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론적 논증
  존재론적 논증과 달리, 우주론적 논증은 무언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제 1원인이나 충분한 설명이 있음을 추론하고서 주장합니다. 우주론적 논증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요. 중세에 와서는 이슬람,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사상가들에 의해 발전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븐 시나, 알 가잘리, 이븐 루시드, 마이모니데스, 안셀름, 아퀴나스, 스코투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버클리, 로크, 라이프니츠를 들 수 있습니다. 우주론적 논증은 다른 논증들과 엮여있는데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유형. 알가잘리
  기독교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영원한 우주를 반박하기 위해 '칼람 우주론적 논증(Kalam cosmological argument)'을 고안했습니다. 그리고 이 칼람 우주론적 논증은 중세의 이슬람 신학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논증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알 가잘리(1058-1111)의 주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는 논증했습니다.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그 시작을 위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 이 첫번째 전제를 가지고 생각하면,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그 시작을 위한 원인을 갖게 됩니다. 가잘리는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시간 안에서의 어떤 순간에 존재하기를 시작한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그러나 존재 이전에 모든 순간들은 비슷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무언가가 존재하도록 결정한 원인이 틀림없이 있을 것인데, 그 원인은 존재 이전도 아니고 존재 이후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존재하게 된 어떤 것은 분명히 한 원인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두번째 전제는 '세계나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했다'입니다. 이 전제를 가지고 가잘리는 시간 속에서는 사건들이 영원히 과거로 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일련의 과거 사건들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결론을 위한 몇 까지 추론을 제시했습니다. 먼저는 일련의 과거 사건들은 현실 안에서 끝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한은 결코 끝이 없습니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이 현재 안에서 끝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다른 방향으로만(미래로만) 여전히 무한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시작점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가잘리는 만일 과거 사건들의 무한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현재로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한'은 오늘에 도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지금 우리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어리석은 것으로 판명됩니다.


  두번째로, 만일 과거 사건들의 숫자가 무한하다면, 그것은 다른 크기들의 무한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보세요. 쥬피터는 12년에 한 번 그 궤도를 완주하고, 새턴이 30년에 한 번 완주합니다. 3만 6000년에 한 번 그 별들이 같은 원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만일 우주가 영원하고, 이러한 행성들이 영원으로부터 궤도를 돌기 시작했다면, 그때 각각의 별들의 몸들은 무한한 숫자의 궤도를 돌았어야 하고, 한 행성은 많은 괘도들보다 그의 두배, 그보다 수천배 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말이 안됩니다.

  최종적으로, 만일 우리가 이러한 행성들 중 단지 하나에 의해 완주된 궤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 별이 완주한 궤도의 숫자가 홀수인가요, 짝수인가요?' 아마도 답은 짝수거나 홀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겠지요. 그런데 '무한'을 홀수이거나 짝수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러한 추론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주는 하나의 시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시작에는 하나의 원인이 있음에 틀림없고, 가잘리는 이것을 하나님, 즉 영원하신 한 분과 동일시 합니다.

두번째 유형.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주론적 주장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원인들이 과거로 무한히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초에 있었던 단 하나의 원인을 찾습니다. 시간의 감각에서가 아니라, 위계와 근원에 대한 감각으로 말입니다. 비록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이러한 류의 추론을 고안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는 다섯가지 방식으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우리는 그의 처음 세 가지 방법들에 대해서 살펴볼 것인데, 그것들은 '최초 원인' 논증의 각기 다른 버전들입니다.

  첫번째 방식은 운동에 기초하여 "부동의 동자"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운동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운동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 다른 어떤가에 의해 운동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물은 운동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스스로 실제화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몇몇 다른 것은 그것을 운동하도록 야기시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또한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무언가는 또 다른 무언가에 의해 운동합니다. 지금도 일련의 사물들은 다든 것에 의해 운동하게 되지만, 결코 무한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중간다리가 되는 원인은, 그 스스로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최초 원인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퀴나스가 말하는 원인들이 모든 움직임이 동시에 벌어지는 기어뭉치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넘어지는 도미노처럼 연속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첫번째 원인을 제거해버린다면, 당신에게 남는 모든 것은 힘없는 도구적 원인들 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러한 원인들의 무한을 소유한다면 문제될 것은 아니겠지만, 어찌되었든 그것들(원인들)은 여전히 어떤 것도 야기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계는 가령 무한한 숫자의 기어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태엽을 감아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합니다. 기타는 가령 무한한 숫자의 차량들을 매달고 있다하더라도 엔진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퀴나스는 모든 일련이 원인들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초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스스로 움직이는 사물들도(예컨데 사람들, 동물들, 식물들), 개별적인 영혼의 측면에서는 모두가 '부동의 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혼들 그 자체로는 존재하게 되고, 돌아가게 되므로, 천상의 영원한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주적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절대적인 부동의 동자를 묘사해야 합니다. 모든 움직임의 그 최초 원인,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라 주장했습니다.

