토대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물을 지으면, 모든 사람이 한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들의 업적을 밝히되, 불 가운데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은 모든 사람이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검증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운 업적이 검증을 이겨내면, 그들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업적이 불에 타 버리면, 그들은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구원을 얻겠지만, 마치 불을 통과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성전을 짓는 재료들이 나옵니다.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겹친 이 시대 속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성전을 지어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귀한 일입니다. 삶을 드려 이뤄야 할 이 땅의 과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 은, 보석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찮게 여기고,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재료로 대충 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무와 풀과 짚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들은 성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이 등장합니다. 불이 등장하는 때는 '그 날'입니다. 이 날이 지배인으로부터 우리의 노력에 대한 삯을 받는 날입니다. 바로 마지막 심판이 벌어지는 '주의 날'입니다. 그 날의 불이 그 끼어있는 시간동안 지었던 건물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풀떼기로 지은 집은 사라져 없어져버릴 것이지만, 귀한 것으로 지은 건물은 불 속에서도 건재할 것입니다. 풀떼기로 건물을 지은 사람도, 그 영원한 토대 위에 있으니 그 불을 지나 영광의 부활을 맞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겠지만, 그에게는 불 속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진 사람처럼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여러분 안에 사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침내 그 건물의 정체를 밝힙니다. 하나님의 성전이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 우리 안에 사십니다. '우리 안에' 라는 말은 개인의 안과 밖을 모두 포함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고 너희들 '가운데' 있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은 우리 속에, 그리고 나와 너 사이, 곧 우리의 관계에도 있습니다. 에클레시아 안에서 성령은 우리의 안팎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파괴하면'이라고 되어 있는 말은 개역성경에서 '더럽히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다'라는 말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절 마카비 혁명을 떠오르게 합니다.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이스라엘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밀어넣고,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던 돼지를 제물로 바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분개한 이스라엘이 마카비 가문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켜 시리아를 몰아냈습니다. 그러고는 성전을 다시 깨끗게 해서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성전봉헌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지금도 기념하는데 매년 12월 25일 '하누카'가 바로 그 날입니다.
그만큼 언약 백성에게 성전은 중요했습니다. 성전이 더럽혀지는 일은 모든 언약백성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가장 금기시 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라는 요한일서의 구절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구성하는 에클레시아의 일원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구성력(곧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일이요,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을 막아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를 더럽히는 이는, 그 더러움을 자신이 뒤집어 쓰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자신이 현시대에 지혜롭다고 여긴다면, 지혜로워지기 위해 어리석어 지십시오. 현시대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바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이 제 꾀에 넘어지게 하신다.
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주께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 어리석음을 아신다.
'자신을 속이지 말십시오.' 이 말에 대한 부연이 뒤에 이어집니다. 자신이 현시대에서 우위를 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생각한다면 둘 중에 하나는 아닌 것입니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현시대에서의 낮아짐'과 '오는시대의 성전됨'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이니, 바울이든 아볼로든, 게바든, 현시대든 생명이든 죽음이든, 미래든 현재든,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메시아의 것이고, 메시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자랑'은 '영광'과 같은 것입니다. '무엇을 뚜렷하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소유'의 문제와 연결시킬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뚜렷하게 하는 것은 나 스스로가 내가 가진 것의 가치 아래로 숙이는 일입니다. 예컨데 명품을 자랑한다면, 그 자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자신의 소유물인 명품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명품이 좋다 한들, 인격체인 자신보다 귀할리 없지 않습니까? 그는 뚜렷하게 할 대상을 잘못 찾았습니다.
편을 나누기 위해 선택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 에클레시아보다 높지 않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냐 게바냐, 이 모두가 에클레시아를 섬깁니다. 현시대냐 생명이냐 죽음이냐, 이 모든 것들이 에클레시아 안에서 조화로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미래냐 현재냐, 에클레시아가 시간을 뚫고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에클레시아의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우리가 뚜렷하게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뚜렷하게 해야 하느냐? 우리를 가지신 분을 뚜렷하게 해야 합니다. 또 소유냐 무소유냐의 양자택일에 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은 뜻을 가리키고 그 뜻을 만나면 말은 언제나 온전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말들은 메시아 예수를 뚜렷하게 하자는 뜻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진 우리의 주인인, 메시아의 삶을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뚜렷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일 예고
고린도전서 4:1
우리는 마땅히 메시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뮈스테리온을 맡은 집안 관리인으로 여겨야 합니다.
여기서 일꾼은 '배에서 노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우리' 즉 에클레시아인데, 바울이 에클레시아를 무엇이라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진노의 그릇들이 기이하게 변화되어 새로운 시간의 차원으로 들어옵니다.
'바울의 편지들 > 고린도전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물고기 이야기> (0) | 2016.01.24 |
---|---|
고린도전서 4:1~21 (2) | 2016.01.15 |
고린도전서 2:1~3:4 (0) | 2016.01.10 |
고린도전서 1:29~31 (0) | 2016.01.09 |
고린도전서 1:26~29 (0) | 2016.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