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처참한 본문은 '마음에 한 분 모시기를 싫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한 분 없는 마음은 '상실한 마음'이다. 하나를 잃었다.
이 하나를 잃은 마음으로부터 '합당하지 못한 행동'이 나온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하나' 혹은 '한 분'이라 옮겨보았다.
요즘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너무 흔하여, 이 말의 무게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근거없는 억견처럼, 때로는 보험 상품처럼 들리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말은 진리는 하나고, 그 하나는 한 분이며, 인격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시기를'이다.
진리는 이렇다 저렇다 재단하여, 마치 고깃덩이 다루듯 하는 것이 아니다.
모시는 것이다. 진리는 나보다 크다. 커도 한참 크다.
나보다 먼저 있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 진리에 의해 지음 받았다.
그런데 그 '하나'를 마음에 모시지 않으니, 마음은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하여 분열된다.
그래서 '한 분 없는, 상실한 마음'의 구체적인 예들이 열거되는데, 그러한 마음의 특징은 둘이다.
하나와 갈라진 마음이 낳는 것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
그래서 시기도 둘이요, 살인도 둘이요, 분쟁도 둘이요, 수군수군도 둘이다.
모두 두 패로 나누어 비교하고, 상대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비방하고 싸우고자 함이다.
진리를 자랑하지 않고, 그 진리를 거스르는 자신을 자랑한다.
타인 속에서, 심지어 가족 속에서도 하나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찾지 않는다.
하나 없이는 하나될 수 없는데, 그 하나가 마음에 없으니 거역하고 믿지 못한다.
무정하고, 무자비하다.
이러한 일에 대한 하나의 판단은 사형이다. 흔히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독단적이라 판단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 판단이야 말로 독단적이다.
옛날에 '칼리쿨라'라는 로마 황제가 악행들의 목록들을 주욱 적어놓고,
어기는 자들을 처벌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신 일들을, 오늘날 나를 포함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즉각적으로 죽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을 둘로 나눈 이들은 오히려 스스로 자멸하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로부터 창조된 사람과 세계가, 둘로 찢긴 앎과 삶으로는 살아갈 수 없도록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 한 분은 인간에 대한 즉각적인 판결시행을 유보하셨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판단하길 원하신다.
자기 맘에 하나 없어, 큰 일 났음을 깨치고 돌아오길 원하신다.
왜냐하면, 함께 농사 짓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 분 하나님 마음에 모시기로 하고, 그의 말숨을 듣고자 할 때,
그 때부터 기존의 모든 맘을 갈아엎는 새로운 생명 농사가 시작된다.
하나를 모시는 것은, 곧 내 맘에 생명을 파종하는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