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마태복음 26:57~27:14, 개인번역

[1]
  그런데 그 예수를 붙잡은 이들이 대제사장 가야바를 향해 이끌었다,

거기 문법학자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멀리서부터 그 대제사장의 그 마당까지 그이를 따랐다,

그리고 들어가서 그 종들과 함께 밖에 앉았다, 그 끝(τελος)을 보기 위하여.


  예수는 그렇게 가룟 유다를 앞세운 성전 경비대에 의해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 적법과 위법을 결정하는 자들인 문법학자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방금 전에 기세등등하게 경비병의 귀를 잘랐다가, 자신의 대장이 체포되는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 도망쳤던 한 사람도 몰래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전역에 퍼졌고, 가야바의 마당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한 쪽에 그 집을 관리하는 종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습니다.


  적어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이렇게 무력하게 체포당하실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합니다. 또 그렇게 생각했으니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시간이 더 이상 기도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 최후의 기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경비병의 귀를 자른 행동도 예수와 함께 이 무뢰배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단 한 가지, 예수께서 그저 아무런 저항없이 끌려가시는 장면만이 그의 예상에서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끝'을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바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끝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을까요? 예수께서 끝내 위기를 돌파하시고 자신의 반대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집 안에서는 역대 대제사장들이 모여있었고, 이스라엘의 유력인들 71명(제사장 24명, 장로 24명, 문법학자 22명)이 모여 중요한 논제를 결정하는 "산헤드린 공회"도 소집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은 희랍어로 '쉬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이라고 읽는데, '함께 놓다/결정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산헤드린 공회"라는 표현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한 것입니다. 마치 "역전(前) 앞"처럼 말입니다. 로마는 식민지 국가의 자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유대는 로마의 허가 하에 공회를 소집할 수 있었고,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공회는 다급했을 것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를 잡아 죽이고는 싶었지만, 적어도 축제 기간에는 예수를 죽이지 말자고 했는데(26:5), 그 바라지 않던 소원이 현실로 벌어졌으니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예수의 행동은 베드로의 "예상 밖"이었고, 가야바에게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그 공회 전체가 

그 예수에 관한(κατα) 거짓증언을 찾았다, 그들이 그이를 죽일 방법으로,

그리고 많은 이들이 앞에 나와 거짓 증언했으나 그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후에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저 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그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뜨릴 수 있고

    세 날을 통해 그것을 건설할 수 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일어나 그이에게 말했다.


  "너는 아무 대답도 안하는가?

  이들이 너에 관해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그런데 예수께서 침묵하셨다.


  일단 잡혔으니, 그 체포가 정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에 관해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죽일만한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율법대로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두 사람의 증인이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의 말에 트집을 잡았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 곧 헤롯 성전을 무너뜨릴 수 있고, 세 번의 낮을 통해 성전을 다시 건설할 수 있다 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2:19, 개인번역

예수께서 대답하며 그들에게 말하셨다.


  "너희들이 그 성전을 풀어버려라, 

  그러면 삼 일 안에 내가 그것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 성전을 풀어버려라"고 말씀한 것이, 제자들이 군대를 모아 헤롯 성전을 파괴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말 못하는 건물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예수의 말씀은 왜곡된 성전 지도자들의 권세가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있을 때, 자신이 부활을 통해 진정한 권세있는 자가 누구인지 밝히겠다는 말입니다. 이 주장에는 폭력의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폭력을 부르짖는 이스라엘은 이 말에 뜨끔합니다. 로마 아래 있으면서 로마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은 저 "풀어버려라"라는 말에서 자신들을 향한 폭력을 읽어내고, 그 혐의를 예수께 뒤집어 씌우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생각을 오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제사장이 뭔가 좀 항변을 해보라고 다그칠 정도입니다. 대제사장은 아마도 두 가지 반응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빌던지, 아니면 뻔뻔하게 정말 그러하다고 말하던지.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양자택일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또 생각해보면, 자신이 부활할 것이고, 부활하는 자신의 몸이 성전이라는 말을 해봤자 이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그이에게 대답하며 말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라 너에게 맹세한다, 

  이는 네가 우리에게 말하게 하기 위함이다, 

  네가 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가?"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했다. 내가 다시 너희들에게 말한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 잠재력의 오른편들로부터 앉아

  그 하늘의 구름들로 가는 그 인자를."


