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새롭게 시작된 역사

-승천, 새창조, 새 하늘과 새 땅




0. 들어가기 전에


  이번 주중에 D양으로부터 받은 질문은 그야말로 멘붕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작업의 주제를 묻는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우리는 그간 10주간의 여정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것을 질문한다는 것은 제가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것은 저에게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디테일한 내용들을 다루느라 놓치고 있었던 큰 그림을 상기시켜주는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난주 H양이나 이번 주 D양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질문과 의견을 통해 이 글들이 더욱 우리의 눈높이에 맞는 글로 점점 발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성육신입니다) 따라서 각 편지들에 대해서 더 많은 질문과 더 다채로운 의견들이 필요합니다. 글 전체를 우리가 다시 새롭게 칠합시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예수 이야기를 위해서.


  어쨌든, 이러하여 오늘은 D양의 바로 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유대인의 왕이 왜 메시아죠?'


  그간의 우리의 여정은 독특했습니다. 기존에 들어보지 못했던 얘기들. 게다가 그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욱 생소했습니다. 누구나 알법한 그 인물에 대해서 우리가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역사' 였습니다.


  우리는 역사, 역사 노래를 부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죽하면 모든 편지들의 제목에 어떻게든 역사라는 말을 죄다 넣으려고 했겠습니까? 이토록 역사를 강조한데에는 이유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 역사 위에서만이 당대의 사람들과 함께 숨 쉬며 먹었던 예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해야, 이 역사를 매개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간 이 작업을 교회가 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가지고 예수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했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예수가 태어나셨고 살았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빼놓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역사를 전체적으로 개관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말하지 못한 부분들을 채워 넣겠습니다. 그리고는 질문을 받는 순서로 모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대인의 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우리가 한 사람을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지 깨닫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1. 시작된 역사




  유대인들의 손으로 기록된 역사는 ‘역사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연한 시작이 아닌, 분명한 의도와 뜻을 가진 존재에 의한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창조’라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 창조라는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진화론과 싸우는 반대편' 정도로 여겨지기 때문에, 제목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제목이 '시작된 역사'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뜻을 가진 어떤 존재에 의해) 시작된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이 있음에 어떠한 뜻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냥 뜻 정도가 아닌, 아름답고 선한 목적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어, 그 안에 의미로 풍성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목적과 의미 안에 우리가 말하는 정의도, 사랑도, 아름다움도 들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 두 가지를 살펴봅시다.


  먼저는, 흔히 물질을 영혼의 감옥이라 말하는 사상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 자체를 악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창조를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이 세상 자체가 신이라 생각하는 사상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창조에 대해서 다루지 않으며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 적응하여 하나 되려 합니다. 이 두 가지 방향은 세상의 악에 대해서 제대로 된 설명을 줄래야 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전자의 경우 악은 그저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후자의 경우 그것은 그냥 감내해나가야 할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악의 해결을 말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간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왔습니까? 시작된 역사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뜻있는 어떤 존재에 의해 시작된 역사를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선택은 모두 좋지 않습니다. 창조의 선함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덕에 대해서는 약육강식의 또 다른 방편으로, 사랑에 대해서는 이기적 유전자들의 돌연변이로, 정의에 대해서는 인간의 합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실제로 현대사회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자연과 하나되자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사실 우리는 그 자연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연은 변화무쌍하며, (인간을 그토록 괴롭게 했던 올림포스 신들의 변덕의 근원은 자연입니다) 자연과 하나되고픈 인간은 그저 인간을 변화무쌍한 세상처럼 변화무쌍하게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자연과 하나되기엔 우리의 마음 속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 정의, 사랑,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 수컷 사마귀를 잡아먹는 암컷 사마귀를 보며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곤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 억울하다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동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한 자연을 통해 배우는 것은 영원이 아닙니다. 생성과 소멸의 반복일 뿐입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우리가 처음에 받았던 강의안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와중에 이스라엘의 역사가들은 물질을 떠나려고도 물질과 하나 되려고도 하지 않는 좁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국가들이 앞에 설명한 두 가지 사상들(물질을 거부하거나, 물질과 하나되려는 생각들)을 강력하게 붙잡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이스라엘은 창조주의 선한 창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왜 일반적인 것들을 따라가지 않고, 그들은 당시도 지금도 낯선 그 생각을 끝까지 붙들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창조주-인간-창조세계' 의 구도 안에서 인간을 생각합니다. 이 인간은 창조세계를 악하다고 거부하지도, 이 창조세계와 하나 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미는 이 창조세계를 창조주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일에 있습니다. 이 다스림은 몇몇 사람들에게, 성서가 환경파괴의 사상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되었으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만약 성경이 환경파괴를 조장한다면, 이것은 창조주 자신이 지은 세계를 창조주 스스로 파괴하는 일이 됩니다. 만약, 창조주가 이 땅을 선하게 지은 것이 맞다면,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으며, 성서가 말하는 다스림이 오해받는 것은 오늘날의 다스림이란 말이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그저 내 멋대로 해먹는 것'과 동일시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다스림은 그러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다스림은 마치 부르스 웨인의 대 저택을 잘 유지하고 발전시킬 알프레도와 같습니다. 돌봄입니다. 섬김입니다. 가꿈입니다.



