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한 것들을 대신해서/위해서/넘어서 할(ποιήσεις)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압니다.
더불어 나를 위해 사랑방을 준비해주십시오.
내가 여러분의 기도들을 통해, 여러분에게 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2]
나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포로된 에팝라가 안부를 묻습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이들인, 마가와 아리스타르코와
데마와 누가도 안부를 묻습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숨결과 함께 하기를.
[1]
'순종한다'는 말은 '아래서 듣는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즉 경청이 순종의 시작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었던 필레몬이 과연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정말로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동등한 형제로 받아들였을까요? 오네시모가 빚진 것을 정말 바울 앞으로 달아놓았을까요? 아니면 오네시모가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받기 위한 모든 절차와 책임들을 자진해서 짊어졌을까요? 우리는 뒤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바울 한 사람 만큼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필레몬이 바울의 말을 그리스도의 말처럼 듣고서 순종할 것을 말입니다.
여기는 12588일(만34년5개월15일)입니다. 이 본문을 처음 연구한지 1031일만입니다. 조르조 아감벤의 <내용없는 인간>을 읽다가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의 차이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포이에시스는 어둠 속에 있던 것을 빛으로 가져온 것으로서 그 목적/경계가 외부에 있습니다. 그러나 프락시스는 욕망/의지가 움직이는 곳까지가 목적/경계가 되는 내부 운동으로서(영어로 experience라고 할 때 per가 그 목적/경계를 보여주는 흔적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것을 빛으로 가져오는 전환의 의미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빌레몬서를 다시 보다가 눈이 번쩍 뜨인 구절이 있습니다.
ὅτι καὶ ὑπὲρ ἃ λέγω ποιήσεις
바울 자신이 말한 것들을 '포이에시스'할 것을 바울이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내가 너에게 목적을 부여했으니, 그 목적을 따라서 너의 의지를 사용하라는 프락시스의 개념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재 어둠 속에 놓여있는 빌레몬과의 관계를 빛 가운데로 가져오라는 것이고, 그 빛이란 주인과 종이었던 두 사람이, 형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아 안에서 말입니다.
게다가 '휘페르(ὑπὲρ)'라는 전치사 사용도 눈 여겨볼만 합니다. "대신하여/위하여/초과하여"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의미가 모두 포에이시스와 잘 연결됩니다. 포이에시스는 바울이 언어로 전달한 로고스를 대신하면서도, 로고스를 위한 것이고, 또 로고스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이 필레몬의 공동체를 방문하겠다고 합니다. 확신한다고 말했지만, 확인해보고 싶어서였을까요? 사랑방을 준비하고, 자신이 들를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 부탁합니다. 그리고 '은혜'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저는 '은혜'라는 말을 잘 안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값싸게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전 풀이에 보니까 '베풂'이라고 해놓았습니다. 류영모 선생은 '힘입어 산다'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 필레몬의 공동체로부터 힘입고자 합니다. 이 힘은 공동체가 하나님을 힘입을 때 생기는 힘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예수쟁이들은, 서로에게도 힘이 됩니다. 필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이고, A.D.1세기의 사람들이 상상할수도 없을만큼 파격적인 공동체를, 예수의 이름으로 이뤄나갈 때, 이것이 정말 바울의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면, 다른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의 힘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2]
익숙한 이름들이 보입니다. 다 <골로새서>에서 안부를 전하는 명단에 포함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를 돕고 또한 다른 공동체에 편지를 전달해주었던 동지들이지요. 여기서의 마가와 누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들입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3]
은혜가 다시 나왔으니, 또 이야기해봅니다. '은혜'는 '카리스'라는 말을 씁니다. 카리스는 '거저줌', '드러난 아름다움' 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파생된 말들이 많은데요. '유카리(감사)', '카라(기쁨)', '카리스마(선물)' 이 다 같은 어원의 단어들입니다. 거저 얻으면 감사요, 그럼 기쁨이 생기고, 선물이 또 그러한 것이지요.
한자를 파자해봅시다. '恩'. 일단 사람이 口 둘러싸여 있는 因이란 글자는, '원인'이란 뜻도 있고 '의지하다'란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心이 붙어 있으므로,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마음', '사람이 의지하는 마음'이라 풀 수 있습니다. 惠는 사전에 보니, '언행을 삼가고, 어진 마음'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풀어놓고 생각해보니, 사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거저 주는 마음 말입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일수록 거저 받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공간, 공기, 자연이 거저 받은 것이며, 우리의 부모님도 거저 받은 것이요, 진리의 말씀 역시 돈주고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았습니다. 자신의 주변이 온통 은혜임을 발견하면, 남에게 모질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행을 삼가고, 어진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아는 것이 사람의 사람됨의 근본이 됩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은혜는 사람다움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사람다움을 잃어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사람됨의 원인이 됩니다.
사람이 온통 거저받았다면, 준 사람이 있어야 않겠습니까? 준 사람 없이 그저 있다고 말하는건 은혜를 모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주신 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빌레몬서>의 마지막 문장에 밝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숨결과 함께 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이이십니다.
히브리서 1: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우주적 그리스도, 모든 만물을 보존케하시는 존재의 토대. 그이가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을 거저주시는 분이시요, 지수화풍이 그이의 손에 있습니다. 그이의 마음이 恩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온통 거저 주시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생을 어린양으로 내어놓아서라도 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바로 이러한 분을 힘입어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내가 사람답게 살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것도 거저 주십니다. 이것을 알고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언행을 조심합니다. 내 손에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닐 뿐더러, 나에게 거저 주시는 이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람다움.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 즉 '주 예수 힘입어 삶'이 어디에 함께 합니까? 우리의 숨결에!
숨을 안 쉬는 날은 없습니다. 그래서 숨이라 함은 곧 일상입니다. 날마다의 모든 순간입니다. 즉 바울의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는 삶이,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늘 있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이 삶 사는데에는 한 순간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순간을 은혜로, 모든 순간을 사람답게!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