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끼어든 역사
-부활절 이야기
0. 지난 이야기
1. 끼어든 역사 : 부활절 이야기
2. 부활의 의미
1) 이스라엘 이야기 안에서 : 예수는 메시아시다.
2) 로마 안에서 : 예수가 주님이시다.
3) 결론 : 예수는 성전이시다.
3. 새롭게 된 성전 (수정중) + 곤충채집 예화 추가
4. 또 한 명의 부활 경험자, 바울
1) 예수를 만난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2) 지금은 언제인가?
0. 지난 이야기
우리는 지난 주, '예수가 왜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셨는가?' 에 대해서 함께 살펴봤습니다. 흔히들,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가 이유로 제시되지만, 이것은 신앙의 고백이지 역사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역사와 상관없는 고백은 아무런 역동성을 갖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관련된 '역사'를 우리는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봤습니다. 먼저는 유대인들의 관점, 그리고 로마인들의 관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관점.
십자가는 역설의 향연이었습니다. 혁명의 혐의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우는 혁명가들, 죄없는 사람을 죽여야 유지했던 로마의 평화. 그 가운데 왕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을 입은 십자가의 예수. 그 예수의 머리위에 달린 십자가 명패. '유대인의 왕'.
우리는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끔찍히도 뒤틀린 역사를 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끊어졌고, 그 결과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죽게된 인간은, [생존]이 제일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성을 짓고,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타인을 감시하고자 망대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urbs의 전통은 오늘날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시와 도시가, 또한 그 도시 안에서의 개인과 개인은, 생존을 목적으로, 물질을 붙잡은 채, 자신의 이름이 사라질까 초조해하는 존재들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극심한 뒤틀림으로 신음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고통중에 소리침을 들으시고,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신 출애굽의 하나님과 같이, 한 사람이 그 뒤틀림의 한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는 광야에서부터 자신의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넘치는 생명력으로 생존의 문제가 그에게 더이상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생존과 물질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부터 이 땅으로 돌입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그의 삶 내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틀림의 한 가운데로 자기 몸을 던졌고, 악은 그에게 모든 공격을 쏟아붓고 그럼에도 그 예수 안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고난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출범했습니다. 하늘의 다스림을,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이 땅에 가져오신 예수. 자신의 생존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죽임당하는 이 충격적인 방법을 통해, 그의 이름은 온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름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고 이 예수에 대해 이미 역사는 준비하여, 그를 부를 이름을 마련해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 시작되었으나, 뒤틀렸던 역사, 그러나 구출되고 기억된 역사. 그리고 나타난 역사의 주인. 그 역사의 주인은 기억을 새롭게 했고, 구출을 완성했으며, 뒤틀림을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역사는 새롭게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사건 직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누가봐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운동은 로마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였으니까요. 죽임당한 정의로운 소방수에 대해서 눈물 흘리고, 안타까워할 수는 있어도, 그 소방수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십자가와 함께 로마의 강력함도 떠올랐고, 제자들은 그 몸서리치는 강력함 앞에, 예수와 함께 했던 이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를 부인하고, 어떤 이는 다시 생존을 위해 그물을 붙잡고, 그렇게 고개를 떨군채, 예수와 함께 했던 그 가슴벅찬 사건들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부서져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일이 지났습니다.
이 예수의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은 십자가 이후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3일후 입니다.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래서 기대할 수도 없었던 역사가 갑자기 끼어듭니다.
1. 끼어든 역사 : 부활절 이야기
누가복음의 기록을 통해서, 그 끼어든 역사의 현장으로 함께 가봅시다.
(눅 24:1~53)
한 주가 시작되는 첫날 이른 아침에,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나간 것을 보았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시신이 없었다.
