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의 "빌라도에게"라는 구절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때 추가된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사" 앞에 빌라도가 추가된 것은, 예수의 고난의 연대를 확실히 해두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칼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역사적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본질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교회의 역사 속에서 빌라도는 다양한 평가를 얻습니다. <가말리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 빌라도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했고, 그런 빌라도에게 예수가 꿈에 나타나 "빌라도야 어찌하여 우느냐?...두려워 말아라. 모든 일이 그분께서 쓰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남편과 아내가 모두 꿈 꾸는 자로 기록되었군요).
또한 콥트(이집트) 교회는 빌라도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그리스 정교회는 10월 27을 독실한 유대교인으로 알려진 빌라도 아내의 축일로 봉헌합니다. 아감벤은 이를 로마의 박해를 중지시키고, 예수 죽임의 혐의를 유대인에게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2
이렇듯 빌라도를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양하다는 사실은 어느 관점이 옳고 그르냐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전에, 그 다양한 관점이 공유하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역사성을 보증합니다. 실제로 빌라도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분명한 사실. 그 사실로부터 기독교는 예수 수난의 역사성을 지켜왔습니다.
저는 판결의 권한을 가졌음에도 한결같이 판결을 회피하려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빌라도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시로부터 빌라도가 가공의 인물이 아닌 역사적 인물이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판결의 권한을 가졌음에도("베마에 앉았다"), 줄곧 군중에게 선택지를 제시하고 그 반응을 살피는 것에서 저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15~26, 개인번역
[1]
그런데 명절을 따라 이끄는 자는 군중이 원하는 묶인 자 하나를 군중에게 풀어주곤 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은 유명한 묶인 자를 가졌는데, 바라바스라 불렸다. 그래서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 필라토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를 너희들에게 풀어주길 원하느냐?
바라바스냐, 메시아라 불리는 예수냐?"
빌라도는 관례에 따라 '명절 특별 사면'을 제안했습니다. 예수가 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빌라도는 아마도 이 특별 사면 제안을 통해서 예수가 풀려나기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이려는 군중의 의지는 단호했습니다.
'바라바스(개역, "바라바")'는 노상 강도가 아닌 혁명가입니다. 즉 폭력으로 로마를 권세에 맞서려는 사람이었고, 로마가 '말뚝 형벌'을 만든 이유는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중은 바로 '로마와 무력으로 맞설 의지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를 그 자리에 매달고자 결심합니다. 이것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메시아에 대한 처벌이자,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 형벌에 대한 조롱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이 시기 때문에(δια) 그이를 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단적 시기(πθονος)와 성령의 시기
마태는 군중의 이러한 제스쳐가 '시기(πθονος)'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프또노스'는 '부러움, 질투, 악한 의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군중은 예수의 무엇을 부러워하고 질투했기에, 이런 악한 의도를 갖게 되었을까요? 군중을 뒤에서 움직였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가진 '메시아로서의 정당성'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지만, 메시아가 나타나면 그들의 권위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에 관해서 말하면서도, 메시아가 나타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났는데, 헤롯파든 바리새파든 사두개파든 문법학자든 한결같이 그 메시아를 없애려고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그 메시아에 기대어 민중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자신에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는 부러움이란 감정은 자신을 타인 아래로 굴종시킴과 동시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타인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이 굴종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에게서 그것을 박탈시키고자 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프또노스가 부러움과 악한 의도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부러움은 나 스스로 노예된 것이고, 그 노예됨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을 해하는 것이 바로 악한 의도입니다. 스스로 노예됨에서 벗어나기 위한 잘못된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유대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성난 군중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사고 속에서 스스로를 로마 아래 놓인 노예로 산정하고 있고, 이 노예됨을 벗어나려면 로마를 파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유를 선언한 뒤에도 상황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자유는 '상황의 개선'이 아니라 '상황 때문에' 자신을 노예라 착각하는 이들에게 선언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상황을 개선하는 힘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흐려진 판단을 깨우치는 부드러운 앎으로 오셨습니다. 상황으로부터의 출애굽이 아니라, 인식으로부터의 출애굽입니다.
요한복음 8:32, 개인번역
너희들이 그 참을 깨달아라,
그리고 그 참이 너희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시기(부러움/악한 의도)'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이 공유하는 것일 때 문제의 양상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인간은 오직 타인의 관점을 경유해서 자신을 바라볼 때만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화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객관화란 자기 자신에 대해 손님이 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선 반드시 타인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즉 타인의 관점은 굴종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긴요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배움이란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타인을 돌아보아도 자신이 시기에 빠져있다면, 자신이 시기에 빠져있음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집단적 시기"라 명명하겠습니다. "집단적 시기"에 빠져있을 때는, 심지어 그 집단적 시기에 빠진 집단에게는 시기에 빠져있지 않은 사람, 곧 그 집단이 이질적으로 여길 것이 분명한 타자가 절실합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그러한 존재였으나, 집단적 시기에 빠진 이스라엘은 예수라는 이질적 타자를 통해 자신들을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과의 동질화를 줄기차게 요구하다가, 동질화되지 않자 결국 죽이기를 결정한 것입니다.
