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히브리서 9:1~28, 개인번역
[1]
그러므로 한편으로 그 첫 번째 (계약)도
고용된 일(禮, λατρεία)에 속한 원칙들(δικαίωμα)과
코스모스적인 그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장막도 틀잡혔기(κατεσκευάσθη) 때문인데,
그 안에는 등대와 탁자와 거룩하다 이야기되는 그 빵들의 놓음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 두 번째 휘장과 함께
"거룩들 중 거룩"이라 이야기 되는 장막이 있는데,
그것은 금으로 된 향로와
금으로 모든 면이 싸인 그 계약의 궤를 가졌으며,
그 안에는 만나를 가진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이 돋은 지팡이와
그 계약의 돌판들이 있는데,
그 궤 위에는 그 속죄소를 드리우는 영광의 케루빔이 있다.
그것들에 관하여 지금 부분을 따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그것들이 틀잡혔을 때,
한편으로 그 첫 번째 장막 안으로 모든 것을 통하여(διαπαντός)
제사장들이 들어간다 고용된 일들(λατρεία)을 완수하며,
다른 한편으로 두 번째 것 안으로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 홀로,
피와 분리되지 않은 채,
(그 피는 그가 그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그 씨알에 속한 모르고 지은 죄들을 위하여 앞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것을 그 거룩한 숨님이 분명히 하셨으니,
아직 그 거룩들에 속한 그 길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첫 번째 장막이 스타시스(στάσις)를 가진 동안에는,
(그 첫 번째 장막은 안에 세워졌던 그 카이로스 속으로 들어가는 비유이다,
그 비유를 따라 선물들과 희생들이 앞으로 드려지는데,
양심을 따라 그 고용된 것들(λατρεύοντα)을 이룰 수 없다,)
오직 먹는 것들과 마시는 것들과 정결의 다른 것들 곁에서,
살몸적 원칙들이 '곧음을 통하는(διόρθωσις)' 카이로스까지 곁에 놓였던 것들이다.
[1]
-첫 번째 계약의 틀잡힌 공간
8장을 마무리하는 내용은 '법의 폐기'가 아니라 '법의 위치 이동'이기 때문에, 1절이 "그러므로"라고 시작되고 있다. 만일 첫 번째 계약인 율법을 일소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여겼다면 나올 수 없는 접속사이다. 기자는 첫 번째 계약의 장점을 나열하는데, 이때 '고용된 일(λατρεια, 라트레이아)'이라 번역한 단어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다. 1 이 단어는 "고용되어(hired) 수행하는 업무"를 의미한다. 즉 제사장에게 라트레이아가 있다는 말은, 그들이 신께 고용되어, 신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함을 뜻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신께 고용되어 하는 일은 마구잡이로 하는 일이 아니라 원칙(δικαίωμα, 직역하면 '옳음들', '의로움들')이 있다. 이 "라트레이아에 속하는 원칙들"을 새번역은 '예배규정'으로, 개역성경은 '예법'으로, ESV는 "regulations for worship"으로 번역했다. 번역어들 모두 예전적인 측면이 부각되지만, 내 생각에는 '제사장의 일과 규정' 정도로 보면 좋겠다. 고용된 제사장의 삶에서 종교적 측면과 비종교적 측면을 나누려는 단어가 아니라, 제사장으로 임명된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라트레이아로 포섭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라트레이아로 포섭된 제사장의 삶에는 원칙이 있다는 말이다.
본문 단어들의 층위를 염두해야 한다. 지금 기자는 첫 번째 계약의 틀잡힘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에 대한 예시로서 제사장들의 라트레이아를 든 것이다.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이.
첫 번째 계약은 틀잡혔다.
1) 제사장들의 라트레이아에는 원칙들이 있다.
그리고 첫 번째 계약을 설명하는 두 번째 것은 "거룩한 것"이다. 이것은 '성막'을 지칭한다. '코스모스적(κοσμικόν)'이라는 수식이 붙은 것은, 이 성막이 지상에 있는 거룩이기 때문이다. 즉 성막의 성격은 '지상과 만난 거룩'이다. 개역성경은 코스미콘을 "세상에 속한"이라
번역했다. 문자 그대로는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일단 '세상'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읽힌다는데 문제가 있다.
코스모스(κοσμος)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늬앙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신적인 차원과 인간적 차원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가시화되는 장소가 성막인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원칙들이 있듯이, 이 성막이라는 공간도 원칙, 규범들이 있다. 그 규범을 따라 성막 안에 있는 등대와 탁자와 거룩한 빵들이 놓여있다. 제사장과 성막의 공통점은 질서있게 틀 잡혔다는 데 있다. 이것이 첫 번째 계약의 측성이다.