2. 뒤틀린 역사


  그러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고 창조세계를 다스려야할 인간의 타락은 곧 모든 세계의 왜곡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이점에 대해서 유대인들을 향해 고개를 갸우뚱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를 알기 위해 유대인의 역사를 보자고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의 역사가 보여주는 스케일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 전체에 대한, 창조주로부터 시작된, 모든 인간과 그 인간들의 뒤틀림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만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까? 이거 혹시, 이제까지 우리가 말해온 '역사'라 함은 '유대인들이 대표로 기록한 인류의 역사'아닙니까?


  어찌되었든 인간은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여러가지 난관이 있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도 물질에 종속된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물질을 끊임없이 얻어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려고 하는 인간. 이것 때문에 치고 박고 국가와 국가가 싸우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수 없는 인간. 이 생존의 어두운 그림자가 모든 인간 위에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존에 묶이게 된 이유에는 창조주의 뜻을 거절한 반역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를 다루자했지만, 역사가 시작되고 뒤틀림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유대인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타락의 반전으로서 창조주는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진 정체성입니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민족. 이스라엘.


  (사실 세상은 아직도 그 뒤틀림으로 신음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뒤틀린 역사에 대해서 더욱 탐구해야합니다. 인간의 모든 차원, 분야, 지역에서 어떠한 뒤틀림이 잔존해있는지를 연구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가리켜줄 것입니다.)


3. 구출된 역사




  그러나 이스라엘 조차도 이 생존의 톱니바퀴에 끼어 비명을 지를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쥐어짜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그 밑에서 이스라엘도 '살기 위해 파라오의 곡식 창고 짓는 일에 여념이 없었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불러내십니다. 그냥 '니네 이집트에서 나와'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배터리 삼아 빨아먹던 파라오를 파멸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이집트 사람, 이스라엘 사람은 아무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타락의 반전들인 이스라엘을 구출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 생존의 문제의 한가운데서 이스라엘은 창조주의 손에 이끌려 탈출한 역사적인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아무 것도 없는 광야로 나온 것은 정말 상징적인 것이죠. 생존을 위해서 노동을 쏟아야할 그 어떤 곳도 없는 황무지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 곳에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사명과 생활방식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이 바로 열방의 빛이 되는 사명입니다. 토라를 지킴으로 모든 민족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등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역사의 뒤틀림을 해결하고자 이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을 따라 이스라엘은 이전에 생존을 목적으로 살던 생활방식을 모두 뜯어고쳐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의 삶은 자신들의 생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생존에 집착할 때 그들은 곤란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달라고, 물을 달라고, 나중에는 신을 달라고 원망하고 불평할 때, 그것은 다시 뒤틀림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덮고 또 덮고 역사는 이루어져나갔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땅을 얻고,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중심으로, 이 민족을 중심으로 모든 세계가 하늘의 다스림을 다시 맛보게 될 것을 축하했습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각인된 이 위대한 역사를, 우리는 다음의 구성요소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1) 악한 압제자

2) 선택된 지도자

3) 하나님의 승리

4) 희생을 통한 구원

5) 새로운 사명과 생활 방식

6) 하나님의 임재

7) 약속된 유업의 땅


  이것은 지구촌 어디를 가나, 문제가 벌어지는 곳에는 어디든 적용되는 요소들입니다.


4. 기억된 역사






  우려는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국들 사이에 끼인 이스라엘은 곧 자신들의 부르심을 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뒤틀림을 해결하기 위해 부름받은 민족은, 오히려 생존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 나라는 둘로 찢어지고, 부유함을 약속하는 이방 제국들의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이 늘어갔고, 성전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부패와 탐욕으로 얼룩져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땅을 잃고 비참한 포로가 되었습니다. 언약 백성이 땅을 잃었다는 것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그들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지위가 박탈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슬퍼했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포로기는 이스라엘에게 민족적 반성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약속의 땅을 잃었다는 깊은 반성. 언약 백성의 지위를 잃었다는 처참함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시기를 그들은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포로기 기간 동안 들리는 예언자들의 울림 속에서 그들은 다시 한 번 포로에서 자유를 얻는 위대한 사건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출애굽.