이 '시기'는 바울의 편지 안에서 죄의 목록을 제시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단독으로 등장하지 않고 다른 죄의 목록들과 함께 묶여 제시됩니다. 개역한글에서는 '투기'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로마서 1:29, 개인번역
그들은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악의로 가득하며,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갈라디아서 5:21, 개역한글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디모데전서 6:4, 개역한글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로마서에서 이 투기는 살인과 가깝고, 갈라디아서에서의 술 취함과 방탕함은 그 부러움을 잊기 위한 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시기/투기를 분쟁, 훼방, 악한 생각과 연결시킵니다. 우리는 이 본문들을 통해서 '시기/투기'가 1) 자신을 타인과의 경쟁 관계에 놓고 부러워하다가, 2) 결국 타인에게서 그것을 뺏기 위해서 악한 의도를 품게 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 긍정적으로 쓰입니다.
야고보서 4:5, 개역한글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야고보서 4장은 세상과 벗되어 사탄에게 타협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등당하는 "성령의 시기"는 1)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상과의 경쟁 관계 놓으신다는 것과 2) 끝내 그 우상을 파멸시키실 것이란 의미로 읽힙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갖는 시기가 어느 한 쪽을 파멸시키려는 시도로 이행하는 것과는 달리, 신이 우상에 대해서 갖는 시기와, 이 같은 시기를 신과 함께 갖는 인간의 인식은 자신 안에서 우상을 파멸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질 것입니다.
다시 예수를 죽이려는 군중과 빌라도에게로 돌아갑시다. 그들은 '시기'하고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리고 군중은 로마를. 여러 민족을 자신들의 발 아래 꿇린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시기입니다. 빌라도가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가 총독으로 유대로 파견된 이유는, 그러한 '시기'를 힘으로 제압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애매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속으로는 타도 로마를 외칠지 몰라도, 지금 겉으로는 황제를 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그런데 그가 '그 베마'위에 앉아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를 향해 사람을 보내어 말했다.
-베마 위에 앉은 이는 누구인가?
빌라도는 베마(βημα) 위에 앉았습니다. 이 베마를 흔히 "심판대"라고 번역하는데, 돌을 박아 만든 발 놓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이 자리에서 연설하고 판결을 행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 많이 등장하는데 그 용례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5, 개역한글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이때 '발 붙일 만큼'이라 번역된 것은 원문은 '발의 베마도 주지 않으셨다'입니다. 원문에는 "만큼"이란 표현이 없습니다. 그 땅을 상속하지 않으셨고, 또 베마도 주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의 땅에서 판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습니다.
이후 신약성경은 '베마'라는 표현을 집권자의 자리, 총독의 자리로 언급합니다.
사도행전 12:21, 개역한글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베마)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고린도의 아고라에 놓였던 '베마'들
개역한글은 베마를 번역하지 않고, 그저 "위에 앉았다"라고 말하지만, 원문은 헤롯이 베마 위에 앉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발이 놓이는 자리 베마는 판결하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이 자리는 갈리오라는 아가야의 총독의 자리입니다. 바울이 그 베마앞으로 압송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갈리오는 바울을 베마 앞으로 데려온 사람들을 그 베마 앞에서 쫓아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베마로 데려가자고 주장했던 회당장 소스데네를 그 베마 앞에서 때립니다.