첫 번째 계약은 틀잡혔다.
1) 제사장들의 라트레이아에는 원칙들이 있다.
2) 첫 번째 계약의 성막도 틀잡혔다(ex. 등대, 탁자, 진설병)
기자는 이 첫 번째 계약의 체계에 대한 내용을 한 편(μεν)과 다른 한 편(δε)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며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한 편과 다른 편 모두 첫 번째 계약의 틀잡힘의 예시들이다. "한 편"으로 먼저 언급한 것은 '업무(라트레이아)'과 '공간(성막)'이다. 신께 고용된 제사장들에게는 지켜야 하는 일의 원칙이 있고, 또 그들이 일하는 일터에는 이러저러한 것이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기자는 카메라를 좀 더 당겨서 그 성막의 내밀한 곳을 보여준다. "'거룩들 중 거룩'이라 이야기되는 장막"인데, 우리에게는 '지성소'라는 번역어가 익숙하다. 그 명칭에서부터 성막이 이중구조임을 알 수 있다. 성막 자체는 거룩한 것이지만, 그 거룩한 것 안에는 그 거룩한 것들로부터도 또 구분되는 '거룩들 중의 거룩'이 있다. 그리고 이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금으로 싸인 "계약의 궤"가 들어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과 함께 금으로 된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제사장직 선출에 대한 불만을 일소시키기 위한(민수기 17장) 싹 난 지팡이가 있다. 아니, 있었다. 이미 언약궤 안에서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사라진지는 오래되었으므로(열왕기상 8:9) 기자는 열왕기상의 시점보다 이전에 있었던 언약궤를 상기하면서,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모를 수 없는 언약궤 외관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금으로 된 향로"이다. 이 "금으로 된 향로"는 지성소 안이 아니라 밖에 있기 때문이다(출애굽기 40:5의 앞은 '휘장 밖의 앞'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기자는 금 향로를 지성소에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만일 금 향로가 지성소 안에 있지 않으면서도 지성소를 언급할 때 묘사된다면, 이것은 기자의 무지가 아니라 의도가 아닐까? 금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지성소로 연결되기 때문에, 금 향로를 "다른 한편"을 말할 때 언급한 것 아닐까? 게다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고 있던 휘장이 찢겼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금향로는 지성소 밖에서, 지성소와 별개로 있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닐까?
첫 번째 계약은 틀잡혔다.
한 편으로
1) 제사장들의 라트레이아에는 원칙들이 있다.
2) 첫 번째 계약의 성막도 틀잡혔다(ex. 등대, 탁자, 진설병)
다른 한 편으로
1) 지성소
2) (그 안에는) 금향로(왜 지성소에?)와 언약궤
3) (언약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 계약의 돌판들
4) (언약궤 위에는) 케루빔
(그려놓고 보니, 라캉의 성차공식 그림과 맞춰볼 수 있을 것 같다. 저 지성소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지성소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금향로를 대상a로 놓으면 되지 않을까?)
(아, 그리고 케이블에서 가끔 오늘날 언약궤가 이디오피아에 있다던데 없다던데 하는 다큐멘터리를 하는데, 신자는 이미 언약궤가 우리에게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예레미야 3:16))
-첫 번째 계약의 틀잡힘 속에서 수행하는 업무
여하튼 위와 같이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는 공간과 그 공간에 놓인 것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것들이 틀잡혀있다는 게 하고픈 말이었다. 그리고 이제 기자는 이 틀잡힌 공간과 배치 안에서 제사장의 라트레이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말한다. 이때도 '한 편'과 '다른 한 편'으로 나뉘는 논리적 구성을 가지고 글을 쓰는데, 이런 방식은 히브리서 9장의 내용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뒤에 시간과 관련된 논의를 보시라).
한 편으로는 성소에서 이뤄지는 업무들이 있다. 피고용인들(제사장들)은 성소에서 고용업무를 '완수'한다. 이때 쓰인 동사는 επιτελεω인데, 목적어로 업무이나 업무의 완수를 의미하는 추상명사가 온다. 따라서 앞으로 '완수'라 번역한겠다. 즉 사람보다는 그 사람이 완수하는 '업무'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모든 것을 통하여(διαπαντος)"는 그 일이 '일상' 업무라는 말이 되겠다. 라트레이아를 너무 신성하게, 너무 종교적으로 번역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트레이아는 제사장에게는 종교적 업무가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수행하는 일상 업무이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두 번째 것", 즉 지성소 안에서의 라트레이아에 대해 설명한다. "일 년에 한 번(시간적인 예외), 대제사장 홀로(주체들 중 예외), 피와 분리되지 않은 채('피'라는 점에선 예외 없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목적은 대제사장 자신과 씨알의 모르고 지은 죄들을 속죄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첫 번째 계약은 틀잡혔다.
