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4장의 속죄제는 '언약 - 땅에 대한 책임'의 큰 테두리 안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빠지면 '죄'에 대한 붕뜬 생각에 빠지게 되거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윤리적 적용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1. 시내산 언약에 의해 언약 백성이 되었다(출애굽기 19장).

   2. 그러나 그 중 하나가 정결의 기준에서 의도하지 않고 벗어났거나, 혹은 망각한 상황 전제
     -이때 무의도의 죄는 '언약백성'이라는 지위의 문제와 관련지어 사고해야 한다.
     -제사장은 백성의 모범이고, 백성은 민족들의 모범이기 때문에, 죄는 전체와 관련이 있다.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땅과 기구들을 오염시킨다/오용하게 만든다.

      3. 그런데 그 사람이 죄를 깨닫거나/누군가에 의해 깨닫게 되었고,
        -즉 망각이 기억으로 전환되었다.
        -자아상에 대한 결여를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고, 말과 실천의 신중함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을 것
        -전체를 위해 서로를 깨닫게 해주는 공동체를 지향할 것을 암시

           4. 당사자가 기억된 죄를 고백하면,
            -묻혀있던 죄의 사건을 발화하며 자신을 죽임
            -마음에 죄의 부채를 남겨좋지 않음(깨름직의 소거)
             -가장 깊은 인간 내면의 차원(무의식)에서 죄가 식별되었고,

      5. 정결제를 시행
        -기억에 의해 발화된 말은 공동체적 제도로 표현된다
        -죄를 기억하고 그것에 의한 희생을 경험하는 과정으로 죄가 처리됨

   6. 제사장(공동체의 대표)에 의해 '사함(언약백성이라는 재천명)'을 받는다.
     -'아페시스'는 죄가 마음과 실천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공동체적 선언
     -따라서 그 선언으로 그는 다시 그 땅에 존재해도 되는 사람,

      땅에서 살만한 사람, 즉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재천명됨

7. 이것은 곧 차지할 땅에 대한 언약적 책임을 다시 상기시킨다.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미 그는 일상을 살고 있었으나,
    다만 자신의 죄를 망각하거나, 의도치 않게 언약백성으로서 흠결을 인지하게 된 상황이었음.
  -일상이 아니라 언약백성으로의 복귀, 이것은 존재를 넘어선 삶의 방향을 지시한다.

    시내산 언약에 따라 땅을 깨끗게 하는, 신적 통치를 구현하는,
    세계 대표 시민("제사장 나라")으로서의 책임을 다시  짊어짐(다시 시내산 언약에 충실한 삶)

 

 

*이로써 속죄제는 인간 내면에서 공동체 전체에 이르도록 깨름직을 소거하기 위한 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깨름직의 소거는 언약백성의 지위를 흔들리게 하는 심리적/실천적, 개인적/공동체적 요소들의 소거인 것. 그리고 이러한 소거는 언약백성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짊어지기 위한 수단이지 결말이 아니다(성화없는 칭의는 없듯, 삶의 방향 없는 정결도 없음).

 

**토라는 '이러한 제도의 유익을 이스라엘이 누렸는가? 그들에게 열려있던 언약 충실의 삶에 이스라엘은 충실했는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이어지는 내러티브를 따라가게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토라의 독자도 현실에 대한 적용은 참아도 괜찮음(시도하려고 해봐야 무리한 시도가 될 것이고, 오히려 고대의 세계에 더 흠뻑 젖는 쪽으로 가는 것이 좋다). 

 

***피로의 정결을 물로의 씻음으로 가시화한 세례와의 관련성을 생각해 볼 것('아페시스'의 용례와 정결제)

 

****예수의 십자가 용서를 속죄제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고의로 저지른 죄는 십자가 용서에서 빠져야 한다. 언약백성으로 삼기 위한 정결로서 십자가 죽음이지, 온갖 죄를 용서해주는 면죄부로서 십자가가 아님(밀양에서의 죄는 당사자에 대한 용서 구함과 배상이 필요한 문제였다). 히브리서 10:26에서의 고범죄의 강조는 십자가를 속죄제로 이해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나온 말이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