 가야바는 유대인 최후의 수단을 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여 그이에게 묻습니다. "네가 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가?" 가야바 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익숙하고, "메시아"라는 단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용하는 단어는 같아고 그 의미는 천양지차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단어는 자신들의 식민지 상황과 결부되어 이해되었습니다. 이 말은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연관됩니다. 식민지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존을 억누르는 힘과 그 힘을 쓰는 타인이 곧 악으로 규정했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는 그 악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올 더 큰 힘을 가진 존재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인식이고, 이 점에 있어서 산헤드린에 모인 지도자들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앞에서는 "메시아는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와의 협력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는 로마와의 투쟁을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메시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즉 "메시아"라는 존재 자체가 유대 지도자들의 인격 안에서는 이미 분열되어 있습니다. 만일 가야바에게 메시아는 필요한 존재인지를 물으면, 가아뱌는 필요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을 대할 때는 필요하지만, 로마인을 대할 때는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23:3). 혹자는 이러한 태도를 두둔하며, '이것이 바로 정치'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가야바에게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했다. 내가 다시 너희들에게 말한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 잠재력의 오른편들로부터 앉아

  그 하늘의 구름들로 가는 그 인자를."


  유대와 로마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사람에게, 예수는 자신이 승천으로 입증될 바로 그 인자라고 주장했습니다. 흔히 이 마태복음 26:64를 예수께서 자신의 재림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문맥은 재림을 언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사건은, 다니엘 7장이 예언하고 있는 승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나라와 권세와 능력(잠재력)을 이양받아, 새로운 통치의 시대(오는시대)를 여는, 새로운 왕이 등극하는 순간이 바로 승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대제사장이 자신의 그 겉옷들을 찢으며 말했다.


  "그가 신성모독했다.
  어째서 우리가 여전히 증언의 필요를 가져야하는가?

  보라, 지금 여러분들이 그 신성모독을 들었소.

  여러분은 어찌 여기시오?"


  그런데 대답하는 이들이 말했다.


  "그는 죽음에 묶인(죽어야만 하는) 자입니다."


  그때 그들이 그이의 그 얼굴로 침뱉고 그이를 때렸다, 

그런데 치는 이들이 말하길, 


  "우리에게 예언하라, 메시아야, 너를 가격한 자가 누구냐?"


  그리고 이 다니엘 7장의 이야기를 가야바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발언이 '신성모독'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발 아래 꿇려 있는 이 무력한 청년이, 모든 민족을 통치할 인자라는 사실을 가야바는 받아들일 수 없고, 만일 예수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메시아가 로마로부터 유대를 구원해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보다 더 큰 힘을 바라는 이들은, 이 나약함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약한 주제에 스스로 메시아/인자라고 자처하는 이를 죽이고자 합니다. 무력한 메시아를 죽이겠다는 산헤드린의 결정은, 곧 힘있는 메시아에 대한 포기 못함이고, 또 메시아는 힘 있는 존재라고 말해야만, 식민지 상황 속에 있는 유대인들 위에 군림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운운하며 말입니다. 자신들이 로마 제국에 지배당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나약함을 경멸하고 심지어 없애고자 합니다. 이렇게 힘 센 자에 의해 연약한 자가 억압받는 악순환이, 이스라엘 안에서도 잘못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당연히 끊어질 줄도 모릅니다.


[2]  

  그런데 베드로가 그 마당의 밖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한 여자아이가 와서 말했다.


  "당신도 갈릴리의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그는 모든 이들 앞에서 부인하며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다시 마태의 카메라는 베드로를 비춥니다. 무력한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유대인들에 의해 예수의 죽음이 결정되었을 때, 베드로는 여전히 가야바의 마당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와서 물었습니다. 당시 '여자'는 증인으로 출석도 불가능했고, 산헤드린의 구성원 중에도 여자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른도 아니고 어린이입니다. 여자 아이의 발언은 전혀 무게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여자 아이의 말에 정통으로 얻어 맞습니다. 그래서 모르겠다고 둘러대고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현관으로 나간 그를, 또다른 여자아이가 보고 그에게 거기서 말했다.


  "이 사람이 나사렛의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그가 맹세와 함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다.
그런데 조금 뒤에 서 있던 이들이 그 베드로에게 와서 말했다. 


  "참으로 너 역시 그들로부터 있다. 

  왜냐하면 너의 말투 또한 그가 너에게 행한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저주하고 맹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그리고 곧장 닭이 소리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께서 말하신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
'닭이 소리내기 전에 세 번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밖으로 심하게 울었다.


  그런데 또 다른 여자 아이가 와서 같은 말을 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맹세합니다. 그런데 그 맹세가 소용없게도 이번엔 사람들이 와서 베드로의 말투를 언급하며,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지방 말투를 보니 예수와 한 패인 것이 분명하다고 몰아붙입니다.


  이번에 베드로는 맹세에 저주를 보탭니다. 


마태복음 5:34,37, 개인번역

전적으로 맹세하지 말아라.

...

