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이고자 시작한 대화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는 대제사장에게로 끌려갑니다. 그 자리에는 장로들, 서기관들(문법학자)이 다 모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살펴보면, 가장 아래는 농민들이 있었고, 그 위로는 기술직(예수님도 석수였기 때문에 기술직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가장 꼭대기에는 정치, 종교 관련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이스라엘은 성직자가 곧 정치가). 1차 산업이 근저에 있고, 그 위에 2차 산업이, 그리고 서비스 업이 가장 꼭대기에 있는 오늘날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층에 끼어주지도 않는,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자, 특히 과부, 병자, 노예, 어린이, 세리, 사마리아인 등. 이런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사람 취급도 못받던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이 피라미드같은 사회 속에서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예컨데, 핸드폰을 판매하는 사람들은 많아지는데 결국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지면 말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이 사회는 유지가 안될거에요. 1차 산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근본입니다. 핸드폰은 없이 살 수 있어도 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럼 1차 산업 종사하는 사람들을 귀히 여겨야 하는데 상황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천대를 받습니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존경을 받습니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인, 정치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오늘날의 화이트 칼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루종일 땀을 흘리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몸을 많이 쓰지 않고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몸을 써서 힘들게 일하는 것보다, 몸쓰지 않고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을 좋아할까요? 만약 여러분들이 부모님께 엄마 저 오늘부터 노동의 참 맛을 알고 싶어요. 노동자로서 평생을 살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농부가 꿈이에요. 평생 논과 밭을 일구겠어요.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회적 인식은 힘들게 몸쓰는 것보다, 몸쓰지 않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그래서 몸쓰지 않는 일 하는 사람을 높게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낮게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힘들게 몸쓰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몸편한 사람, 몸쓰는 사람으로 구분 지어놓은 세상에서, 몸조차 쓸 수 없는 사람들은 비천한 신세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어제 수능공부하는 제 친구도 어제 사회문화 문제를 하나 보여줬습니다. 표를 해석하는 문제인데, 선택지에는 "고학력일수록 평균 소득이 높다" 이런 표현들을 봤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지요. 그래서 다들 몸 안쓰고,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서 지금 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러한 체제가 세워졌을까요? 죽음 때문입니다. 몸이 힘든 것은 죽음과 가깝습니다. 몸이 편한 것은 죽음과 멀리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몸이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것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합니다. 모두가 몸편한 것을 추구하니 자연스럽게 이런 그림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계급체계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극심한 육체노동 없이 많은 것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이러한 사회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까 사회의 부속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저 높은 곳을 바라봅니다. 적게 먹더라도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이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그런데도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삶은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삶일테니까요.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좋은지 안좋은지는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하고.
아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 노답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답을 주셨습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되어 살 수 있는 새로운 그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끌려가시는 것입니다.
2. 추궁과 짧막한 대답
그를 끌고간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왜 끌고 왔을까요? 이제 심문이 시작됩니다.
1) 거짓 증거를 찾아라!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그런데 그 심문은 애시당초 목적이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못박아 놓고 심문을 시작합니다. 세상에 이런 심문이 있습니까? 예수를 죽일 혐의를 찾고자, 사람들이 나서서 거짓으로 죽일 증거가 여기 있네 저기 있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아무리 혐의를 찾으려 해도 그럴만한 증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발을 동동 굴렀겠지요.
그도 당연한 것이 예수는 누군가를 죽이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살리는 분이었습니다. '살림살이'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는 살리고자 했기 때문에 죽임당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의 시험을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은 고생하는 민중들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보자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폭력으로 치닫는 이스라엘의 대장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즉 저 위에 그려놓은, 죽음 위에 세운 몇몇 사람들을 몸 편하게 하는 이스라엘 사회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저 피라미드 높은 곳 보지 않고, 아래를 돌아보십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면박만 주었던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섬김입니다.