한 편으로
1) 제사장들의 라트레이아에는 원칙들이 있다.
2) 첫 번째 계약의 성막도 틀잡혔다(ex. 등대, 탁자, 진설병)
*제사장들의 일상 업무가 수행됨
다른 한 편으로
1) 지성소
2) (그 안에는) 금향로(왜 지성소에?)와 언약궤
3) (언약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 계약의 돌판들
4) (언약궤 위에는) 케루빔
*예외의 시간에 예외의 인물이 피에 있어선 예외없이 속죄를 위해 들어감
-첫 번째 계약은 길을 지시하면서도 감춤
첫 번째 계약이 위와 같이 틀 잡혔다. 그런데 거룩한 숨님이 분명히 밝히신 사실은, 이 첫 번째 계약 안에서는 그 거룩들에 속한 그 길이, 즉 속죄로 나가는 그 길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제사제도를 통한 속죄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공분을 살만한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고용된 제사장들을 통해서 성막 안에서 이뤄지는 라트레이아를 틀잡은 그 첫 번째 계약은, '길'이 아니라 '길의 비유'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비유는 '파라볼레(παραβολη)'인데, 파자하면 그저 '옆에 던진 것'이다. 즉 '옆에 있어서 이해를 돕는 것'이다. (새번역은 '상징'으로 번역했다) 우리가 여러 차례 확인했듯, 기자는 첫 번째 계약을 폄하할 생각이 결코 없다. 다만 첫 번째 계약의 제기능, 바른 사용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폐기가 아닌 '달리 사용'이다. 그리고 첫 번째 계약의 그 제대로된, 기존과 다른 사용방법이란 옆에 두고서 이해에 참조하는 즉 참조점이라는 말이다.
숨님이 분명히 하셨다고 밝히는 아래 문장은 참으로 흥미롭지 않은가?
"아직 그 거룩들에 속한 그 길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첫 번째 장막이 스타시스(στάσις)를 가진 동안에는,"
'스타시스를 점유했다'는 말은 '눈에 보이도록 세워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도록 세워졌을 때는 오히려 그 거룩들에 속한 길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또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눈에 보이도록 세워진 것이야 말로, 그 길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히브리 기자가 말하고 싶은 첫 번째 계약의 기능이자 한계이다. 성막은 그 안에 세워져있는(ἐνίστημι) 카이로스를 위해서 옆에 던져졌다. 즉 성막을 향한다는 것은 그 카이로스에 근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근접할 수는 있지만 도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막을 위시한 첫 번째 계약만 붙들고 있으면, 카이로스를 향할 수는 있으나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막은 그 카이로스에 도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금기, 경계, 장애물의 역할도 갖도 있기 때문이다.
카이로스를 둘러싸고 있는 성막은 그 카이로스의 외연을 구성하며 그 카이로스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성막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바울은 이를 스스로 학문의 길을 걷기 전까지 아이를 도와주는 '몽학선생(pedagogy)'이라 말한다. 몽학선생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때가 있다. 그때는 몽학선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폐기처분할 때가 아니라, 아이가 드디어 몽학선생의 대화자로 설 때이고, 중요한 것은 몽학선생의 입장이 아니라, 그와 대화를 통해서 형성되는 자기의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계약은 두 번째 계약에 참여한 이들의 참조점이자 대화자이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새번역 모두 카이로스를 메시아적 시간을 언급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개역성경에서는 '현재', 새번역에서는 '현시대를 상징'한다고 번역되었다. 이는 ἥτις παραβολὴ εἰς τὸν καιρὸν τὸν ἐνεστηκότα에서 εἰς τὸν καιρὸν을 부사구로 묶어서 처리하느라, εις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실수이다.)
-숨님이 지시하는 명백한 한계
지금까지 첫 번째 계약 아래 살던 이들은 카이로스를 따라 드린 게 아니라, 그 '파라볼레'를 따라 선물들과 희생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이것은 카이로스를 알기 위해선 필요한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고용 업무와 끊임없이 어긋나는 양심 자체를 고칠 수 없다. 즉 법의 위치 이동은 파라볼레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용 업무는 내 양심과 걸맞지 않는 남의 일이 되고, 그 고용 업무에 열심을 낼수록 자기 자신은 그 업무에 의해 주체는 소외당한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고용된 업무는 돌아갈지언정, 그것은 양심을 따라서가 아니라 외부 규율을 따른 것이며, 고용된 업무 역시 줄곧 온전히 수행되지 못하고, 자신의 양심을 합치할 수 없는 피고용인의 결여를 남긴다. 곧 "이룰 수 없다." 먹고 마시는 규율들과 깨끗하게 하는 규율들을 다루지만, 정작 자신은 깨끗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결여를 명백히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라면, 맑시즘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소외'는 성령에 의해 분명해진 자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체를 소외시키면서도 일을 수행하기 위해 주어진 원칙들을 기자는 "살몸적 원칙들"이라 말한다. 이 원칙들이 가진 한계는 원칙들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그 원칙들을 대하는 주체의 한계이고, 신약성경은 그 한계를 가진 주체를 '살몸(σαρξ)'라 명명한다. 사륵스 상태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 사륵스적 주체에게 어떠한 원칙을 그에게 부과한다 하더라도, 그 원칙은 사륵스적 원칙이 될 수 밖에 없다.