사도행전 25장에서는 로마의 총독 베스도가 베마의 자리에 앉고, 바울이 다시금 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 왕이나 총독이 앉아 있던 그 베마의 자리가 바울의 편지 안에서는 그들의 자리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여러 차례 그들에 의해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로마서 14:10, 개역한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때 '하나님의 심판대'가 '하나님의 베마'입니다. 즉 하나님의 발이 놓이는 자리이고, 그 자리는 하나님의 판결이 벌어지는 자리입니다. 이런 식의 용례는 고린도후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0, 개인번역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메시아의 '베마' 앞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각각이 그 실천을 향해 그 몸으로 했던 것들을,
좋음이든 열악함이든 되돌려받기 위함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로마서와 고린도후서에서 베마를 하나님과 메시아의 자리로 말합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빌라도가 베마에 앉아 메시아를 판결하는 장면도 아이러니합니다. 메시아는 판결하는 이인데, 판결하는 이가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 판결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이 무척이나 역설적이기 때문에 <베드로 복음서>에서는 "빌라도는 예수를 밖으로 데려가 베마에 앉혔다"라고 과감하게 개작할 정도였습니다.(3:7). 그만큼 '베마는 누구의 자리인가?'가 본문의 화두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판결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베마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포기하는 제스쳐를 보입니다(손씻기), 즉 빌라도가 포기한 그 베마의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군병들이 예수를 "유대인의 주권자"라며 조롱하는 장면은, 그 베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의 독해에 대해서도 좀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해석의 관건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메시아의 베마 앞에 나타나는 '시점'은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개역한글의 번역은 "받으려 함이라"고 번역하며 이 베마 앞에 드러나는 시점을 미래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 구절은 미래시제가 아닌 당위만을 의미하는 '데이(δει)'를 주동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 뒤 문맥을 살펴본다면, 바로 앞 절인 9절에서 바울은, 몸으로 떨어져 있든지 함께 있든지 우리(사도들)가 주께 기쁨이라는 사실을 명예롭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명예의 근거로서 제시된 것이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베마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먼저 베마 앞에 섰기 때문에 명예로운 것 아닐까요? 그 하나님의 판결에 걸맞게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판결에 근거한 명예를 먼저 얻은 이들이 사도들이 아닐까요?
11절은 베마에서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자신들이 먼저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때 두려움은 그 베마에서의 판결의 엄정함일 것입니다.
14절은 그 정신 나간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사도들)가 실로 메세아의 사랑과 함께 하는 이들이며, 바로 그들이 '판결'하는 내용이(새번역은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개역한글은 "우리가 생각건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판결하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5입니다.
고린도후서 5:15, 개인번역
우리는 다음을 판결했습니다(κρίναντας τοῦτο),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럼 모든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그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는 사는 이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향해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죽었고 일어난 이를 향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신약성경 안에서 '베마'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짧게 개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마태복음의 빌라도의 재판 장면은, 이 '베마'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빌라도는 베마에 앉았지만 제대로 판결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판결 앞에 넘겨진 자가 진정한 판결자였으며, 지금 이 대목을 읽는 에클레시아는 베마의 자리에 앉았던 빌라도와 세상을 판결하고 있습니다. 에클레시아가 이러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은, 메시아께서 승천하시어 베마에 좌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승천 사건이후, 모든 인류는 메시아 예수의 베마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사실을 양심으로 먼저 알고 그 판결에 걸맞게 실천하는 자와 양심의 무지 속에 그렇지 않은 자가 있을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5:11b
...나는 여러분의 양심들 안에서도 (하나님이) 드러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희랍 재판 장면에 등정하는 '베마'는 구약성경을 번역한 다음의 단어와 공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 5:35a, 개역한글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ὑποπόδιον)임이요
사도행전 2:35, 36, 개인번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직접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았으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판(ὑποπόδιον)으로 둘 때까지'.
그러니 이스라엘 온 집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메시아가 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3, 개인번역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사들 중 그 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는가?
"앉으라! 나의 오른편으로부터.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받침대(ὑποπόδιον)로 놓을 때까지."
즉 '발등상'은 이사야 66장의 용례를 따라 '땅'과 함께 언급되거나 시편 110편의 용례를 따라 원수와 함께 언급됩니다. 즉 원수가 땅에서 심판받는 장면이 '발등상'으로 표현됩니다. 베마의 심상과 발등상의 심상을 연결한다면,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시간은, 원수가 메시아의 발등상이 되는 과정으로서 심판/판결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 개인번역
내 가족 여러분,
얼굴에 보이는 외모에 따라,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을 갖지 마세요.
즉 가령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초라한 옷을 입고서 굽실거리는 이가
여러분의 회당 안에 들어왔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입은 이를 보고서
"당신은 여기 편히 앉으세요" 라고 말하면서,
굽실거리는 이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이 스스로 지레 판결을 내려버린 사람들 아닙니까?
악한 생각하며 판결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 아닙니까?
야고보도 발등상을 판결의 문제와 결부시킵니다. 즉 에클레시아가 겉보기에 힘이 없어보이는 사람을 자신의 판결 아래 두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의 판단과 무관하게 스스로 내린 판결이고, 악한 생각에 의한 판결이 아니겠냐고 반문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나님의 베마 앞에선 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을 따라 판결을 내렸듯이, 야고보서 2장에서도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판결에 따라 판결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즉 에클레시아는 메시아께서 이미 하나님의 베마/발등상 앞에 앉으셨음을 고백하며, 그의 판결을 따라 판결하는 판결 대행자 그룹입니다.
