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릿말] : 십자가와 새 시대(1:1~10)

    A. 인삿말(1:1~5)  
    B. 책망 : 서신의 배경(1:6~10)

  *[감사] 단락이 없음

  II. [본론] : 복음

    A. 복음의 진리(1:11~2:21)

    B. 복음의 변호(3:1~5:12)

    C. 복음의 삶(5:13~6:10)

 

  III. [맺음말] : 십자가와 새 창조(6:11~18)

 

II-B. 복음의 변호(4:1~4:20)_(2)

 

갈라디아서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내가 또 말하노니"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주제들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설명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다뤘던 키워드들을 나열하자면, '복음', '언약', '성령', '율법', '유업'등이 있었고 바울은 이것을 아브라함 이야기 위에서 풀어냈었지요.

그림 기억 나시지요?

  그리고 이제는 같은 키워드들을 히브리 성경에서 빠뜨릴 수 없는 다른 이야기 위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유업을 이을 자가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한 시기 까지는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시나요? 아브라함 이야기에 이어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모세' 이야기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경 안에서도 아브라함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연결이 되지요.

 

창세기 15:13, 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이집트를 섬기고, 이집트는 사백년 동안 이 자손을 괴롭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이집트를 징벌하고, 이후 이 자손은 큰 재물을 이끌고 탈출하게 됩니다. 바로 출애굽입니다. 

 

  바울은 출애굽 이야기로 이 아브라함 언약 성취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출애굽의 이야기에서 "자손을 괴롭게 하는 그들"은 누구일까요? 바울은 이것을 "후견인과 청지기(집사)"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세상 초등 학문"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당시 아버지는 상속자인 자기 자녀의 훈육을 후견인이나 집사에게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 후견인은 아이에게 세상의 기초 질서에 대해서 가르쳐왔습니다. 출애굽 이야기에서의 종살이는 대단히 비참한 것인데, 바울은 이 종살이를 로마의 소년들에 비유하며 최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네요. 상속자 위에 군림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율법"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은 마치 이집트에 모세를 보내셨던 것처럼, 율법에 갇힌 이스라엘에게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율법 아래 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출애굽시켜, 그들 본래의 지위, 즉 상속자의 지위를 복권시키셨습니다. 이 상속자로서의 지위가 복권되는 것이 "믿음-성령"으로 표현됩니다. 즉 유대인에게 있어서 메시아 예수의 믿음을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은 두 번째 출애굽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을 성경은 "구원"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앞에서 율법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율법은 약속을 따르는 것을 가로 막는 장애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이 선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앞에서는 이스라엘이 범법했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즉 혐의를 율법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타락했기 때문에 율법을 악용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가 메시아의 죽음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지만,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선한 율법 맡겨 메시아를 죽이도록 허용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약속이 드러나 더 이상 실효가 없는 법이 된 율법이, 어떻게 재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약속 이후의 율법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메시아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이해하는 틀로서 사용됩니다. 하지만 이 이해의 틀을 통해 메시아를 '발견'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이렇게 말한다면, 메시아를 발견하지 못한 유대인을 탓하기 좋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미 발견된 메시아를 통하여' 율법의 새로운 가치가 감춰져있다가 떠올랐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8~11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읽으며 주어를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와 "너희"가 교차되고 있고, 이 다른 주어는 서로 다른 대상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리"와 "너희"를 분열시키려는 것이 유대화주의자들의 전략이라면, 바울은 이 "우리"와 "너희"가 마침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한 것이 복음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유대인 사도들이고, "너희"는 이방인이지요. 갈라디아서 4:1~7이 유대인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이제 바울은 카메라를 돌려 갈라디아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비춥니다.

 

  이방인은 유대인과 달리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은 율법 아래 태어났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태어나자마자("본질상") 하나님 아닌 것들에게 종 노릇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둘에게 모두 메시아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는 동일한 길이 열렸습니다. 이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그리스도를 구성하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의 율법을 동경하며 유대인 상속자가 이미 졸업한 그 종살이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공동체들에게 지적한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다시금 율법 아래로 들어가려 하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라디아서 4:12~20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 아닌 것 아래서 종노릇 하다가, 마침내 아들로 자유를 얻어 상속자의 신분이 복권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갈라디아 교인들도 바로 이 신분에 머물러야 합니다. 곧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종노릇에서 벗어나 메시아 예수의 출애굽을 겪은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핵심은 아브라함의 단일한 자손으로서 하나의 식탁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갈라디아 교회들은 바울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을 듣고 자신들의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과 너무 달라 시험에 들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들은 이전에 시험을 잘 돌파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건강이 복으로 여겨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복된 소식을 전한다는 바울은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의 교회들은 바울의 육체의 약함과 복음의 진실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바울이 육체가 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비천한 모습으로 복음을 이루신 분이 바로 메시아 예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율법과 복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수용하고 자신들이 율법과 무관한 약속의 사람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다시 아브라함의 언약을 묻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그 후손에게 주어지는 '복' 또한 갈라디아 교회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따르려는 그들에게 그 복이 어디 있습니까? 첫 번째 시험 때를 상기한다면, 바울의 육체의 약함은 그들이 복음을 수용하는데 전혀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시험은 쉽지 않은듯 합니다. 그들은 과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참된 말을 했음에도 갈라디아 교회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가 전한 복음을 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유대화주의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좋음을 이루지 못합니다. 오히려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자신들의 주장에 묶어두려는 수작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유대화주의자들의 주장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율법을 추종하는 열심을 철회해야 합니다. 바울은 아직 갈라디아 교회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 안에 메시아의 형상이 이뤄질 때까지 고통을 짊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고통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 위에 서 있다고 확신하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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