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히브리서 6:1~20
[1]
그러므로 메시아의 아르케의 말씀을 떠나서 끝적인 것에로 우리 자신들을 나르자,
시체상태의 일들로부터의 생각바꿈의 기초를 다시 아래던지는 우리이지 않도록
그 생각바꿈은
하나님에게의 충(신)실함의,
침례들의 가르침의,
손들을 위에 얹음의,
시체 상태들의 다시 일어남의,
그리고 오는시대의 심판의 생각바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심판)을 행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돌아보신다면.
[2]
왜냐하면 한 번 밝혀진 이들,
즉 하늘의 선물을 맛 본 이들,
즉 거룩한 숨결에 함께 갖게/참여하게/엮이게 1 된 이들,
온전한 하나님의 이야기의 능력을 맛 본 이들,
즉 오는시대의 도래한 이들,
그리고 이들이 타락하면,
다시 생각바꿈으로 위로부터 깨끗해질 수 없는데,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매달고
스스로가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3]
왜냐하면 땅이 그 위에 오는 비를 자주 마시고,
그들 자신에게 잘 나온 채소를 내고
(그들 자신을 통해 땅이 갈리는데),
그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잘한 말을 함께 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시들과 엉겅퀴들을 내는 땅은 입증되지 못하고 금세 저주에 속하는데,
그 저주는 그 끝이 불사름 속으로.
[4]
그런데 당신들에 관하여 우리는 설득/확신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더 좋은 것들 곧 온전함에 붙어있는 것들에 관하여,
우리가 위와 같이 말한다 할지라도.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분은 그 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시는데,
그 사랑 안에서 당신들이 그이의 그 이름 속으로 드러났다,
거룩한 이들을 섬겼고 섬기는 당신들이.
[5]
그런데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당신들 각각이 바로 그 열심을 끝들까지
소망으로 넘치는 확신(πλεροφορια)을 향해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여러분들이 느린 이들이 되지 않으려 함이며,
반대로 신실함과 긴 호흡을 통해서 알림들을 상속받는
모방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6]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알리셨을 때,
더 큰 누군가를 따라 맹세하지 못했고,
그 자신을 따라 맹세하셨기 때문이다, 말씀하시길,
"만일 실로 내가 너를 잘 말하며 잘 말할 것이고
실로 너를 넘치게 하며 넘치게 한다면."
그리고 그는 그토록 긴 호흡으로 견디며 그 알림에 부딪쳤다.
[7]
왜냐하면 더 큰 것을 따라 사람들이 맹세하며,
그들에게 있는 맞서는 말들의 모든 안정에 이르는 경계는 바로 맹세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더욱 과도하게 하나님은 상속자들에게 그 알림을 드러내시길 원하셨기에,
그의 원함의 변치 않음을 맹세로 중재하셨다,
이는 변치 않는 두 가지 문제들을 통해,
(이 문제들 안에서 하나님은 거짓말할 수 없는데)
앞에 놓인 소망을 틀어 쥐려고 달아나는 우리가
강한 파라클레시스를 갖게 하기 위함이다.
프쉬케의 닻과 같은 그 소망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 소망은) 확고하고 안정적이며 그 막(휘장)의 안쪽으로 들어감이니,
거기를 우리를 대신해서 선두주자로 예수께서 들어가셨다,
멜키세덱의 그 질서를 따라 대제사장이 그 시대에 이르도록 되시며.
[1] 아르케를 떠나 완전함으로, 심판의 행함도.
