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2일(211214)

from 치부책 2021. 12. 14. 01:49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때, 저 말이 의미하는 삶과 실천은 어떤 것일까? 이야기와의 조우 없이는 믿음도 없기에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나는 그간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이야기의 부재'라 말해왔지만, 사실 '부재'라는 말은 과하다. 그래,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이야기의 일부와의 조우. 그 이야기의 일부란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잘 되게 해 줄 신의 존재가 역사의 지평 위에서 드러났다'는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는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모자르고, 심각하게 뒤틀려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주지만, 그의 사랑은 나의 신체를 쾌의 상태로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며, 

  나를 잘 되게 해줄 것이지만, 그 잘됨이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로서 부활과 창조세계의 좋음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지평 위에 드러난 절대자는 바로 이러한 형상으로 드러났다. 고난과 예수를 누구도 분리시킬 수 없을 것이만, 이상하게도 교회에서의 경험은 고난의 예수와 우리의 일상의 균열을 가져왔다. 그리고 역경없이는 얻을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의 이름으로, 역경 없는 삶을 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경험으로 예수를 알게 된 이는, 쉽게 혼동하다가 확신 없는 자기 자신에게서 확신을 찾고자 한다. 그 자리에는 통합된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의 파편만이 제멋대로 나뒹굴 뿐이다.

 

  세상에 뚝딱 나온 것은 없다. 심지어 이 이야기의 뒤틀림/파편화 마저도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생각과 삶을 통해 주조된 것이다. 이 뒤틀림의 과정을 자끄 엘륄이 스케치했고, 체스터튼이 비꼬았다. 그들의 글은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데, 그것은 많은 것이 변했지만, 문제 하나만큼은 변함없이 여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해결을 기대하지 않고 문제를 그저 문제로서 바라보는 것은 비관주의에 진지 않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말해왔으면서도, 지금은 나 역시 쓰디쓴 입맛으로, 그저 문제 앞에 눈을 감고 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신학을 비판했다. '학문'이라는 영역에 종속되어, 학자들의 단어 놀음이 되어버린,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과 무관해져버린 신학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고, 같은 비판을 데이비드 웰스도 했던 바 있다. 저들의 비판이 정당하다면, 오늘날 신학을 하겠다는 건, 신학 자체를 뜯어고치겠다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학문이라는 영역에 발을 담그기 전에 그 학문이라는 영역의 테두리부터 조망해야 하며, 학자들의 단어들을 자의적으로 흡수하기 전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방법론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너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삶을 능숙하게 헤쳐 나갈 수 없는 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절망을 조금이라도 막아내기 위한 손 하나가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한 손으로 그는 잔해 속에서 본 것을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의 1921년 10월 19일자 <일기> 

 

  나는 내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지금도 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바쁘게 몸을 놀려야만 한다. 이것이 재난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재난 속에서 이 교회와 신학의 파국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교회와 신학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놓여있고, 나는 이 둘을 연결하고 싶지만, 내 팔은 짧기만 하다. 소위 신명기 역사서라 불리는 텍스트를 연구했던 많은 학자들을 다루며 토마스 뢰머는, 

 

-요시아 왕 시대에 왕실 자료를 만들기 위해 처음으로 두루마리들을 편집한 서기관 집단이 있었다

-바벨론 포로와 페르시아 시대 초기에 아마도 바벨론에서 이 두루마리들이 개정 추가 되었다

 

  는 짧은 결론을 내놓았고 이것 외에 "대안적 모델이 없다"는 절망적인 결론 또한 함께 내놓았다. 대체 학자들이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야훼의 발화가 있었고, 그 말된 내용이 반드시 사건이 된다는 성경 내러티브의 기본적인 전제이자 약속으로 구성된 우리 삶의 토대를 부정하고서(이것이 종말론이다), 그 부실한 토대(이 토대를 "학문"이라 부른다) 위에 쌓은 공든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계몽주의의 체질에 의해 걸러진 빈약한 '사실'뿐이다. 자신을 학자라 칭하는 이들은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기에 교회에서는 이것을 말하지 않고, 학문이라는 영역 안에서만 저 '사실'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답답하지 않은가? 나는 당신에게 내가 느끼고 있는 답답함을 충분히 피력했다. 그러나 당신은 내 답답함에 공명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당신은 나를 이해하는 척 한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 이건 내 탓이다. 당신이 당신의 어항 안에서만 헤엄치겠다고 당당하게 말한 것은, 당신에게 그 어항보다 더 넓은 바다가 있음을 제시하지 못했던 나의 책임이다. 당신을 채근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어야 했다. 그게 오히려 당신을 움직일 수 있었을지도 몰라.

 

  성경. 그것은 파국 속에서의 기록이다. 파국이 이미 벌어졌기 때문에 비로소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들에 관한 기록. 인간이 쌓아놓은 것들이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드러난 본래부터 있었던 것들에 관한 기록이다.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던 삶의 터전의 파국을 경험한 이집트의 왕자는 자신의 동족을 이끌고 시내산으로 향했다. 거기서 들었던 이야기는 폐허 위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세우려는 야훼의 의지였다. 그리고 신명기. 신명기는 그 모세 이야기의 결말이면서도, 그 결말은 그 야훼의 의지에 맞서는 인간의 불순종을 예고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불순종은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에 이르는 이야기를 통해 증명된다. 아니, 이야기를 통해 증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포로가 되어버린 이드의 존재 자체로 증명되고, 그 불순종의 결과를 증명하는 파국의 사람이, 한 손으로는 자신의 절망을 막으려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들의 존재 자체로 증명된 이야기를 회귀적으로 필사한 것이 DH이다.

 

-우리에게 DH가 필요할까? 그렇다. 절망하는 자의 날카로운 시선만이 우리가 왜 뼛속깊이 문제적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읽는다면 우리는 DH를 누구의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가? 신명기의 저주를 온 몸으로 뒤집어쓰고 있는 포로된 자의 심정으로 읽어야 한다. 그 사람이 요시아나 그와 동시대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요시아를 좋게 보면서도 요시아 한 사람이 어쩔 수 없었던 파국을 겪고 있던 그 후대의 사람의 입장으로.

-우리는 읽으며 무엇을 상상해야 하는가? 성전 폐허 위에서 눈물로 펜대를 움직이는 새로운 천사의 형상.

 

  이미 벌어진 파국 위에서 통합된 이야기. 예언 한 줄 없이 그저 불순종을 증명하는 결론으로. 사사기 후반부나 입다 이야기는 이 통합에 방해가 되기는 커녕, 적절한 예시가 된다. 인간이 어디까지 곤두박질 칠 수 있는가.

 

  야훼는 침묵하지 않았고, 절망 속에 있는 이의 시선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포로들, 그들의 존재 자체로 증명된 불순종, 그들이 적고 편집하는 회귀적, 자전적 이야기로서 신명기 역사서. 포로기의 눈으로 구약을 읽으려는 시도가 합당했던 것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포로들의 시선만이 진실을 보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래. 신학이란 이름의 곱추는 이 파국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이 포로들을 향해 걷고 있었는지도. 스스로가 허리가 뒤틀리고, 그 옷이 조각조각 찢기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서 말이다.

 

 

 

BGM :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사운드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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