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릿말] : 십자가와 새 시대(1:1~10)

    A. 인삿말(1:1~5)  
    B. 책망 : 서신의 배경(1:6~10)

  *[감사] 단락이 없음

  II. [본론] : 복음

    A. 복음의 진리(1:11~2:21)

    B. 복음의 변호(3:1~5:12)

    C. 복음의 삶(5:13~6:10)

 

  III. [맺음말] : 십자가와 새 창조(6:11~18)

 

II-C. 복음의 삶(6:1~6:10)_(2)


갈라디아서 6:1~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을 여전히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 범죄를 처리하는 방법은 '율법'이 아닙니다. 강력한 법을 만들어, 그 법 아래 사람을 종속시키는 것으로는 저 범죄함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신령한"이라 번역된 말은 '프뉴마티코스'라는 희랍어를 쓰는데 "성령적인"이라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보입니다. 즉 '성령 받은 너희'라는 의미입니다. 즉 율법이 아닌 약속으로 수여받은 성령은 인간성이 새로워진 상속자의 표지이며, 그들은 그들을 포로로 잡고 있던 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이때 "바로 잡다"라는 말은 "온전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의 공동체는 형제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서로를 완성시킵니다. 그래서 "짐을 서로 지라"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너의 문제가 나의 문제고, 너의 완성이 우리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율법 없이도 무법의 상태에 빠지지 않고, 규범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법 없이 세우는 법이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형제 사랑입니다.

 

  바울은 다시 우월감을 경계합니다. '우월감'과 '자랑스러움'은 다릅니다. 자신의 일을 살피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월감으로 변질되는 것은 그 자랑스러움이 자신을 넘어 타인을 비교 대상으로 삼을 때입니다. '스스로만 자랑스러워하기'. 이것이 명예/체면 문화 속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인 각 개인에게 요구한 짐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6:6~10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바울은 세밀하게 문제를 조정해 나갑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화주의자들의 주장이 선언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하지만, 이때 공동체의 일원들은 스스로를 속여선 안됩니다. 가르치는 것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복음의 기초 위에 서있어야 하고, 복음의 기초는 분열이 아닌 단일한 공동체를 낳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월감과 분열은 어느 때나 틈탈 수 있고, 이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육체의 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공동체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말씀이 복음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르치고 있다면, 이것은 더더욱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둘 것이고, 이 때문에 만일 공동체가 분열하고 있다면 이미 그 죄악의 악취 나는 것을 추수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 때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은 구체적으로 할례를 의미할 것입니다. 혹은 유대인의 율법으로 살려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성령의 열매를 누리고 있다면, 그는 '영생' 즉 히브리 사람들이 그토록 도래하기를 고대했던 그 시간(올람하바)을 이미 추수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의 추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선을 행하면서도 그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때 필요한 것은 낙심하지 말고 나약해지지 않는 것입니다("피곤하지 아니하면", 개역개정은 "포기하지 않으면"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ἄρα οὖνὡς καιρὸν ἔχωμεν)" 를 직역하면, "그러므로 우리가 카이로스를 가지고 있으니" 정도가 됩니다. 바울은 앞에서 연대기적 시간인 "크로노스가 찼다(4:4)"고 말했습니다. 크로노스가 차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고, 그로 인해 새로운 공동체가 출범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크로노스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크로노스를 단절시키면서도 크로노스와 접해있는 새로운 시간입니다. 곧 메시아의 시간입니다. 바울은 이 메시아의 시간 속에서 함께 성령을 따라 창조의 좋음을 구현하자고 갈라디아의 교회들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좋음을 구현하는 일은, 율법이 아닌 믿음을 선택한 가정들을 든든히 세워나가는 일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갈라디아 교회들이 복음을 오해했던 시간들을 중단시키고, 또 끝까지 견딘다면 잘라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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