개역한글이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찌니라"라고 번역하고 2절에 배치한 문장이, 원문에서는 긴문장 전체를 이끄는 주절이다. 사용된 단어들이 이런 저런 생각을 준다. 눈에 가장 밟히는 단어는 '아페미(αφιημι)'. "떠나보내다, 보내버리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본문의 "떠나서"가 아페미의 번역어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용서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즉 용서는 잘못을 떠나보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떠나 보내버리는 것은 용서의 최종 단계이지 용서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에서 잘못의 인정과 화해가 벌어지지 않고서 아페미를 용서로 여긴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피해자를 더욱 괴롭게 하는 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아르케의 말씀"은 필요하지만, 그 필요는 지향점으로서가 아니라 출발지로서의 필요이다. 출발지를 지났으면 '텔레이오테타'로 스스로를 날라야한다. '완성', '끝', '이룸'과 관련된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텔레이오테타가 무엇일까? 시체상태의 일들을 벗어나 생각바꿈의 기초를 놓는 것은 믿지 '않는' 이들의 지향이 되어야지, 이미 믿은 이들의 지향이 되어선 안된다. 그런데 어쩌면 텔레오테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줄곧 시체상태의 일들로 벗어났다가 다시 시체상태로 돌아오는 반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집을 지을 때, 한 번 기초를 놓았다가 다시 기초를 놓는다면, 그것은 망한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하고, 인력과 경비는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들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1) 신께 신실해야 한다는 것, 2) 세례를 통해 공동체에 입문한다는 것, 3) 손을 얹는 안수(성령받음의 표지), 4) 부활, 5) 이미 시작된 오는시대의 심판에 대한 고찰로 다시 돌아가선 안된다. 떠나야 한다. 떠난다는 말은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회의하지 않는다는 말, 확고함을 말한다.
아르케의 말씀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확고한 생각은 시체상태의 일들에서 벗어난 뒤 갖게 된 "바뀐생각"이다. 그런데 만일 이 바뀐생각으로 살다가, 다시금 시체상태로 돌아가는 이가 있다면, 공동체는 그를 심판/판단할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
-시체상태
'시체상태'라 번역한 단어는 '네크로스(νεκροs)'인데, 이 단어를 실제 생물학적 죽음과 혼동해선 안된다. 이 단어는 시체와 같은 '상태'에 초첨을 맞추기 때문이다. 시체상태의 일들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았다. 다만 그의 일은 시체와 같다. 생명과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네크로스'를 실제 죽음으로만 이해하면, 로마서 8:10,11 같은 본문을 오해할 수 밖에 없다.
로마서 8:10,11 개역한글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A)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A) 가운데서(로부터)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A)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B) 몸도 살리시리라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이 본문은 죽는 몸은 중요하지 않고 영은 중요한 것이라는 영육이원론으로 읽히는 본문인가? 여기서 (A)로 표시한 죽음은 네크로스, 즉 시체와 같은 상태, 생명력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인하여'로 번역된 '디아'라는 전치사는 '통하여(through)'로 번역할 수 있다. 즉 몸은 죄를 통해서는 죽은 상태인 것이다. 즉 본문은 '죄에 반응하지 않는 몸'을 말하고 있다. 긍정적인 말이다. 그런데 (B)라고 표기한, 뒤에 나오는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의 "죽을"은 '쓰네타(θνητα)'라는 다른 단어를 쓴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 위의 본문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 몸이 비뚤어짐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가 메시아가 안에 계신 상태이다. 그리고 이 상태는 분명 몸을 필요로 한다. 영육이원론이 아니라, 메시아와의 연대는 몸 자체가 죄에 반응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주지시키는 본문인 것이다. 물론 예수가 시체 상태같은 사람들로부터 일으켜진 것은, 부활의 특정 시점을 의미한다(마태복음 17:9). 그러나 그의 부활은 실제 죽음을 이긴 것임과 동시에, 시체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삶다운 삶이 마침내 일어난 순간과 연결된다. 이는 계시록 20장의 첫째부활과 상동한다. 이렇듯 '네크로스'와 '삶'의 대조는 실제 유기체의 생존과 죽음이 아닌 '어디에 반응하는 삶을 살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죄에 반응할 것인가, 영에 반응할 것인가의 문제.