한 주가 시작되는 첫날 이른 아침입니다. 이 날이 어떤 날인지 생각해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날은 유월절 전 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유월절에 돌아가셨습니다. 유월절은 금요일일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하루 시작은 해가 질 때부터 계산하기 때문에. 그렇게 유월절을 포함해서 셋째날. 즉, 한 주가 시작되는 일요일입니다. 그 날 새벽에 여자들은 향료를 가지고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왜 여자들은 향료를 가져갈까요? 우리는 유대인들의 장례문화에 대해서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세마포에 싸다가 동굴 무덤에 넣어둡니다. 대개 하나의 동굴에 여러 시신이 놓이게 됩니다.(예수의 경우, 아리마대 요셉이 샀던 새 무덤이 들어가신 특이한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무덤에는 다른 시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정도 시신을 동굴 무덤에서 썩게 합니다. 이 때 악취가 심하게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향료를 시체에 주기적으로 부어주게 됩니다.(예수님에게 향유옥합을 깼던 여인의 향유도 이러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체가 다 썪고 뼈만 남았을 때, 그 뼈들을 추려서 유골함에 보관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장례 풍습이었습니다. 즉, 여자들은 예수의 시신에 향료를 부으러 가는 것이고, 이것은 그들이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가 일시적인 의식 불명에 빠졌다가, 무덤에서 깨어났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의 곁에서 누구보다 예수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는 정말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시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섰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당황하는 그들 앞에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 말합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 그동안 우리가 연구해왔던 어휘들을 사용하여 전하기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
우리가 배웠던 인자가 바로 이 인자입니다. 인자 이야기의 인자. 우리는 다니엘서 7장을 통해 인자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야기 안에서 네 마리 짐승들은 심판 받고, 옛적부터 계신 이는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인자에게 이양합니다. 그런데 그 인자가 죽임당했습니다. 짐승들을 파멸시켜야할 인자가 오히려 짐승에게 죽임당한 어처구니 없는 상황. 예수를 인자라 믿던 사람들의 실망은 이루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자 본인은, 자신이 죽임당하고 살아날 것이라, 아니,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야 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야 하고, 사흘째에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자는 이것이 반드시 일어나야하는 일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왜 '반드시' 그러셨어야 했는지는 뒤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어쨌든,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이다. 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시신을 감았던 세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여자들은 이 말을 기억했습니다. 이것은 인자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들이 기억하지 못할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비롯,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습니다. 이 본문도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충격적인 본문이 아닐수 없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재판의 증인으로 인정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이 충격적인 사건이, 여자들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부활이라는 엄청난 소식을 듣는 사도들의 반응은,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의 위신을 온통 깎아먹는 진술들 뿐입니다. 그들은 심드렁했고, 어처구니 없는 말로 들었으며, 심지어 믿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말처럼, 복음서가 초대교회의 운영을 위해 거짓으로 날조된 것이라면, 부활의 첫 증인은 여자로 배치하는 신빙성 떨어지는 작법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인 사도들의 이 무기력한 모습을 기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나마 베드로만이 달려갑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만이 그 부활을 확인하고자 빈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 안에는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만이 놓여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시신을 누군가 훔쳐갔다면, 부패가 시작된 시신을 감싸고 있던 천을 다 풀어놓고 훔쳐갈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에 그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이제 복음서는 베드로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사람에게 카메라를 옮깁니다. 그들은 그 날에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서로 대화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 중에 누군가 그들과 함께 걷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부활하신 메시아는 이렇게 등장합니다. 저는 이러한 등장이 너무 매력적이고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하게, 어마어마하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깨뜨리고, 세마포를 걷어내시고, 빈 무덤을 나오신 그 분은 일상의 장면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는 물으십니다.
"당신들 무슨 이야기 하세요?"
아, 유쾌하십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 분의 위트. 그 분의 장난끼. 죽음을 깨뜨리고 일어나신 분이 심각하게 나타나실 것이라는 저의 예상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분은 너무도 친근하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이스라엘이 이 부활사건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증인들의 증언 : 출애굽이 이루어졌다!
1) 이스라엘 이야기 안에서 : 예수는 메시아시다.
