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는 <빌레몬서>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빌레몬서는 아주 짧습니다. 한 장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막상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한장자리 편지안에 많은 사연과 사건들이 겹쳐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편지글이 늘 그러하듯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등장합니다. 보내는 사람은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을 어찌 소개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포로". 바울의 재치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바울은 실제로 에베소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상황을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도의 언어유희로 승화시킵니다. '내가 지금 감옥에 묶여 있긴한데, 나는 기실 그리스도 예수께 묶인 사람이니까, 뭐 묶인 사람 맞네. 허허' 이 사람은 반전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도대체 무엇이 절망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죽음도 한낯 잔잔해질 파도로 보일 것입니다.
받는 사람은 필레몬, 압피아, 아르킵포스입니다.(희랍어 철자로 쓰인대로 이름을 적어봤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한 가족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집에서 예수 공동체가 모였나 봅니다. 바울은 이들 가족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르킵포스'라는 사람은 지난 주 <골로새서> 마지막 시간에 등장했던 이름입니다. 바울이 콜로사이 지역으로 편지를 보내면서 말미에 당부하기를,
그리고 아르킵포스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주 안에서 네가 맡은 것을 확실히 알아, 그것을 이루라!"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아르킵포스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만났던 친구를 <빌레몬서>에서 만나니, 마치 여행갔다가 우연히 만난 동네 친구마냥 반갑습니다.
이 공동체 사람들도 아빠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인 바울과는 형제지간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기쁨과 평화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만 생각하자면, 답이 없고 사방이 막혀있으나, 하나님 아빠를 생각하면 새로운 차원의 기쁨이 있고,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2]
여기서 '그대'라는 표현에 주목해봅시다. 바울은 앞에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여럿 언급했지만, 이 편지는 계속 "당신에게", "그대에게" 이렇게 한 사람을 계속 부릅니다. 이 사람은 필레몬입니다. 이 사람이 공동체의 대표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 특별히 바울이 필레몬에게 당부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조금 더 뒤에가서 알아봅시다.
일단 바울은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그들이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 사람들 사이에 예수를 향한, 서로를 향햔 사랑과 신실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씻어난 이'라 쓰인 말은 '성도(聖徒)'라는 말을 그렇게 풀어본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일로는 세례 받은 이요, 보이지 않는 일로는 하나님의 숨결로 씻어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신실함'은 '믿음'이란 말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믿음'은 '따름'입니다. 마음만으로는 따를 수 없습니다. 마음도 따르고 몸도 따라야 믿음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믿음직스럽다'는 표현이 딱 좋겠습니다. 마음도 따르고, 몸도 따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러운 것이 우리가 한 단어로 부르는 '믿음'입니다.
이 필레몬 공동체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럽게 공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공동생활(코이노니아)이라는 말에서 나중에 '교회'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애시당초 교회는 무언가를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러운 공동생활이 '좋음'을 깨닫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좋음(善)'입니까? 좋음은 하나님입니다. 신기하게도 희랍어로 '좋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 분이 좋음이신데, 그 좋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좋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도 하고, 믿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좋음을 깨닫게 하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좋음을, 뚜렷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신실함 속에서의 공동생활입니다. 즉 씻어난 이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럽게,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며 참가족처럼 살아가는 일이, 진정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깨닫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 좋음은 하나님 가족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있다'고 말한 것을, 저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슬픔입니다. 우리도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 믿음으로 채워서, 서로 나눠야겠습니다. 이것이 없이 계신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힘입니다. 그리고 이 힘이,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만듭니다.
[3]
바울은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인생을 건 사람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씻어난 이들은 이 일에 인생을 겁니다. 즉 언약 공동체입니다. 씻어난 이들의 할 일은 언약 공동체를 이루가는 일입니다. 언약 공동체는 이 땅의 빛과 소금입니다. 모든 열방에게 하나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빛의 등대입니다. 이 등대 세우는 일이 모든 예수쟁이들의 할 일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을 비롯한 씻어난 이들이 애끓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필레몬 공동체가 그렇게 신실함 속에서 공동생활하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 소식은, 그러한 공동체 세우는 일에 열심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참된 공동체의 소식에, 씻어난 이들이 기쁨과 격려를 얻었습니다.
이 기쁨은 바울이 맨 처음 말했던 바로 그 기쁨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냥 세상살이 하다가 얻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새로운 차원으로부터 오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