[2] 타락한 자들에 대한 심판
4절부터 6절까지가 두 번째 문장을 이루고 있다. 두 번째 문장의 핵심은 한 가운데 위치한 단어에 있다. ‘파라페손타스’, 이 단어를 기점으로 두번째 문장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전환된다. 메시아의 빛으로 밝혀졌고, 그 거저 주시는 하늘의 선물을 감각적으로 경험했으며(맛보다), 거룩한 숨결과 함께 존재의 변화를 이루게 된 사람들, 다시 말해 현시대 속으로 새로운 시대를 가져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파라페손타스일 경우, 그들은 생각바꿈을 통한 깨끗함에서 배제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매단 변절자이며, 스스로가 그 변절자의 예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절자에 대한 심판은 확고한 것이다. 이것을 다시 검토하러 돌아갈 이유가 없다.
예레미야 2:2,3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말씀 속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은 두 가지 차원을 갖고 있었다. 먼저는 광야에서 신을 따랐던 이스라엘로서, 소년때의 신의, 결혼 때의 사랑, 신의 첫 열매로 표현된다. 그들을 해하려는 세력들로부터 신은 그들을 재앙으로 보호한다. 그런데 5절에 가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소년, 신부, 첫 열매로 표현되지 않고, ‘열조(조상)’이 된다. 그 열조는 불의함, 신을 멀리함, 허탄한 것을 따름, 헛되이 행함으로 표상된다. 즉 이스라엘은 젊은 날에는 하나님을 따르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예레미야에서 ‘열조’에 해당하는 이스라엘, 불의의 예로서 이스라엘로 인용된다. 즉 신과 함께 하는 순간들이 젊음으로 표상되고, 신을 떠났을 때의 시간이 늙음으로 표상되며, 신은 인간을 소년으로, 신부로, 첫열매로, 즉 젊음을 ‘유지(희랍어, 쏘조)’시켜주는 분인 것이다.
히브리서 6장의 두 번째 문장은, 이 젊음에서 늙음으로의 전락을 말하고 있다. 그 전락은 신자의 확고함을 허물어 버리고, 다시 생각바꿈의 기초를 던져야 할 위기를 가져온다. 젊음과 늙음의 차이는 생각에 있다. 젊은이의 생각을 버리는 순간 늙은이가 되며, 늙었다가 젊었던 사람이 다시 늙게 되면, 그에게는 다시 생각을 새롭게 할 기회가 주어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 젊음을 자신의 과거로 규정하고 그 새로움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움은 새로울 것이 없게 된다. 그에게 더 이상 빛은 빛이 아니고, 선물은 선물이 아니며, 오는시대는 도래할 필요가 없게 된다. 즉 파라페손타스의 상태는 ‘배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 땅의 희망으로 살기를 스스로 거절하는 상태이다. 즉 다시 시체가 된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2장의 흔히 ‘성령 모독죄’로 알려진 본문과도 공명한다. 인자에 대한 모독은 지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인자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인자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얻을 기회가 있다. 인자를 모독하고 거절하더라고, 인자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 방식에 대한 거절은 인자를 영원히 모르게 한다. 따라서 성령에 대한 거절은 스스로 인식을 전환하지 않으려는 고집을 의미한다. 그 고집이 스스로를 인자로부터 단절시킨다. 즉 성령 모독죄는 곧 예수 공동체 밖에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통념을 고집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곧 스스로 용서받기를 거절한 죄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6:4의 페리손타스는 더욱 상황이 심각하다. 그는 자신의 통념을 고집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메시아에 관하여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근거가 되어, 메시아를 거절한다. 그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었다. 메시아가 기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본보기 말이다.
우리는 앞선 5장에서 고의로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구분했고, 속죄제사는 모르고 지은 죄에만 해당한다고 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29도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 고의로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 사이에는 변증법이 작용하고 있다. 당신의 죄가 고의가 될 때는 언제인가, 또 당신의 죄가 모르고 지은 죄가 될 때는 언제인가? 그 죄에 대한 진실한 생각바꿈이 있을 때, 당신은 그 죄가 얼마나 추악했는지 몰랐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고, 그 고백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자신과 신의 평가가 될 것이다. 즉 생각바꿈은 인간의 죄를 모르고 지은 죄로 규정할 수 있게 한다. 예수를 창으로 찌른 군병이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행위를 모르고 지은 죄로 규정할 것이다.