'섬기다'는 仕입니다. '벼슬 사', '섬길 사'입니다. 재밌는 일입니다. 우리는 '벼슬아치'라는 말도 있고, 이 '벼슬'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쓸 때가 많지만, 사실 벼슬이라는 말이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섬김은 무엇입니까? 벼슬을 맡은 이들이 하는 것은 다스리는 일입니다. 다스리는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고루 나눠주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살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소외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벼슬을 맡은 사람들이 고루 나눠주지 않고, 자신들이 많이 갖습니다. 전체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소외를 만듭니다. 벼슬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섬기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이 다스림을 맡은 사람들이 섬기지 않았던지, 이 벼슬이라는 말이 나쁜 말로 들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벼슬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벼슬. 그런데 벼슬달고도 섬기지 않는 이들이, 진짜 벼슬달고 섬기는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 그는 사회를 무너뜨리려 했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누군가 증언하기를, 예수가 성전을 무너뜨린다고 했다 말했습니다.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 유대사회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입니다. 끊임없이 소와 양을 먹고, 끊임없이 창자와 부속 고기와 핏물을 배설하는 어마어마한 소화기관입니다. 그리고 이 소화기관의 머리에는 저 벼슬노릇 못하는 안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 아닙니까? 예수께서 성전을 무너뜨린다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흘만에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짓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이 말을 저 지도자들이 어찌 들었을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 저 예수는 사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구나!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보수'라고 합니다.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은 '진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수냐 진보냐는 말은 별로 중요한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가 중요하고, 무엇을 바꾸려고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지, 사람은 누구나 보수이기도 하고 진보이기도 합니다. 지금 유대 지도자들은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데 있어서는 보수입니다. 그들이 유지하고자 하는 사회는 아까 보여드린 그대로의 사회입니다. 자신 높이 앉아 노동도 않고 많이 먹을 수 있는 그 사회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는 진보입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있는 생명을 없애도 된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도 틀렸고, 그들이 바꾸려고 하는 것도 틀렸습니다.
3)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라 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처음에는 죽일 증거를 찾더니, 이후에는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고발하더니, 이제는 대제사장이 나서서 묻습니다. "왜 대답이 없느냐?" 그러나 예수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러자 던지는 최후의 질문,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ㄱㄹ을 기억하면 됩니다. '그리'. '기름'.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부어졌다는 말입니다. 기름이 하나님의 영입니다. 즉 하나님과 한마음인 사람이 나타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 악을 심판하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을 전하며, 다시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할 사람이 그리스도입니다. 즉 하나님의 대리자 세상의 진정한 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진정한 벼슬입니다.
닭도 머리 위에 볏 달도 있지 않습니까? 볏 단 놈이 숫놈이고 왕입니다. 예수의 머리에도 볏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이 볏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부어졌으니 진정한 벼슬입니다. 그런데 군림하고 짜먹고 짓밟는 벼슬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벼슬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그럼 예수님만 그러한 벼슬이시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33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일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 줄은 승천입니다. 승천은 조금 뒤에 자세히 말하기로하고, 어쨌거나 승천이 벌어진 이후, 또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승천하신 이가,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그 기름을, 그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가 기록하기를, 여러분이 지금 이 일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 성령 부어진 사람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섬김으로 세상을 살리도록 임명 받은 이가 그리스도입니다. 임명은 기름으로 임명됩니다. 즉 성령이 부어진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똑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섬김이 무엇입니까? 섬김은 물과 같은 것입니다. 내려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저 그림의 높은 곳에 올라갈 것을 바라지 않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말 달라질 것입니다. 전쟁으로 권력으로 정치로 바꾸지 못했던 세상이, 섬김으로 정말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우러러보고 부러워했던 화려하고 좋아보였던 것들이 다 거짓말이었음을 알고, 죽음에 가까이 내려가서 사는 사람이 생겨나면 세상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목적은 저 피라미드의 위도 아래도 아니었습니다. 피라미드의 안과 밖을 포함한 전체였습니다.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저 위의 저러고 있는 사람도 사람답지 않습니다. 저 아래 눌려 있는 사람도 사람답지 않습니다. 저기 쫒겨난 사람들은 더더욱 사람다운 삶을 못살고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가장 사람다운 것은 섬김이요, 그 가장 사람다운 것이 사람을 살립니다. 섬김이 세상을 바꿉니다. 검과 몽치가 아니라, 정치와 권력이 아니라, 대야와 수건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지금 그 진정한 왕,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무력하게 끌려와서는, 지금 이런저런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문 속에서 진정한 왕은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죽일 증거를 찾다못해 참지 못한 대제사장이 마침내 최후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세상의 진정한 왕이냐?" 예수가 침묵을 깨고 대답합니다.
3. 예수의 답변 : 너희가 인자의 승천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우리는 이 말이 어떤 말인지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쓰인, 사두개인을 제외한 모든 유대인이 갈망하는 바로 그 이야기. 인자가 악을 처단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에 휩싸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계에 대한 영원한 지배권을 인정받습니다. 이것을 한 글자로 말하면 '승천'입니다. 승천은 왕위 대관식입니다.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로부터 인자가 진정한 왕의 대권을 이양받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승천하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충격적인 말입니다. 돌려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최고 지도자 앞에, 그는 세상의 왕으로서 심문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이 부어진 그리스도로 꿇려 있습니다. 악을 처단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왕위를 이양받을 인자로서 그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여기서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는 것은, 재판에서 죄인의 변론이 들을 가치도 없다고 판단될 때 하는 행위입니다. 왜 대제사장들과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께 이런 대접을 한 것입니까? 그들은 섬김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 손에는 대야를 쥐고, 허리춤에는 수건을 차고서,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그런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 앞에 섬김의 왕은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각 배신자는,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비자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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