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쉬운 일이겠어요?

 

1. 갈라디아서 배경 : 사랑말고 다른 걸...

 

  저는 요새 갈라디아서를 읽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갈라디아서를 영화로 만든다면, 그 도입부는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을 깔아야 할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는 초대 교회에 발생한 최악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위기란, 갈라디아 교회를 속이는 거짓 선생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지?

사도들도 유대인이지?

그럼 예수님과 사도를 따른다는 건, 우리도 유대인처럼 사는 거겠지?

그러니까 우리도 할례를 받고 율법에 따라 살아야 해"

 

  그럴듯 하지요? 이방인들이 모인 갈라디아 교회들은 이 주장에 홀딱 넘어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처럼 사는 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누구처럼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머리를 기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고,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특정 문화를 우월하게 생각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일본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지 않아요. 미국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예수처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특정 문화, 특정 생활방식을 뛰어 넘는 바로 그 사랑 때문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갈리디아 교회들이 사랑을 버리고, 유대인들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고집하게 되었으니, 바울이 어찌 속이 안타겠습니까?

 

  이 사랑 말고 다른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면 다 거짓말입니다. 뭐 예언이 어쨌느냐고, 뭐 계시가 어쨌느냐고, 뭐 요한계시록이 어쨌느냐고. 사랑 없이는 다 거지 발싸개 같은 소리지요! 예언이 성취된 것이 사랑의 예수님이고, 마침내 드러난 계시가 사랑의 예수님이고, 요한계시록은 예수님께 충성하여 죽도록 사랑하는 얘기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들은 이 사랑에서 금세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생활방식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를 따라 하는 건 쉬워요. 남이 사는 것처럼 흉내 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사랑하려고 고민하고 애쓰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고 협착하지만 분명한 길을 주셨거늘, 사람들은 그 길이 힘드니까 손쉬운 다른 길을, 내가 창조적으로 사랑하는 길이 아닌 남을 흉내 내는 길을 찾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사랑이 뭔데?

 

  그럼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질문을 물어야 합니다. 사랑! 그게 뭔데요? 사랑 하나 붙잡으면 된다는데, 그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갈라디아 교회가 겪고 있던 문제가 우리에게 해결되었을까요?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십자가부터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저기 다니며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나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요"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오도록 교육을 받았습니다. 물론 틀린 답변은 아닙니다만, 이런 답변은 풀이과정을 쏙 빼고 답만 얘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고백을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저 고백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가 핵심입니다.

 

  사랑을 고민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라신 것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 생각을 우린 해봐야 합니다. 내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로 누군가 뛰어들어서 나를 밀어내 나가도록 구해주고, 그 사람은 우물 속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 사람에게 정말 눈물을 펑펑 쏟아도 모자를만큼 고마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집에 불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구해주겠다며 우물에 뛰어든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갈라디아서로 돌아갑시다. 그러니까 이것이지요. "예수의 죽음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여기가 출발점이고,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서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예수였습니다.(갈라디아서 1:4, 3:1)

 

갈라디아서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십자가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바울의 문장을 하나한 꼼꼼히 읽어봅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으셨습니다. 유대인은 그리스도는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은 슈퍼맨이었어요. 로마에 짓밟혀있는 유대나라를 건져줄 강력한 왕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으셔야 했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뜻대로 모든 유대인들의 희망이 죽었습니다. 그분이 죽임 당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하지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손해를 감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용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당연한 세상 속에서 눈을 빼주고, 이를 빼주는 삶이 바로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삶이고, 이러한 삶이 결정적으롣 드러난 사건이 십자가의 살인사건이었습니다.