그런데 너희들의 말은 네는 네, 아니오는 아니오가 되게 하라.

그런데 그것들보다 더 한 것은 악함으로부터 있다.


  베드로는 예수와 한 패라는 말에 그저 "네"하지 못했습니다. 아니오를 반복하다가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미 오래 전에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네/아니오'하지 못하고 보태는 말들은 악함으로부터 나온다고.


  무엇이 베드로가 악에 빠지도록 만들었을까요? 왜 베드로는 '네' 하지 못하고 맹세하고 저주하며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예수는 베드로가 그런 사람임을 불과 몇 시간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4, 개인번역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바로 이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이 말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생생합니다.


마태복음 26:35, 개인번역

  베드로가 그이에게 말했다.   


  "그리고 만일 내가 당신과 함께 죽어야만 한다면, 

  나는 결코 당신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그 맹세에 저주를 보탤 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을 기억하고서 가야바의 집을 빠져나가 심하게 울었습니다. 


[3]

  그런데 이른 아침이 되었고 

모든 대제사장들과 그 씨알의 장로들이 그 예수에 관해 회의를 취했다, 

그 결과 그이가 죽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이를 묶어서 이끌고, 이끄는 자 필라토스에게 넘겼다.


  다음 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로마의 허가 아래서만 할 수 있는 회의였고, 그 회의를 통해 예수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식민지의 주권자들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이제 빌라도에게 넘겨지셨다는 얘기를 짧게 하고,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베드로 이야기에 이어 가룟 유다 이야기를 배치한 마태의 의도를 생각해보며 읽어봅시다.


  그때 그이를 넘긴 유다가 그이의 판결받음을 보고 마음이 바뀌어

그 은전 삼십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리며 말하길, 


  "무고한 피를 넘긴 내가 비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했다.


  "어찌 우리를 향해서? 당신이 보시오."


  가룟 유다는 예수의 죽음이 결정되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받은 은전 30개를 돌려주며,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제가 "비뚤어졌습니다"라고 번역한 말은 '하마르타노(ἁμαρτάνω)'인데, 모르고 지은 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가룟 유다는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했으며, 그것은 자신의 무지에 기인한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가룟 유다처럼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은 잘못한 자가 찾아와 그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에게 용서를 선언해줘야 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이 만난 장소는 성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지붕 뚫린 집에서 용서를 선언하자, 문법학자들이 신성모독이라 생각했던 것도(마가복음 2:7) 용서는 하나님께 임명받은 성전의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에서 대제사장들은 용서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선언하는 순간, 자신들도 죄를 인정하고 지금까지 벌인 일들을 되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선언해야 할 사람들이 한 말이라곤 고작,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였습니다. 성전과 제사장 제도는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죄 용서는 신과의 교제와도 직결됩니다. 그런데 그 성전과 제사 제도가 죄인과 무관할 때, 그리고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는 스스로 책임지라'고 찾아온 죄인에게 말할 때, 이는 성전과 제사 제도가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는 사실을 유대 지도자들 스스로가 인정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은전들을 성전 속으로 던지고 물러났다, 

그리고 돌아가 목을 맸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그 은전들을 취하며 말했다.


  "이것들을 '코르바나' 속으로 던지는 것이 적법하지 않다, 피의 가치이기 때문에."


  이 사실 앞에 가룟 유다는 자신이 받은 돈을 성전 안으로 던져버리고, 자신은 스스로 돌아가 목을 맸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후 은전 30개에 대한 대제사장들의 태도입니다. 성전과 제사 제도를  파괴하는 주범이면서도, 이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적법과 적법하지 않음을 결정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들을 '코르바나' 속으로 던지는 것이 적법하지 않다, 피의 가치이기 때문에."


  개역한글 성경이 "성전고"라고 번역한 단어는 코르바나스(κορβανᾶς)이고, 이 코르바나스는 우리에게 '고르반'으로 익숙합니다.


마가복음 7:11, 개역한글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하나님께 드려짐"이란 의미입니다. 즉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의 은전 30개는 하나님께 드릴만한 예물일 수 없으니 성전에 둘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전 30개는 본인들이 가룟 유다에게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본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은연 중에 인정한 것일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 은전 30개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들이 잘못을 언급하기는 커녕, 그 돈이 "피값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피값을 책정하고 지불한 사람들은 자신들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의를 취하고 그 은전들로부터 그 토기장이의 그 땅을 샀다, 

외국인/손님/낯선 이들의 장례를 위해. 

그래서 바로 그 땅을 오늘까지 "피의 땅"이라 부른다. 

그때 그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야기된 것이 채워졌다.