  그 두 번째 출애굽에 대한 기억으로 유대인들은 버텨왔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출애굽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나,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시고, 자신들을 지배하는 악한 압제자의 멸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율법을 지켜왔던 이스라엘이 옳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나머지 민족들은 모두 틀렸다는 사실과 함께), 성전이 회복되고, 다시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소망. 이 소망으로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고, 이 소망으로 헤롯은 성전을 리모델링했으며, 이 소망으로 이스라엘은 예수를 죽였습니다. 출애굽이 다시 일어날 것을 갈망하는 것은 옳았으나,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출애굽은, 실제로 벌어질 출애굽의 위대함을 감지하지도, 담아내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출애굽을 갈망하는 그 안에서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소외되며, 성전이 혁명을 모의하는 강도들이 소굴이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5. 역사의 주인 :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


  이러한 두 번째 출애굽의 갈망의 절정에, 한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출애굽을 말씀하십니다. 이 출애굽의 그림 안에서 그의 모든 삶이 이야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도 십자가도 부활도 승천도 출애굽 안에서 이야기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진의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인 만큼 모든 내용을 뒤로 미루지 않고 요약을 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출애굽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하늘에서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면, 악은 심판당합니다. 그리고 언약 백성들은 구출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것은 인자 이야기와도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짐승이 심판 당하고, 인자가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옛적부터 계신 이로부터 이양받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출애굽과 인자 이야기는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을 구출하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기름 부음받은 자를 통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을 줄여서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악의 심판을 이방제국에 대한 짓밟음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언약백성의 구원을 당연히 유대민족들만의 구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이 유대인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될 건물 성전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토라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다시 자신들이 언약 백성의 지위를 되찾고, 약속의 땅을 수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갑자기 그림이 작아졌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D양의 오해는 사실 유대인들이 가진 오해와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만의 하나님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의 역사를 왜곡한 것입니다. 시작된 역사, 뒤틀린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왜 부름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온 세계에 만연된 타락을 뒤집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 유대인의 왕은 유대인들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대신하고, 그 이스라엘에게 부여된 사명을 성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는 유대인의 메시아이자 온 세계의 메시아입니다. 더불어 메시아는 유대인입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자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아브라함이었고, 그 아브라함의 후손인 메시아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그 유대인은 유대인들만의 유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일 수 없듯 말입니다. 따라서, ‘왜 메시아가 유대인의 왕이에요’라는 질문은 사실 뒤집어야 말이 됩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니면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민족을 괴롭히고 있는 로마가 악의 정체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악.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서야 역사의 뒤틀림은 여전할 것입니다. 그 악을 처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6. 뒤집힌 역사: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



  이제 핵심은, ‘그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입니다. 즉, 다른 말로 표현하면, ‘메시아는 이 악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하는 물음입니다. 이 악이 처리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다스림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짐승을 그대로 두고 인자가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파라오를 치지 않고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악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고서, 인간이 구원받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대상을 잘못 선정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악랄했지만 그럼에도 로마제국이 없어진들 역사의 뒤틀림은 그대로일 뿐입니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투쟁은 그대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아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온 몸에 매질을 당합니다. 발가벗겨진채 골고다 언덕을 오릅니다. 어깨에는 십자가가 짊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무력하게, 마치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이것이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의 방법이었습니다. 무수한 질투와 미움과 거짓과 살인의지가, 그리고 민족적인 죄악과 제국적인 부조리가 모두 골고다 언덕으로 모여서 한 사람에게 총공세를 부었습니다. 그러나 악은 한 사람 앞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악이 사용할 수 있는 최종병기인 죽음조차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이스라엘과 로마가 한 사람을 살해한 현장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 예수 안에서 악이 살해당한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저주를 뒤짚어 썼으나 어느 누구도 저주하지 않은 한 사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네 마리 짐승은 심판당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노예로 붙잡아 두었던 파라오는 머리가 깨졌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예수를 심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악을 심판하신 현장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의 고난으로 출범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고난으로 이뤄졌다는 사실 말입니다. 악은 이 고난 속에서 질식해 죽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7. 끼어든 역사 : 하나님 나라와 부활



  만약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무참히 죽임당하시고, 만약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모든 내용들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예수의 고난으로 출범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인정은 이미 예수께서 예고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즉, 예수는 하나님께서 인정한 메시아인것입니다. 그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입니까? 어두움의 악한 권세를 심판한 어린양입니다. 어두움의 악한 권세에 놓여있던 모든 이들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왕입니다.