 

  모든 문화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법령이 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원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전에 없던 삶입니다. 이 삶이 마침내 이 땅에 계시된 것입니다.(C.S.루이스 <인간폐지>) 다들 이렇게 살면 개죽음이고, 이렇게 살면 손해보고, 이렇게 살면 패배자라고 얘기하는 와중에, 사람들의 희망이었던 그리스도가 그렇게 죽임 당했고, 그렇게 손해 봤고, 그렇게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발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신 죽음이었고, 또 예수 자신께서 예고하셨던 삶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서 절대 손해 보려고 하지 않고, 당하면 갚아주고, 죽지 않으려고 사는 사람들 틈에서 그저 사랑 때문에 죽임당한 한 사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백부장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진실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가복음 15:39)

 

  그리고 바울의 편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였습니다. 이 “건지신다”는 말은 우리가 죽을 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으니, 그분을 믿는 나는 죽어서 천국 간다' 이게 믿음의 전부라면, 그 사람이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구원파가 됩니다. 남들과 똑같이 살아도, 그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용서받고 하나님께 칭찬받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편법입니다. 부정입학입니다. 구원파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하는데, 은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이 은혜이고,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였으나, 그 원수에 대한 거저 주시는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예수의 손해봄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었다. 십자가의 고백은 이것 아닙니까? 그 건지심은,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건져서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놓으십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때문에 내가 죄 용서 받았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자진해서 손해 보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는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 비유의 핵심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자진해서 손해를 보면 그 사람을 친구로 얻을 수 있어. 친구를 얻기 위해 손해 보는 사람에게는 은혜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 사람이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자신의 사람에 은혜가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에겐 은혜가 없는 게 아니라 결코 바뀌지 않겠다는 '완고한 고집'이 있을 뿐입니다. 그 고집은 십자가에 매달리고 싶지 않은 고집입니다. 내가 손해보고, 당하고, 죽지 않겠다는 고집입니다. 악한 세대는 그런 고집을 부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로 건짐 받은 새로운 세대에게 그러한 고집은 우리 자신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손해보고, 당하고, 죽임 당했던 예수 때문에 악한 세대로부터 건짐을 받아 새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집트고, 우리가 세례 받고 홍해를 건널 때, 우리의 삶에서 이미 파멸당한 삶입니다.

 

3. 짊어짐이 곧 나

 

  하나님께 은혜를 경험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오늘도 은혜를 달라고 구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한 번도 그친 적이 없이 이미 영원합니다. 언제나 넘칩니다. 은혜가 없다면, 그것은 은혜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혼자 생각할 뿐입니다. 이 사람은 마치 맑은 공기로 가득한 곳에서 살면서도 산소통을 짊어지고 나서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저 시원하게 숨쉬면 되는 것을 모르고 자신의 산소통 눈금을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기독교인은 이제 산소통을 다 던져버린 사람들입니다. 자유롭습니다. 가볍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안됩니다. 이제 짊어짐으로 가야 합니다. 오늘은 이 짊어짐의 이야기입니다.

 

  고린도의 여자들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의 자유의 복음을 듣자, 그동안 남성들에게 눌려 살았던 여성들이 여자들만 쓰던 머리에 있는 수건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까, 이제 머리에 더 이상 수건 안 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합니다. 그 수건을 다시 자진해서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수건을 그냥 쓰고 있는 것과, 벗을 수 있는 수건을 자진해서 쓰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남의 명령에 의해서 섬기는 것과, 섬기지 않을 수 있는데 나 스스로 섬기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억지로 섬김과 자발적으로 섬김. 그 사이에 메시아 예수의 죽음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섬기기로 하셨나요? 누군가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기로 하셨나요? 우리는 이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하셨나요? 우리가 짊어진 것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의 예수라 부르듯, 우리가 짊어진 것이 우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를 죄인의 예수로 부른다면, 그분이 죄인들을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짊어진 것이 곧 여러분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짊어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 감행하기로 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짊어짐입니다. 그리고 그 짊어짐이 아쉽지 않은 것은, 애시당초 우리가 이렇게 하고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고, 그 가운데 우리의 사랑하는 메시아의 예수의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4. 사랑, 시련, 새창조

 

  이렇게 생각하면, 이 이상한 구절들이 이해가 됩니다.

 

야보고서 1:2

내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여러분은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로마서 8: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이 되는 구절을 살펴보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예수의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의 계시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이처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이처럼 사랑할 때, 그것이 우주를 새롭게 하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먼저 새롭게 하시는 과정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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