  '그들이 그 은전들을 취했다,

  그 매겨진 가치를,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매겨진,

  그리고 그들이 그것들을 그 토기장이의 땅 속으로 주었다,

  주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대로.'


  그들은 다시 회의를 거쳐 그 고르반 할 수 없는 은전들로 토기장이의 땅을 매매합니다. 그 땅은 무연고자의 장례를 위한 땅, 즉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의 장례를 위해 쓰이는 하찮은 땅입니다. 그 땅의 명칭은 "피의 땅"이 되었습니다. 즉 예수의 피 값을 은전 30개로 책정하고, 바로 그 가격으로 매입한 땅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 사실을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 증언합니다.


  '그들이 그 은전들을 취했다,

  그 매겨진 가치를,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매겨진,

  그리고 그들이 그것들을 그 토기장이의 땅 속으로 주었다,

  주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대로.'


  마태가 인용한 구절은 스가랴 11:12,13과 내용이 같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태가 왜 스가랴를 인용했음에도 예레미야 인용이라 기록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마태가 실수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대선지서 위주로 구분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가장 타당한 의견은 예레미야 19장에도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스가랴에도 예레미야에도 토기장이가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토기장이에게 항아리를 얻는데 그 항아리를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깨뜨리라고 명 받습니다. 


예레미야 19:11,12, 새번역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만군의 주가 말한다. 

  토기 그릇은 한번 깨지면 다시 원상태로 쓸 수 없다. 

  나도 이 백성과 이 도성을 토기 그릇처럼 깨뜨려 버리겠다. 

  그러면 더 이상 시체를 묻을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도벳에까지 시체를 묻을 것이다.'


  내가 이 곳과 여기에 사는 주민을 이처럼 만들어 놓겠다. 

  반드시 이 도성을 도벳처럼 만들어 놓겠다. 나 주의 말이다.


  즉 토기의 깨짐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리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무고한 자를 죽이고 이방인들이 묻힐 땅을 매매했지만, 정작 그 땅에 묻히게 될 것은 이스라엘 자신이 될 것입니다. 스가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목자의 몸값을 은전 30개로 책정하여 토기장이에게 주고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언약은 파기됩니다. 이 일을 누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9, 새번역

이 일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자기들의 말로 '아겔다마'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피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피의 땅', 아겔마다의 위치는 "힌놈 골짜기"라는 곳인데, 이스라엘 쓰레기 하치장으로 쓰레기 태우는 연기가 끊이지 않고 악취로 진동하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이 "힌놈 골짜기"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가 '게(γε, 골짜기)헨나(εννα, 힌놈)'입니다. '지옥'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돈으로 환산한 자와 그 민족의 결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이끄는 자의 앞에 세워졌다.

그리고 그 이끄는 자가 그이에게 물으며 말했다.


  "네가 유대인들의 주권자인가?"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했다.


  "네가 말했다."


  그리고 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그이가 증언되신 것 안에서는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때 필라토스가 그이에게 말했다. 


  "얼마나 많이 당신을 증언하는지 당신은 들리지 않는가?"


  그리고 그이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한 마디도, 

그 결과 그 이끄는 자가 매우 놀랐다.


  다시 빌라도 앞에 선 예수에게로 돌아옵니다. 그 "이끄는 자" 빌라도는 예수께 묻습니다. 이제 그 "이끄는 자"가 무엇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지가 들통날 것입니다. 그 "이끄는 자"가 예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들의 주권자인가?"

  이때 "주권자"라고 번역한 말은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로서, "왕"으로 번역됩니다(여성형으로 '바실레이아(βασιλεια)'라고 쓰면 '나라'라고 번역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 유대인의 주권자라고 스스로를 인정하셨을 때, 우리는 그의 주권, 그의 통치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비폭력의, 사람을 살리는, 약한 자를 돌보는, 진실 앞에 침묵하지 않는, 사랑의. 그러나 그러한 통치의 결과는 체포와 심문이었습니다. 즉 예수의 심문 장면은 이끄는 자의 통치와 참 주권자의 통치가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에게만 해당되는 결과가 아니라, 그이를 따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치와 통치의 충돌 속에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예수는 자신에 위한 항변에는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향한 중상모략이 당연한 듯 말입니다. 이러한 태도에 빌라도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정말 경천동지할 일이 이 금요일 이후 삼 일 뒤에 남아있습니다. 물론 이때까진 예수 외에 그 누구도 그 일을 예상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반응형

'복음서, 예수의 도전 > 마태복음 자세히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27:27~46  (1) 2018.03.20
마태복음 27:15~26  (1) 2018.03.13
마태복음 26:35~56  (0) 2018.02.28
마태복음 26:3~35  (1) 2018.02.21
마태복음 25:1~26:2  (1) 2018.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