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그래서'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어제 필레몬의 공동체가 잘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사랑과 신실함 속에서 좋음을 드러내는 공동체'라 바울이 칭찬했습니다. 이런 공동체는 바울이 어떤 지시를 내려도 잘 소화할 공동체입니다. 사랑과 신실함이 있으니 녹여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지시하는 내용들이 이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역시 많은 것을 숨김없이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만,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민감한 주제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뜸을 들입니다. 이 주제만큼은 '이 공동체가 해야할 일'이라 말하지 않고, 그대에게 다른 방식으로 말하겠다고 합니다. 바로 '권면'의 방식입니다.
'권면'이라 해놓은 제 번역이 좋은지는 모르겠습니다.("숨님처럼 말한다"로 고쳐놓았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간구하노니'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둘다 맘에 차지 않습니다.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깊이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이리 저리 머리 굴려봐도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곧 '성령'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파라.클레오'라는 희랍말입니다). 예전에 '보혜사(保惠師)'라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파라클레오'는 '곁에서 말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숨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듯, 숨님도 우리와 함께 있어, 우리 곁에서 속삭이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도와주시고, 설득하시고, 격려하고,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이 '파라클레오'라는 말에는 뜻이 엄청 많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성령께서 하시듯, 필레몬에게 숨처럼 부드럽게 뭔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무언가 '도달해야만 한다'고 지시하지 않고, 그에게 속삭이고자 합니다.
저는 그 다음 바울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정말 마음에 와닿았는데요. 이렇게 들립니다. '이제 노쇠해졌음에도,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내가!' 그 옛날 요엘이 말한 것이 바울에게 딱 들어맞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엘이 하나님의 숨으로 호흡하면, 자녀들은 미리 말하고, 청년들은 볼 것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고, 노예들도 (자녀들과 같이) 예언 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아비'가 되면, 점점 상상력이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사라져가며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이 어려워 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룩한 숨으로 호흡하는 이가 분명합니다. 노쇠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에게 더욱 사로잡혀 있으니 말입니다.(우리도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그가 숨님을 따라 필레몬에게 무언가 말하고자 합니다.
[2]
바로 자신의 아들에 관해서입니다. 아들 잘되기를 청탁하는 느낌이지만, 사실 이 아들은 바울의 친아들이 아니라 감옥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바로 '오네시모'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의 이름은 <골로새서> 4장에서 한 번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이 <골로새서>의 구절로 보아,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콜로사이 지역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직스럽고 사랑받는 형제'라는 말에서, 이 오네시모 역시 예수를 믿어 숨님으로 호흡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네시모가 전에는 필레몬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실 오네시모는 노예였습니다. 그것도 필레몬에게 속한. 그런데 필레몬 아래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노예가 도망치는 것은 당시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중범죄였습니다. 당시의 노예는 오늘날 석유같은 것이라, 없으면 사회가 돌아가지 못하고 그 사회 근간이 무너질 위기에 빠집니다. 그래서 엄히 다스립니다.(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말도 안되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도망친 오네시모가 어찌되었든 바울을 만납니다. 아마도 평소에 필레몬의 가정 안에서 그 이름을 자주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빌레몬서>를 쓰고 있는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감옥 안에서 바울을 만났는지, 아니면 그 바울을 돕기 위해 계속 면회를 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오네시모가 예수를 믿었고, 바울의 아들처럼 그의 사역을 돕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오네시모에 대해서 필레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3]
그를 다시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필레몬에게 전달되는 이 편지는 아마도 오네시모 손에 들려졌겠지요. 자신이 도망쳤던 주인에게 오네시모는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다시 콜로사이로 돌아갔을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 일에 애가 끓는다고 말합니다.
사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저 자기 옆에서 자신을 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에도 더이상 공권력이 아니라 복음에 포로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감옥 안에서도 복음이 꽃피워, 하나님의 '좋음'을 드러내는 언약 공동체가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바울도 무척 바랬던 일이고, 그의 동역자인 필레몬도 이 일에 열심낼 사람입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필레몬은 이 일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대신해서" 이 일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이 사람은 마치 요셉과 같지 않습니까? 물론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은 것이고, 그는 제 발로 나온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모든 절망적인 순간을 반전시켜, 바울과 필레몬이 간절히 바라며 하고자 하는 그 일을 지금 이 사람이 아주 적절하게 돕고 있습니다! 마치 요셉처럼!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오네시모를 편지 한 장 들려서 다시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필레몬이 깨닫게 된 그 '좋음'이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오네시모를 위함이 아니라 필레몬을 위해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필레몬에게 A.D.1세기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충격적인 제안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제안이 필레몬을 두 갈림길로 안내할 것입니다. 이 내용은 내일 살펴보겠습니다.
11555日. 한 분 하나님(一) + 인격을 관통하는 뚫힌 한 숨(忠) = †. 吾悟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