-개혁 : 자아와 업무를 관통하는 곧음
'개혁'이라 번역되는 디오르또시스(διόρθωσις)는 말 그대로 '곧음(ορθος)이 관통한(δια) 상태(σις)'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관통은 라트레이아와 고용된 주체의 관통이다. 이 '관통'은 성막이 더 이상 시간을 감추고 있지 않을 때, 그 드러난 시간에 의해 주체와 업무가 일치되었을 때를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 동안 시간을 지시하기 위해 시간을 감추고 있던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것이 첫 번째 계약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계약의 공간과 업무의 틀잡음 속에 흐르고 있던 그 시간은 이제 폭로되어 주체를 관통하여 흐르게 된 것이다.
[2]
메시아는 그 크고 더 온전한 장막(손으로 짓지 않은)을 통해서
금세 도래하는 좋은 것들에 속하는 대제사장으로서 곁에 계시게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이 창조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염소들과 제물들의 피를 통해서도 아니고,
오히려 그 개인의 피를 통해서
한 번에 그 거룩한 것들 속으로 들어가셨다,
오는시대의 '속죄'를 인식하셨기에.
즉 만일 일반적이었던 것들에 뿌려진 염소들과 소들의 피와 어린 암소의 재가
살몸의 깨끗을 향하여 거룩하게 한다면,
(오는시대의 숨결을 통해 그 자신을 님께 흠없이 앞에 드리신) 그 메시아의 피는
너희들의 그 양심을 시체상태의 일들에서부터
사시는 님께의 고용된 일 속으로 얼마나 더 깨끗게 하겠는가?
[2]
기자는 첫 번째 계약에 속한 장막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크고 더 온전한 '비교급의 장막'을 언급한다. 비교대상이 있어야 비교급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 [1]의 내용들이 영어에서 비교대상을 지칭하는 than이하의 내용들이었다면, 이제 기자는 그 비교내용은 공유하지만, 비교 정도에 있어서 첫 번째 계약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
두 번째 장막은 창조세계에 속하지 않는 장막이다. 즉 새 창조의 장막, 바로 이 새 창조의 장막을 통해 메시아 예수는 대제사장으로 우리 곁에 계시게 되었다. 이때 이 새 창조의 장막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라. 당신 곁에 메시아가 계신가? 그렇다면 당신을 통해서 메시아는 이 땅에 도래하신 것이다. 즉 이 창조세계에 속하지 않는 새 창조의 장막은 당신이다. 고린도후서 5:6이 말하는 그대로.
결론을 너무 빨리 말해버렸기 때문에 뒷 내용이 시시할수도 있다. "금세 도래하는 좋은 것들"은 먼 미래의 도래를 말하지 않는다. 메시아의 장막인 당신을 통해서 이 땅에 긴급하게 도래해야 하는 바로 그러한 일들을 말한다(이 일들이 '새로운 라트레이아'일 것이다).
메시아는 지성소로 "한 번에" 들어가셨는데, 이 "한 번에"는 첫 번째 계약의 "일년에 한 번"과 대조된다. 그리고 그 지성소로의 들어감은 염소나 제물들의 피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통해서였다. 즉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기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속죄일로 읽고 있고, 이는 반대로 말하면 대속죄일의 프레임 없이는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전 해석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메시아의 십자가를 통한 속죄가 곧 "오는시대의 속죄"인데, 이 "아이오니오스"를 일반적인 "아이온"과의 비교 속에서 오는시대로 번역해야 한다. 지금 기자의 논지가 첫 계약과의 '비교'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오는시대라 번역한 희랍어는 아이오니오스로, 이는 유대 전통을 통해 알려진 올람하바의 번역어이다. 그리고 올람하바는 올람하제와의 비교 속에서 그 의미의 틀을 구축하고 있다.