이스라엘 이야기 안에서 부활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그들의 발언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예수는,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 예언자가 말했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출애굽입니다.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가 말했던 것은, 바로 새로운 출애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를 왜곡된 출애굽의 그림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 대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 예수를 로마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로마는 자신들이 말하는 거짓 평화 때문에 그 죄없는 예수를 죽였습니다. 이것으로 진리를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악함이 드러났고, 그 악함은 악을 선으로 갚는 예수 안에서 소멸되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조차, 이 장면을 보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았던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야 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자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이야기가 품고 있었던 위대한 출애굽의 소망은, 그 인자가 죽음으로서 막을 내렸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이 말했던 '그분에게 걸고 있던 소망'은 그저 개인적인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에 대한 소망. 악이 심판받고 이스라엘이 신원되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소망이었습니다. 그 소망의 실패. 이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들은 이사야서의 오랜 바람이 꺽인 것에 대한 좌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빈무덤과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여자들의 말은, 그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돌려놓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혀 생각할수도, 기대할수도 없는 것이었고, 그러한 소식을 전하는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것은 끼어든 역사. 성서를 제외한 고대 문헌 어디에서도 이 죽음을 깨뜨린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텍스트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일어났습니다. 역사상 단 한 번. 역사를 뒤집는 단 한번의 사건이 예수에게서 벌어졌습니다. 하늘의 다스림은 이 땅에 쏟아졌고, 그 쏟아짐은 죽음을 깨뜨리고 일어나 이 땅을 걷는 한 사람의 부활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 부활의 주인공이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너무 둔하구여!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너무 더디게 믿소! 아직도 깨닫지 못해겠소?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오. 메시아가 고난을 겪고서야 그의 영광에 들어가오."
빈무덤에 있었던 눈부신 옷을 입고 있었던 사람 둘이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
즉, 인자의 고난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자가 폭력적인 악을 처리하는 방식은 더 큰 폭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고난을 통해 이 땅으로 돌입할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즉, 반대로 말하면 고난을 받는 자가 참 인자요, 메시아라는 사실입니다. 부활한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주신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메시아가 고난을 겪고서야 그의 영광에 들어간다." 우리는 이것을, 지난 편지에서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고난을 통해 왕이 되신 어린양. 그 왕의 통치는 고난을 통해서 왔습니다. 이것이 인자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예수께서는 성서 전체 이야기를 그들에게 설명해주십니다. 어떤 내용을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진짜 왕인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진짜 왕은 사람들을 멋대로 다스리고 힘으로 군림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왕을 기대했으나, 그러한 왕은 메시아로 오지 않았고, 메시아로 왔을지언정 또다시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이 일을 반복해왔습니다. 성서는 말해줍니다. 고난 받는 왕이 진짜 왕입니다. 진짜 인자요, 메시아 입니다. 우리가 배웠던 말들을 사용하자면, 죽임당하는 그 어린 양을 통해서 새로운 출애굽이 이뤄질 것이고, 죽임 당하는 인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질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성서 전체 이야기를 통해 다시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이것을 듣던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때야 비로소 그들은 알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추억이 그들의 머리속에 지나갑니다. 자신의 살을 먹어야 한다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말씀하셨던 예수.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을 찢으셨던 예수. 지금 그들에게 성서의 진리를 떼어주신 바로 그 분이 다시 사신 십자가의 왕, 예수이십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임당한 어린양을 살리셨습니다. 인자는 짐승에게 죽임당했으나, 하나님은 이 짐승에게 인자가 죽임당한 바로 그 사건으로 짐승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살리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상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깨뜨린 전대미문의 사건은, 뒤틀림의 근원이었던 죽음을 박살냅니다. 죽음이 패배했기에 인간은 생존의 문제에 더이상 포로가 아닙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즉, 고난받아 죽임당한 왕의 부활은 그 고난받아 죽임당한 왕이 진짜 왕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활, 그것은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인정이었습니다.