  게다가 이 부활은 예수의 출애굽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러나 인류가 겪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관통하는 차원입니다. 다시 우리 이야기의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봅시다. 우리는 '뒤틀린 역사'에서 생존에 얽매여 있는 인간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인간을 생존에 얽매이게 하는 주범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로마를 악의 주범으로 보았으나, 사실 예수의 눈은 로마를 향해있지 않았습니다. 악의 본류, 인간을 뒤틀리게 하는 생존이라는 삶의 목적. 이것을 돌려놓기 위해서는 더 거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살고자 하나 결국 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모두 죽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죽음은 예수마저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죽음을 깨뜨리고 반대편으로 나오셨습니다. 그것도 완전한, 새로운 몸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부활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를 가리켜 ‘영생’이라 부릅니다. 즉, 부활로 이 낡은 시대에 새로운 시대가 끼어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는 생존에 저당잡히지 않은, 완전한 있음이 몸으로 구현됩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창조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 죽음의 노예로 전락시킨 모든 것이 다시 창조됩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인정하신 사건이자, 새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무도 예견하지 않을 때, 예수를 추종하던 여자들조차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부으러 나갔던 일요일 새벽에 낡은 역사 사이로 끼어든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메시아는 죽음을 깨뜨리고 새롭게 창조되는 인류의 시작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대인의 (역사가 기록한 온 인류의) 왕'이십니다. 예수는 인해 낡은 시대 속에서 죽음을 정복하고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재꼈고, 이제 메시아의 희생을 통한 구원에 이어, 새로운 백성들의 악으로 부터의 탈출이 시작됩니다.


8. 새롭게 시작된 역사 : 하나님 나라와 승천



  예수의 출애굽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 빠뜨린 것이 있습니다. 인자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짐승들이 심판당한 이후, 인자가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승계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 역시 예수로 인해 역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니엘서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가 그 앞에 인도 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분의 승천은 마치 부활과 함께 딸려오는 원플러스원 행사가 아닙니다. 혹은 우리가 죽어서 갈 장소로 예수께서 먼저 가신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승천이 의미하는 바는, 인자가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목적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승계받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처음 배웠던 하늘과 땅의 개념이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예수께서 가신 곳은 하늘입니다. 이 하늘은 하나님의 차원입니다. 그 하나님의 차원으로 들어가신 예수께서 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다스림입니다. 톰라이트의 말처럼, 하늘은 땅을 다스리는 관제탑입니다. 하나님의 차원으로 들어가신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이 땅을 다스리십니다. 바로 이 예수로 인해, 땅이 다시 하늘의 다스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통치하십니다. 바로 고난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출범시키신 예수, 죽음으로 새 창조의 시대를 여신 예수이십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방법으로 악을 심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출범시키셨습니다. 그 악의 심판은 인간을 저당잡고 있는 가장 끔찍함, 죽음 마저도 이겨냈습니다. 마치 반죽이 부풀듯, 하나님 나라와 새시대는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 분은 온 열방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 분이 승천하심은,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이 땅을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1) 새로운 사명과 생활방식


  이것을 출애굽 사건으로 이야기해본다면, 이제 우리는 바로 그 예수의 고난으로 인해, 악으로부터 탈출한 출애굽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이 위대한 탈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생존이 아닌 다른 사명과 새로운 생활방식을 부여받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 바로 그것입니다. 타락의 반전. 열방의 빛.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보고, 십자가와 부활의 위대한 소식을 전달받아야 합니다. 생존에 얽매인 삶이 아니라, 예수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새로운 시대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 있는 거짓된 권위와 악에 대해서 우리는 맞서야 합니다. 물론 이 일에 고난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필수 공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통해서 사람과 하나님을 연결해야 합니다.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그 분은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이 충격적 용서를 사람들에게 선언해야 합니다. 즉, 이것은 메시아 사역입니다. 이 메시아 사역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의 중심에 성전이 있습니다. 이 성전은 건물 성전이 아니라, 예수이십니다. 새로운 몸을 입으신 예수입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부활의 성전과 연결되어 갑니다. 마치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모여살듯,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는 사람들이 연결됩니다. 그렇게 그들도 이 땅의 작은 성전들이 됩니다. 그들을 통해서 치유와 진리와 용서가 선언됩니다.


2) 약속된 유업의 땅 :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바로 이들에게 약속의 땅이 다시 주어집니다. 그 땅은 가나안입니다. 그러나 가나안만이 아닙니다. 가나안을 포함한 창조세계 전체가 이들의 약속의 땅이자 삶의 터전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너무 작은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출애굽을 통해서 얻는 것은 가나안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구 전체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옛 시대가 끝나면, 마침내 그 날, 성서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날' 이라고 말하는 그 날에, 하늘은 땅과 만납니다. 이것이 성서가 보여주는 최종적인 비전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이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즉, 이 땅에서 악이 일소되고, 언약 백성이 구출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일이 최종적으로 벌어집니다. 유대인의 왕이 다시 나타나심과 함께 이 일을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날에, 언약 백성은 모두 예수를 따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죽었던 이들은 새로운 몸을 얻을 것이고, 살아서 예수를 맞이한 이들은 홀연히 몸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만난 새로운 세계를 그들이 영원히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와 함께 말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하나님-인간-세계’의 아름다운 역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 전체 이야기에 대한 서투른 요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마지막 질문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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