문제는 저 ‘생각바꿈’이 인간 스스로 해야하면서도 그럴 수 없다는 역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생각바꿈은 곧 생각바뀜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두 가지 표현양식이다. 생각바꿈은 과학 법칙처럼 특정 조건이 만족되면 발생하는 결과가 아니다. 인격과 인격의 조우이고, 이때는 정말 답이 없다. 어떤 개념으로 저 사건을 포착하겠는가? 신은 자신의 결정으로 누군가는 진노의 그릇으로, 누군가는 긍휼의 그릇으로 삼았다. 긍휼의 그릇에게는 생각바꿈이 있다. 이 생각바꿈의 차등에 대해서 묻는 이에게 바울이 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여! 어찌 하나님을 불공정하다 하는가!’라는 힐난이었다. 생각바꿈의 현실은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의 차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이고, 이 아르케를 가지고 다른 이들과의 비교 속에서 정체성의 우월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는 남들과 비교할 만한 고난의 이유를 아는게 아니라, 고난의 극복이라는 새로운 현실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생각바꿈은 아르케이다. 내가 바꾸었으나, 내가 바꾸었다 말할 수 없는 시작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떠날 것을 요구한다. 시작은 더 이상 그 시작에 매달릴 필요가 없을 때야만이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 불편한 본문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당신이 생각을 바꾼 사람이라면, 이제 그 생각을 보내버리라는 것이다. 내가 정말 오는시대의 사람인지 아닌지 걱정하며 오는시대의 사람인지의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저 그 바뀐 생각으로 행할 뿐이다.
[3] 저주 : 복으로부터 스스로 갈라져나감
'복'은 원문으로 '에우로기아'인데, 에우로기아는 '좋음(에우)'과 '말, 질서(로기아)'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 희랍 문헌에서 로기아는 신탁을 의미한다. 신탁, 즉 신이 부여한 질서, 신이 전한 말과 합할 때, 그것을 복이라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바라크 동사를 쓰는데 바라크는 '무릎꿇다'를 기본뜻으로 갖고 있다. 신적인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 좋은 게 복인 것이다. 또한 신탁은 복과 저주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신탁에 있어서 '에우'하다면 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인 것이다. 복과 저주 사이에, 복도 아니고 저주도 아닌 것은 없다. 신탁은 그런 잔여를 남기지 않기에 '신'탁인 것이다.
앞에서 타락을 언급한 히브리 기자는 두 개의 땅을 비유로 든다. 하나는 복의 땅이다. 그 땅은 비를 마시기에 양질의 채소를 낸다. 비슷 마시고 좋은 채소를 내는 이 순환 자체가 '복'인 것이다. 그런데 그 결실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갈라내야 한다. 비를 마시고, 결실을 내기 위해 자신을 갈라냄. 그 갈라냄 속에서 나오는 좋음. 그리고 그 반대는 저주의 땅이다. 저주의 땅도 자신을 갈라내나 그간 받아먹은 빗물이 무색하게 가시들과 엉겅퀴들을 낼 뿐이다. 그 끝은 불사름이다. 이때 '끝'은 미래를 의미하지 않는다. 끝은 미래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까지의 과거가 끝나는 지점이며, 그 지점은 곧 현재다.
[4], [5] 저주의 메시지를 말하는 의도는?