2) 로마 안에서 : 예수가 주님이시다.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은 길을 돌려 제자들이 모여있던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먼저 그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고, 그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했던 베드로에게까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주 제자 역시, 예수께서 빵을 떼실 때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던 일들을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평화. 평화는 바로 카이사르의 대명사였습니다. 사람들이 카이사르를 추종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 평화였습니다. 카이사르 한 사람에게 모든 전권이 위임되면 마침내 세상은 평화로워 질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카이사르가 가져온다는 평화에 대해서 믿고 있었고, 그 카이사르를 가리켜 이렇게 호칭했습니다. "주". 희랍어로 퀴리오스를 쓰는 이 단어는 주권자, 주재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주'라 부르며, 평화를 가져올 카이사르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주'라 불리었던 카이사르가 진정한 평화를 가져왔습니까? 아닙니다.이 거짓 평화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죽고 죽이는 전장으로 자신의 인생을 던져야 했습니다. 카이사르 자신 역시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부르투스에게 찔려 암살당했습니다. 게다가 이 거짓 평화는 아무런 죄도 없는 한 사람을 무참히 살해해야 얻을 수 있는 그런 평화였습니다. 그것은 실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고난을 받고 죽임당한,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께서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로 인해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사,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어주는, 이 선한 목자만이 평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생존의 문제에 저당잡힌 인간은 결코 평화를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이용해야 하는데, 어찌 그와 화평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을 깨뜨리시고,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수가 흘러 넘치는 한 분은 평화를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 평화만이 참된 평화.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카이사르를 주라 부르던 세상의 한 복판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
3) 결론 : 예수는 성전이시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다.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를 보고, 모두들 혼비백산하여 자신들이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지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흔히들, 예수의 부활이 영으로 부활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찌히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예수는 몸이 있으셨습니다. 분명합니다. 그 분은 살과 뼈가 있으셨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때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은, 분명 몸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의 연결입니다. 이것은 본래 성전의 기능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고, 그 안에서 치유와, 하나님의 용서의 선언과, 하늘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혁명가들의 작당모의 하는 장소가 된지 오래고, 그 성전을 통해서 가난하고 병든이들은 치유되기는 커녕 소외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가 계십니다. 그 분은 몸을 입고 부활하신 예수입니다. 그 몸은 우리의 몸과 같이 상처나거나 늙고 나중에는 썩는 그런 육체가 아닙니다. 그 분의 몸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특별함을 발견하지 못할만큼, 구운 생선을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몸처럼 보이지만, 갑자기 사라질 수 있고, 상처입거나 죽지 않는 육체입니다. 이것은 예전에 잠시 소생했던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몸을 입고 이 땅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를 통해 하늘과 땅이 다시 연결됩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성전이십니다. 이 땅에 부활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건물 성전이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중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가, 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가 성전이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무너뜨리고 삼일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자신의 이 새로운 몸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몸을 가지고 계신 예수를 통해 우리는 치유와 용서와 진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떠나셨다. 그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넓게 봅시다. 시작된 역사. 그 시작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땅이 인간에 의해서 뒤틀렸습니다. 악이 발생했고, 인간은 이 악을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하는 것이라곤 바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악에 대한 처리를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이었습니다. 그 아브라함 언약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이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즉, 달리 말하면, 단절된 하늘과 땅이 다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다스림이 이 땅 가운데, 물이 바다 덮음 같이 가득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다스림을 거절한 인간 사이에 예수께서 오셨고, 그 분이 고난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진정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제 그 예수로 인해 하늘의 다스림이 이 땅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즉,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됩니다. 이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목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이 소식을 전하는 증인들로 보냄을 받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는, 특권 계층만, 혹은 특정 민족만 누릴 수 있는 성전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기뻐하는 집'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사도들이 보냄을 받을 것이고, 이 전대미문의 사건이 모든 민족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사도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령을 기다립니다.
3. 또 한 명의 목격자
그리고 또 한 명의 사도가 있었습니다. 얼마전 '사도'가 무슨 뜻이냐고 질문을 받았는데, 사도는 다름 아닌 예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가 사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이전에는 예수를 핍박하는 자였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사도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사도라는 사실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 사람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말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유령이나 환상이었다면, 이 사람은 사도라 불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께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도가 분명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바울입니다.