히브리서 5:9,10, 개인번역
그리고 이룬 이는 그이에게 잘 듣는 모든 이들에게
'오는시대'의 온전함의 원인이 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멜키세덱의 질서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공적으로 선언되었다.
만일 위의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을 "영원한 속죄의 원인이 되셨고"라고 번역한다면, '되셨고'에서 또다른 난점을 만나지 않는가? 대체 언제 영원한 원인이 되신 것인가? '되었다'라는 술어 자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 아이오니오스가 비교 층위에서 벗어나 그저 "영원한"으로 번역되면, 신약성경이 가진 역동성을 반감시키게 된다. 기자는 글을 둘로 분할하고, 계약을 둘로 분할하고, 그 분할면 속에서 발생한 새로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데, "영원한"이라는 번역어에서는 그러한 분할에서 비롯된 새로움을 전혀 감지할 수가 없다.
메시아는 오는시대의 속죄를 감지(인식)하셨다. 즉 현 시대의 제도의 한계를 직시하고, 자신을 통해서 그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시간을 가져올 것을 인식하셨다는 말이다. 이는 옛 것과의 단절의 인식이고, 옛 것과의 새로운 연결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다(=지성소로 들어가셨다). 대제사장은 곧 제물이 되고, 이 전복적인 단절을 통해서 성막과 제사장직이 수행하는 라트레이아의 원칙들은 그대로 이어져왔다. 건물 장막은 인간 장막이 되었고, 라트레이아의 원칙은 외부 규범이 아니라 메시아적 인식이 된 것이다. 이때 인식은 중요하다. 일과 자아의 소외가 첫 계약이 해결할 수 없는 한계였다면, 메시아의 십자가가 가져오는 인식의 전환은 곧 자신의 업무와 자신의 양심을 일치시키는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비적인 방식이면서도 일상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제사장이 하는 모든 일상 업무들은 그의 양심을 따른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장막들을 통해서, 이 창조세계에 새로운 라트레이아("좋은 것들")가 금세 도래한다.
이로써 첫 번째 계약에 속한 성막을 규정했던 '코스모스적'이라는 형용사는 여전히 그 의미가 유효하다. 성막이 가진 코스모스적 성격은 소멸되기는 커녕, 오히려 개혁되어, 사륵스적 한계에 짓눌린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의 극복을 시연한다. '지상과 만난 거룩'으로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하늘의 장막'으로 규정하고, 비가시적이면서도 땅의 장막과 대비되는, 그리고 먼 미래에 도래할 것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히브리 기자의 의도를 모조리 놓치고 있다. 장막은 모두 지상에 세워진다. 이점은 옛 장막이나 새 장막이나 마찬가지이다. '장막'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상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말라는 참조점과도 같다. 옛 장막과 새 장막의 차이는 건물이냐, 인간이냐에 있지, 지상에서 기능한다는 점만큼은 동일하다. 따라서 '하늘'은 성소와 지성소의 관계 처럼, '더 깊은 층위'로 이해되어야지, 지상과 별개의 차원, 혹은 현재와 무관한 미래의 차원으로 이해되서는 안된다.
이때 메시아의 속죄에 대한 '인식'은 "오는시대의 숨결"과 연결된다. 즉 메시아와 같은 인식은 성령 그 자체이거나, 성령을 지시하고 있다. 그 숨결은 제사장직으로의 임명(고용)과 더불어 양심과 고용된 업무를 함께 관통하게 하는 실천력이며, 자아와 고용 업무 사이의 간극을 매우고 연결시키는 신이다.
[3]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그이는 새로운 계약의 매개이시다,
그 방식은, 첫 번째 계약 위에서 위반한 이들에게 속하는 구제를 위한 죽음이 있었고,
그때 그 오는시대의 상속에 속하는 부름받았던 이들이 그 알림을 취한 것이다.
즉 계약에 있어서,
그 계약한 자의 죽음이 등록되어야(φέρεσθαι) 하는 필요성이 있다.
즉 계약은 시체상태인 이들에게 확고한데,
이때 계약한 자(ὁ διαθέμενος, middle)가 살아있다면 효력이 전혀 없다.
이러한 이유로 그 첫 번째 (계약)은 피 없이는 결코 새롭게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세에 의해 모든 그 씨알에게 토라를 따라 말된 모든 계명은,
제물들 염소들의 피를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와 함께 취하여
책과 모든 그 씨알에게 뿌렸기 때문이다, 말씀하길,
"이것이 님께서 너희를 향해 명하셨던 계약의 피이다."
그리고 그 장막과 심지어 모든 고용된 일(禮)에 속하는 도구들도 피로 동일하게 뿌렸다.
그리고 대체로 피 안에서 모든 것은 깨끗해진다, 그 토라를 따라,
그리고 피 흘림 없이는 보내버림도 되지 않는다.