기자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이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오히려 독자는 "더 좋은 것들 곧 온전함에 붙어있는 것들에 관하여" 기자의 확신을 얻고 있는 사람들이다. 불의하지 않은 하나님은 그들이 사랑 안에서 했던 일들, 그래서 메시아의 이름이 드러났던 일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위와 같이 말"한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그 의도는 불안에 빠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넘치는 확신'을 주기 위함이다. 넘치는 확신의 반댓말은 느림(νωθρός)이다. 느림은 '끝에 도달하지 못함'이고, 그 끝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끝에 도달함, 즉 현재를 살게 하는 동력이 넘치는 확신에 있으며, 채우고도 남는 그 확신의 잉여가 속도를 붙게 하는 것이다.
'느림'은 이미 5:11에서 언급된 바 있다.
히브리서 5:11, 개인번역
그(멜기세덱)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이 많지만, 말씀하는 것을 해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듣는 것들에 느리기 때문이다.
신실함과 긴 호흡이 함께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신실함은 계약에 충실함이고, 그 충실함에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 긴호흡은 흔히 '인내'로 번역된다. 즉 [4], [5] 문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타락한 자에 대한 심판'에 대해 말한 것은, 오히려 타락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 넘치는 확신을 주고자 함이고, 이 넘치는 확신이 인내로 신실한 현실을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문장의 희랍 문장은 아래와 같다.
μιμηταὶ δὲ τῶν διὰ πίστεως καὶ μακροθυμίας κληρονομούντων τὰς ἐπαγγελίας.
신실함과 긴 호흡은 방법, 과정을 의미하는 전치사 '디아'와 연결되어 있다. 즉 신실함과 긴 호흡의 과정은 알림들을 상속받는 모방자들이 되게 한다. '알림들을 상속받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들을 모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들은 앞서간 또 뒤에 나타날 거룩한 성도들일 것이고, 그들은 "알림들이 지시하고 있는, 새로운 현실의 상속자들"이다.
[6] 긴 호흡으로 알림에 충돌하는 아브라함의 예
복, 알림, 신실함, 긴 호흡의 구체적인 범례로서 아브라함이 인용된다. 신은 그에게 자신을 걸어 알렸고, 그 알림의 내용은 복이었으며, 그 복의 알림과 아브라함과의 조우에는 '긴 호흡으로의 견딤'이 있었다.
[7] 신적 맹세와 예수
왜 일곱번째 문장의 시작이 '왜냐하면'인가?
말의 확신을 얻기 위해, 그 말과 함께 더 큰 대상들을 가져오다보면, 그 끝은 맹세가 된다. 즉 말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한게 아니라, 말 자체의 확언을 통해 말의 확실성을 담보하게 된다.
하나님도 이러한 맹세를 통해 자신의 알림을 확언하시는데, 하나님의 맹세는 인간적인 맹세보다 더 과도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가장 크신 분인데, 그 가장 크신 분이 말 자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메시테우오(μεσιτεύω, 중재, 보증)는 신이 말이 되심으로 이뤄진다.
'알림'과 '맹세'라는 두 가지 말에 관련된 사안(문제)에, 하나님께서 걸쳐 계시기 때문에, 이 알림과 맹세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른 말을 하실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알림과 맹세로 자신을 제약하시는 과도함을 보이시는 이유는, 드러냄(영광) 때문이고, 그 드러냄은 현시대로부터 달아나 앞에 놓인 소망을 틀어쥐려고 '달아나는 우리가' 더 강한 위로를 얻게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소망을 틀어쥐었는가? 그러나 신자도 소망을 틀어쥐지 않았다. 소망은 틀어쥐려고 다가가지만, 틀어쥐었다고 생각했을 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다고, 다시 틀어쥐기 위해 달아날 것을 요구한다. 마치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의 대상a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상a와는 다른 점이 있다. 대상a가 텅빈 주인 기표를 얻고자 달려가는 자아의 욕망을 가리킨다면, 히브리서 6장의 소망의 기표는 비어있지 않다. 소망은 휘장 안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고, 휘장 안쪽에는 메시아 예수가 '이미' 들어가계신다.
- 동류(1:9), 신체 구성(2: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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