요한계시록 3:9, 개역한글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는 에클레시아가 메시아의 판결에 따라 살때, "사단의 회"에 속한 이들이 그 판결에 굴복한다는 말로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요한계시록 3:21, 개인번역
이기는 이, 나는 그에게 나의 왕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할 것이다, 마치 나 역시 이겼기에 나의 아빠와 함께 그의 왕좌에 앉았듯이.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3:21의 약속은 에클레시아의 이김은 곧 메시아와 같은 베마를 공유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과 바로 그 의로운 사람에게 아무 것도.
왜냐하면 내가 오늘 여러가지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인한(δια) 꿈을 따라."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군중들을 설득했다, 그들이 바라바스를 요구하라고, 반면 예수를 멸망시키라고. 그런데 그 이끄는 자가 그들에게 대답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이 둘로부터 누구를 너희들에게 내가 풀어주길 원하느냐?"
그런데 그들이 말했다.
"그 바라바를!"
필라토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메시아라 불리는 예수를 어떻게 해야겠느냐?"
모두가 말한다.
"그는 말뚝형에 처하리라."
그런데 그가 말했다.
"그가 어떤 악을 행했기 때문인가?"
그런데 그들이 더욱 소리지르며 말하길,
"그는 말뚝형에 처하리라."
그런데 필라토스가 그이는 어떤 것도 유용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폭동만 있음을 알고서, 물을 취해 그 두 손을 그 군중 앞에서 씻었다, 말하길,
"나는 이 피로부터 무죄하다. 너희들이 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씨알이 대답하며 말했다.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그때 그가 그들에게 그 바라바스를 풀어주었고, 반면 그 예수를 채찍질하여 넘겼다, 이는 그이를 말뚝형에 처하기 위함이었다.
-내용 없는 판결
유대 지도자들이 가진 메시아에 관한 발언권을 빼앗아 오기 위한 악한 의도와, 군중들이 가진 폭력에 대한 자신들의 부러워함을 지키기 위한 악한 의도가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라바, 폭력을 추구하는 자의 방면입니다.
빌라도는 군중에게 예수를 어떻게 해야할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판결 그 자체입니다. "그는 말뚝형에 처하리라" 빌라도는 그 판결의 이유를 묻습니다. "그가 어떤 악을 행했기 때문인가?" 그러나 군중은 판결의 이유가 아니라 그저 판결을 한 번 더 반복할 뿐입니다.
로마는 기원전 46년 내란방지법을 제정했습니다. 그 법에 의하면 내란을 일으킨 자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말뚝형, 화형, 짐승들에게 물어 뜯겨 죽는 방식으로 처벌됩니다. 십자가형에 대한 외침은 이 내란방지법의 처벌에 대해서 빌라도도 군중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의 처벌 이유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군중은 예수를 '내란을 일으킨 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내란방지법(Crimen maiestatis)은 "로마 시민과 로마 영토의 안전을 해치려는 자"에게 적용되는 법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내란방지법에 의해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무죄를 판결하고, 그를 풀어줄 수도 있었습니다. 이 선택이 분명히 빌라도에게 열려 있었으나, 판결의 자리에 앉은 그는 판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군중들의 그 내용없는 판결에 대해서 그저 침묵으로 승인할 참입니다. 그가 손을 씻고 돌아선다고 해서, 그의 윤리적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를 유죄로 선언한 것이나 결과가 다를 것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빌라도가 '폭동'을 피하기 위해 그리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넘겼다."
빌라도는 그 내용없는 판결대로 예수를 넘겨줍니다. 겟세마네부터 예수는 줄곧 "넘겨졌습니다." 이 단어가 유독 반복되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읽는 이들은 이 표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판결할 수 있으면서도 판결하지 않는 두 사람, 빌라도와 예수. 그런데 한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피하기 위해 넘기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을 책임지기 위해서 넘겨집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이스라엘은, 그 예수 죽임의 책임을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손들이 짊어지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했을테지만, 며칠이 지나면 예수 죽임의 책임을 지는 것이란, 자신이 예수를 죽였음을 인정하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즉 스스로 넘겨지는 삶으로 넘겨져야 합니다. 스가랴에 예언된 대로 말입니다.
스가랴 12:10, 개역한글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로마 치하에서 에클레시아가 된다는 것, 즉 자신이 예수를 찔렀음을 인정하는 것은, 만물의 찌꺼기 같은 삶으로 넘겨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고린도전서 4:13). 그리고 이 길만이 하나님께로 우리 자신을 넘기는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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