[3]
우리는 앞서 '매개'를 '망'개념과 연결시켜 생각해보았다. "그이는 새로운 계약의 매개이다"라고 할 때, 이 계약은 노동 계약이다. 신께 고용되어 제사장 업무를 돌볼 것인지에 대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옳은 일과 합치될 수 없었던, '모르고 지은 죄의 상태(무의식)'가 용서되어야 하고, 스스로 극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용서와 극복의 상태, 즉 계약 노동을 이행하고 있을 때, 그는 새로운 장막으로서 메시아적 라트레이아의 망에 포섭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용서'와 '극복'의 모든 차원에서 메시아는 매개로 기능하는데, 용서에 있어서 매개이신 메시아는 죽음이라는 방식을 수행하셨고, 이로써 고용될 수 없던 이들도 고용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일 뒤에 이뤄진 부활이 그 고용 공고였는데, 이 공고를 보고 제사장직에 지원한 이들이 계약 당사자가 되었다.
그 계약은 고용 계약이자 상속에 관한 계약이다. 16절에 나오는 '계약'을 '유언'으로 읽어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두 뜻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유언으로 읽자는 주장은, 계약과 죽음을 연결시키기 위함이다. 일반적인 계약에 있어서, 계약자가 굳이 죽지 않아도 계약은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게데가 유언한 사람의 죽음으로 읽는 16절에서 죽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다. 따라서 그간의 유언으로 읽던 방식을 재고해봐야 한다.
혹 그간 저 죽는 이를 메시아로 생각했기 때문에, 유언으로 보려는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는 잉여가 발생한 것 아닐까? 혹 메시아는 새로운 계약의 '매개'이고, 저 계약자는 "오는 시대의 상속에 속하는 부름"에 응한 사람들을 가리킨다면 어떨까? 즉 고용 계약 체결에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등록하지 않고는 계약에 참여할 수 없다. 즉 자아가 살고자 하는 이는 계약을 이행할 수 없기에 계약 당사자의 죽음이 등록되어야만 한다. 이 등록을 통해서 계약자는 '시체상태들'이 된다(16절). 즉 그간 유언자로서 메시아의 죽음으로 읽던 것을, 계약에 참여한 이들이 가진 아담성의 죽음으로 읽자는 말이다. 따라서 그러한 시체들에게 계약은 확고하다. 또한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은 마태복음 10:39나 요한복음 12:25와도 공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독법은 18절의 '피'를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계약 당사자에 관련된 피로 보게 한다. 첫 계약에서는 자신이 흘려야 할 피를 제물들에게 전가했다면(레위기 1:4), 메시아를 제물로 삼은 두 번째 계약자들은, 전가가 아닌 자신들의 죽음을 등록함으로 메시아와 같은 방식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메시아가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가 '새로운 계약의 매개'라면, 그 매개를 통해서 계약에 참여한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계약은 피로 성취된다'는 말은 자아의 죽음 없이는 계약 이행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메시아는 제물로서 계약을 이행하셨다면, 그리고 메시아의 그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면, 계약 이행자는 메시아와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위한 매개로서 피를 흘리려는 사람이다. 즉 매개는 매개 아닌 사람을 매개로 만들기 때문에 매개인 것이고, 이 과정 중에 필요한 것이 피인 것이다. 신적 고용으로의 진입, 라트레이아 망으로의 포섭은 바로 그 '피'로서 이뤄진다. 장막인 에클레시아 일원들에게도 메시아의 피는 뿌려졌고, 그들의 고용 업무에도 뿌려졌다.
그리고 피 뿌려진 사람들이, 피 뿌려진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들에게도 피 흘림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이 그들을 그렇게 용서하고 극복하게 했듯이, 우리 역시 타자에 대해서 그러한 방식으로 용서하고 극복하고자 한다. 그가 나와 같은 망 안에 포섭되기 위하여.
히브리서 12:4, 개인번역
너희들이 맞서면서도, 피까지는 그 비뚤어짐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
또한 "명하셨다"라고 번역된 엔텔로마이(εντελλοομαι)는 "임명하다", "권한을 부여하다"의 의미이다. 즉 내가 알아서 선택할 수 있는 영역(εν)을 지정해주었다는 말이다. 즉 무조건 따르면 된다가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여 자기 규범화할 것을 요청하는 단어이다. 다시 말해, 제사장에 걸맞는 생각과 실천을 본인 스스로 규명해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위의 인용은 출애굽기 24:8의 LXX인용인데, 거기서는 엔텔로마이가 아니라 디에떼토(διεθετο)를 사용한다(히브리 기자가 의도를 가지고 바꿨음을 알 수 있다). '언약 체결하다'인데, 이로서 언약 체결은 신의 말씀을 자기 규범화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말장난을 하자면, "율법 조문을 의지하는 것은 의지가 결여된 것"이므로, 율법 조문 없이도 율법을 이룰 수 있는 자기 규범화의 의지를 가지라는 말이기도 하겠다.