  두번째 방식은 최초 원인의 존재를 세계 속에 있는 원인에 기초하여 증명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원인들이 순서대로 질서 잡혀있다는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지금 스스로 원인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려면 스스로가 그 자체로 존재를 부여해야만 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인됨을 받는 모든 것은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만 야기됩니다. 아퀴나스는 여기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원인적 계기들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첫번 방식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그 원인이 존재의 원인이었지,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물체의 존재는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계기들에 의존해있습니다. 각각은 차례로 다른 계기들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계기들은 앞에서 말했던 이유 때문에 무한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것들의 존재에 대한 최초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원인됨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세번째 방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에 대한 증명입니다, 불확실한 존재들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세계 속에 있는 것들은 그것의 존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즉, 이러한 있는 것들은 존재해야만 하는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이 있게 된 것을 보고 있고, 또 죽는 것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들이 필요하다면, 그것들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있는 것들은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것이 단지 불확실하다면, 그때 시간의 어떤 지점에서 모든 것들은 존재하기를 멈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퀴나스는 여기서 세상에서 과거가 무한하다고 가정해봅니다. 그리고 무한한 시간 속에서 모든 가능성들은 현실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것들이(물질 그 자체를 포함하여) 단지 불완전한 존재라면, 그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지금 존재할 수 없다면, 무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아무 것도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오류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하는 것이 불확실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몇몇 있는 것이나 있는 것들은 틀림없이 필요합니다. 실로 아퀴나스는 많은 필요한 존재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천상의 몸들, 천사들, 심지어 물질 그 자체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러한 필요한 존재들이, 그들의 필요성을 얻었나? - 그들 자신으로부터? 아니면 다른데서?" 토마스는 여기서 사물의 본질과 존재를 구분합니다. 사물의 본질은 그것의 속성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일련의 속성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본질은 "이성적 동물성"입니다. 만일 어떤 것이 그 속성들 중에서 부족하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반면, 사물의 존재는 그것의 있음입니다. 지금 만일 있는 것이 그 자체로 필요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 본질이 본재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존재에 속성이 속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천사의 속성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 천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모른채로. 그것의 본질은 존재로부터 떨어져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떠한 것이 존재하려면, 다른 어떤 것이 그것의 존재의 실천으로서 본질에 연합해야 합니다. 그떄 그것은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존재를 얻게 된 필요한 존재들의 무한한 과거로의 퇴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이러한 추론은 무한한 과거 퇴행에 맞서는 첫번째 추론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첫번째 존재가 있어야만합니다. 완벽하게 그 자체로 필요한. 이러한 존재 안에서 본질과 존재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몇몇 신비한 방식으로 속성이 곧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아퀴나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인 본이십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존재. 그리고 존재에 본질이 포함되지 않은 모든 존재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세번째 유형.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의 우주론적 논쟁은 독일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츠(1646-1716)에 의해 고안된 것인데 이것은 토마스 지지자들의 우주론적 논쟁과 종종 혼동됩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한 기인되지 않은 원인'의 존재를 논증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서 명확해질 것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즉시 요구되어야 하는 첫 질문은, "왜 아무 것도 없기 보다는 뭔가가 있느냐?"는 것이다."라 말했습니다. 즉 왜 뭔가가 실로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이 있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충분한 이유 없이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충분한 이유 원리'는, 사건의 상태나 존재에 대해서 반드시 이유 혹은 합리적 설명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 우주는 존재할까요? 이유는 우주라는 하나의 사물안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은 불완전한 것이고, 존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사물에 선재(先在)하는 원인에서 발견되는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주의 과거 상태에 불과하고, 왜 우주가 그러한 상태였는지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주 뿐만 아니라 모든 게 마찬가지죠. 라이프니츠는 우리에게 일련의 기하학 책들이 영원으로부터 복사되었다고 상상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과거 상태들에 관해서도 참입니다. 즉 이러한 것들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영원한 우주의 존재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벌써 발견했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무한한 퇴행은 여전히 왜 그러한 책들이 있는지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주 존재의 이유는 우주 밖에서 발견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설명을 가진 존재여야 합니다. 즉 스스로 존재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가지고 있고, 우주에 대한 설명도 또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하나님입니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며, 그러한 그를 참고하는 것만으로도 설명됩니다. 즉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증명은 명백히 토마스 아퀴나스적 주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즉 거기에는 과거로의 영원한 퇴행에 반박하기 위한 본질과 존재에 대한 어떠한 구분도 없습니다. 실로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에 대한 한 원인을 찾지 않았고,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를 찾았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이것을 혼란스러워 하고, 스스로 원인이 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 개념을 떠올립니다. 아퀴나스도 이것을 변호하지 않았고, 라이프니츠도 이것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주론적 논증에는 다양한 버전들이 있고, 이것은 명료한 구분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한 버전의 반대들이 다른 버전에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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