1) 예수를 만난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도행전 9:1~6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바울.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러 다녔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 때문에, 무수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 공회에 끌려가 돌을 맞았습니다. 그 중에는 스데반이라는 집사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바울이 신고해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을 때, 바울은 그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이 사람,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을까요?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만을 골라서 미워하는 싸이코패스라서?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면, 이 사람에게 뭔가 이익이 떨어져서? 태생부터가 잔혹한 악당이라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울이라는 사람에 대한 굉장한 오해입니다. 바울은 굉장히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유대교를 충실하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믿는 이스라엘 민족 종교입니다. 이들은 구약성경, 그 중에서도 토라를 믿습니다. 토라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권을 가리켜 토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토라에 충실히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 토라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돌로 쳐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토라에 보면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신 21: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토라를 믿는 그에게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 생각해봅시다. 토라를 믿는 바울이,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 예수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입니다. 그럼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즉, 바울이 볼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토라가 말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 예수를 추종하는 사이비 종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에 대한 열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이 사이비 종교의 뿌리를 뽑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했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토록 뿌리 뽑으려 했던 예수. '그 예수를 따라 고난으로 악을 해결하는 길'을 자기 자신도 걷습니다. 왜 였을까요?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들었던 말은 몇마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를 만났던 사건은 바울에게 분명 어떠한 이해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가지고 있던 부활에 대한 이해입니다.
(요 11:17~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더라.
이제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십오 스타디온쯤 떨어진 가까운 곳이므로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와서 그들의 오라비의 일로 위로하더니
그때에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서 그분을 맞이하되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았더라.
그때에 마르다가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시든지 하나님께서 주실 줄 내가 아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일어나리라.
마르다가 그분께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할 때에는 그가 다시 일어날 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오늘 우리의 말씀 이해를 도와줄 사람, 마르다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미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예수께서 그 나사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죠.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라도 예수께서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시던지, 하나님께서 주실 줄을 제가 압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일어나리라." 이제 그 다음 마르다의 말이 중요합니다. 무어라 말합니까? 마지막 날 부활할 때에 그가 다시 일어날 줄을 제가 압니다!" 마르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할 때에는 나사로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일어난다는 것은,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다시 걷는 것입니다. 교육수준이 높지 않았던 마르다를 포함,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사람들은 마지막 날 다시 부활하여, 즉 몸이 다시 살 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증명됩니다. 이사야서 26장 때문입니다.
(사 26:19~21)
주의 죽은 자들(의로운 유대인들)은 살겠고 그들이 나의 죽은 몸과 함께 일어나리이다.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할지어다. 주의 이슬은 풀잎의 이슬 같사오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올지어다. 너는 네 방들로 들어가 네 문들을 닫고 격노가 지나가기까지 잠시 숨을지어다. 이는, 보라, 주께서 자신의 처소에서 나오사(역사에 개입하심) 땅의 거주민들의 불법으로 인하여 그들을 벌하실 것임이니 땅이 자기의 피를 드러내고 자기의 죽임 당한 자들을 다시 덮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주의 죽은 자들이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의로운 사람들은 흙속에서 일어나, 몸을 가지고 다시 말그대로 사는 것. 이것이 부활의 의미인 것입니다. 당시 마르다를 포함한 유대인들과,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부활의 의미도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의로운 자가 몸을 가지고 일어나는 것. 그리고 그 날은 마르다가 말한대로 '마지막 날'입니다.
2) 예수는 누구이며, 지금은 언제인가?
당시 여자들은 교육수준이 낮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르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바울은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당연히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 생각해봅시다. 마지막 날 의로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리고 바울운 부활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합니다.
(1) 예수는 누구신가?
바울은 예수가 옳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옳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바울은 사도들에게 인계되어 그들에게 복음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을 전달 받게 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 15:1~8)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드린 말씀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2) 지금은 언제인가?
오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을 때, 그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지치지 않고 달려가는 트랙이기도 했습니다. 동일한 질문을 여려분에게도 묻습니다. 지금은 언제입니까?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