[4]
그러므로 한편으로 바로 이 하늘들 안에 속하는 '표현들(ὑπόδειγμα)'은 깨끗게 될 필연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곁하늘들 자체들은 더 좋은 제사들 곁에서 깨끗게 될 필연성이 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손으로 지은 거룩한 것들 속으로 들어가신게 아니라,
(그것들은 참된 것들의 '반대 찍힘들'이다)
오히려 바로 그 하늘 자체 속으로,
지금 우리를 위해 님의 면전에 드러나시기 위해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번 그 자신을 앞에 가져가시기 위함이 아니다,
마치 대제사장이 그 거룩한 것들 속으로 해마다 이질적인 피 안에서 들어가는 것 마냥 (말이다),
이때 그 자신은 창조세계 설립에서부터 여러 번 겪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단번에 시대들의 끝에
비뚤어짐의 폐지 속으로 그이의 희생을 통해 나타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단번에 죽는 것(ἅπαξ ἀποθανεῖν)이 놓인 것을 따라,
이것과 '함께' 심판이 있다.
이처럼 메시아도, 여러 비뚤어짐들을 위로/다시 가져가기 위해
단번에 앞으로 드려지셨는데,
두 번째로부터, 비뚤어짐 없이,
온전함 속으로 그이를 받아들인 이들에게 목격되실 것이다.
[4]
본문의 '깨끗게 되다'의 의미를 규정하려는 방향에서 본문을 보는 것이, 전반적인 해석을 해나가는데 지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깨끗게 됨은 첫 번째 계약에서 말하는 정결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계약과의 비교 속에서 비슷하면서도 넘어서는 면을 가진 깨끗이기 때문이다(첫 계약에 속하는 정결 의식에 대한 언급과 텍스트 내적으로 관련될 것이다).
기자는 깨끗게 되어야 하는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한다. 먼저는 하늘들 안에 있는 '표현들'이다. 이 '표현들'은 '하늘들'과 병행한다. 즉 표현들은 하늘들 옆에 던져져서, 하늘들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들이다. 즉 '파라볼레'를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 히브리 기자가 직면한 문제는, 이 표현들을 실체라고 그릇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들의 '깨끗게 됨'은 유대 율법의 새로운 기능을 제시하고, 메시아 안에서 율법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는 율법을 폐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 틀잡음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재해석하는 것이다.
또 깨끗해져야 할 것은, "곁하늘 자체들(αὐτὰ δὲ τὰ ἐπουράνια)"이다. 히브리서를 연구하면서, 평소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몇 가지 해결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왜 신약성경은 '하늘(ουρανος)'과 '곁하늘(επουρανος)'을 구분하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히브리서 안에서만 살펴보면,
히브리서 3:1, 개인번역
여기서부터, 거룩한 형제들이여,
곁하늘 부르심의 참여자들이여!
히브리서 6:4,5, 개인번역
왜냐하면 한 번 밝혀진 이들,
즉 곁하늘의 선물을 맛 본 이들,
즉 거룩한 숨결에 함께 갖게/참여하게/엮이게 된 이들,
온전한 하나님의 이야기의 능력을 맛 본 이들,
즉 오는시대의 도래한 이들,
히브리서 9:5, 개인번역
곁하늘들의 예와 그림자로서 섬기는 누구에게든지,
장막을 막 이루려는 모세가 지시를 받았던 것처럼, 그분이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1:16, 개인번역
그런데 지금 그들은 더 좋은 것을 '잡으려 몸내밉니다(ὀρέγομαι)'. 이것이 곁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 옆에 에피가 붙은 것은, 지상과의 접점을 의미한다. 즉 하늘과 지상의 접점. 오늘 본문으로는 더 좋은 장막, 곧 인간이다. 새롭게 창조된 인간의 차원이 지상과 맞닿는 곁하늘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3:1은 그들을 "곁하늘로 불렀다"고 말하고, 6장에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을 "곁하늘의 선물"이라 말하며, 9장에서는 성막에서 섬기던 모세 시대 사람들을 "곁하늘들의 예와 그림자"라 부른다. 그리고 11:16에서 이 땅에서 더 좋은 것을 잡으려 몸 내미는 그 사람이 곧 곁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따라서 두 번째 깨끗하게 되어야 할 대상은 바로 곁하늘들 자체, 히브리서 독자들이다. 그들이 메시아 예수의 피흘리심 곁에서 깨끗하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깨끗하게 되어야만 하는 독자들은 표현들을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 독자들이다. 기자는 표현들을 깨끗게(재해석)함으로, 사람들을 깨끗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표현들을 실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틀잡힌 첫 번째 계약의 내용들은 카이로스를 둘러싼,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들이지만, '반대찍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이 '반대찍힘들'로 들어가신 게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하늘 자체 속으로(이때는 '곁하늘'이 아니다),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하늘과 곁하늘을 연결하시기 위한 매개의 사명이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또는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드러나신다.
26절에 대해서도 오역 가능성을 지적하고 싶다. 창조세계 설립 때부터 여러 차례 겪어야만 했던 그 자신은, 첫 번째 계약에 속한 대제사장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저 "겪어야만 했다"라고 번역한 동사는 '가정'이 아니라 과거의 반복적 사건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성소 안으로 자신이 양심에 걸맞지 않은 이질적인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반복하던 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반전은 26절이 아니라, 26절 한 가운데서 벌어진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고 "시대들의 끝에"에서 끝은 쉰텔레이아(συντελεια) 인데, 목적어로 행위가 온다면 그 행위가 이뤄지던 시간의 끝, 시간이 온다면 그 기간의 끝을 의미한다. 즉 '쉰'이라는 접두어는 시간과 연결되고, 텔레이아는 그 시간의 종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간적인 끝이라는 의미를 담아 "세상 끝"이라는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같은 시간관을 사도들도 공유하고 있음을 베드로전서 1:20, 고린도전서 10:11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메시아는 토라를 폐지하지 않았다. 비뚤어짐을 폐지하셨고, 그 폐지 방식은 곧 자신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이 비뚤어짐에 속한 시대들을 종결지었던 것이다.
메시아의 단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진 "단번에"라는 말은 사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은 죽고 이 죽음은 심판과 함께 있다. 이때 전치사 메타(μετα)를 '함께'가 아닌 '이후'로 번역함으로써 마치 심판을 죽음 이후 벌어지는 사후세계처럼 번역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메시아의 죽음은 그 자체로 심판이었다. 우리의 죽음도 그 자체로 심판일 것이다. 다만 이미 결정된 죽음이자 심판인 우리 시간의 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만이 중요한 것이다. 메시아는 자신의 죽음/심판을 비뚤어짐들을 처리하기 위해 사용하셨다. 그렇다면 메시아의 죽음을 모방하려는 인식을 갖게된 제사장들도, 자신의 죽음을 그와 같이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일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단번에 죽는 것"을 현실로 끌어와서, 마치 죽음 이후를 사는 사람처럼 현실을 살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은 시체상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또 하늘가에 산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바로 이들이야 말로 두 번째 계약에 속하는 이들이라 생각한다(28절의 두 번째를 계약이 아닌 재림으로 읽는 정당성이 있는가?). 저 "비뚤어짐 없이"는 바로 뒤에 나오는 "온전함 속으로 그이를 받아들인 이들"을 수식해야 하지 않는가? 그간 저 비뚤어짐 없이를 메시아에게만 연결지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비뚤어짐의 여지를 남기겠다는 타협의 소산은 아닐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두 번째 계약 안에서 이미 자신의 죽음을 등록한 이들에게, 비뚤어짐 앞에서 시체상태처럼 살며, 온전함 속으로 살기 위해 메시아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메시아는 언제든 목격되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오늘 다시 읽은 히브리서 9장은 바울의 목소리와도 공명하지 않는가?
로마서 6:10~12, 개인번역
그이의 죽으심은 비뚤어짐에 대하여 '단번에(ἐφάπαξ)'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비뚤어짐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νεκροὺς)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들로 산정하십시오,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 있는 동사는 아펙덱소마이(ἀπεκδέχομαι)인데, "기다리다"로 대개 번역된다. 그러나 단순 기다림이 아닐 뿐더러(슈라이너도 신약성경 안에서 무조건 종말론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당단어를 파자한다면 απο + εκ + δεχομαι가 되고, '영접하다(δεχομαι)'에 부가적인 의미가 덧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영접한 그 사건으로부터'의 의미일텐데, 이걸 '기다리다'라고만 번역하면, 영접한 현실에 대한 중요성이 희석되지 않겠나. 히브리 기자는 온통 메시아를 통한 현실 분할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펙덱소마이의 종말론적 의미f란 '메시아를 영접한 그 순간부터(εκ) 시작되는(απο) 온전하신 인격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 이 단어는 우리가 8장에서 살펴봤던 '망(net) 이론'에 대한 추가 근거가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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