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0.

 

  어제는 저녁 7시에 잠들어서 다음 날 7시에 일어났다. 몸에 큰 무리가 있는 것도, 정신에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누워있다, 깨다를 반복했고, 새벽녘이 되어서는 잠도 달아났지만 그저 누워있었다.

  그 날 밤 한 아이가 어떤 본문의 의미를 질문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내가 왜 이렇게 게으른 것인지, 왜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인지, 이것 저것 이유를 물어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나태는 내 육체를 덮는다. 이것이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귀찮아 하는 나를 보면, 육체를 감옥이라 생각했던 영지주의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바쁘게 움직이는 머리와, 그 머리에 따라 움직여주지 않는 육신의 게으름을 날마다 확인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다시 본문 앞에 앉았다. 누군가의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은 나를 움직인다. 내가 이리 저리 일을 벌이는 이유는 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나는 움직이니까. 다른 사람과의 연결 속에서 의미를 찾으니까.

 

  의뢰받은 본문을 보면,

 

(엡 5:11~16)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다 빛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11,12절은 어둠에 대하여, 13,14는 빛에 대하여, 15,16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 어둠

 

  어둠은 무엇인가? 몰래하는 것,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 당신의 머리 속에는 어떠한 일들이 생각나는가? 그것이 어둠이다. ‘평판’이라는 것이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때는 부정적인 기능을 하지만, 사실 평판은 이 사회의 경찰이다. 남의 이목에 너무 신경쓰고 살기에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한탄하지만, 사실 남의 이목 때문에 사회의 질서가 유지된다. 그런데 무언가를 숨긴다? 그것은 자신의 평판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남의 이목으로부터 숨고 싶어서. 사람들은 모두 인간다움을 원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인간다움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몰래하는 것. 그 어둠은 내가 인간다움에서 멀어졌다고 평가하게 만들 근거들이다. 공정하지 않은 거래, 남들을 속여왔던 거짓, 서로의 약속을 넘어선 부도덕한 관계들. 이러한 일들은 벌여놓고서 고백하기 이전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음지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음지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어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다움을 원하는 자, 인간답게 살기 원하는 자, 이 어둠의 일에 끼어들어서는 아니된다. 이 일에 끼어들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어둠의 일이 돈이 되기 때문에, 이 어둠의 일이 쾌락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이 어둠의 일이 사회의 금기를 깨는 짜릿함을 주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은 인간다움에서 멀어지는 것. 사람은 어둠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이 어둠을 폭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빛. 폭로

 

  빛은 폭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폭로라는 단어의 느낌은 날카롭다. 폭로된 사람들을 모두 감방에 쳐넣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여기서의 폭로는 누군가의 잘못을 까발려서 그 사람의 치부를 온통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빛의 폭로’. 빛은 따스하다. 빛은 감싼다. 쇼파 밑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손전등을 비추어보면, 의도치 않은 물건들을 더러 발견하지 않는가? 빛이 어둠을 폭로하는 것은 따스하다. 감싼다. 의도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여기에 어두움에 참여하지 않는 빛의 사람이 있다. 진실하게 살아가는, 올바로 관계를 맺는, 돈과 쾌락을 쫓지 않는. 그 사람 앞에서 어둠에 속한 사람은 떳떳하지 못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죄책의 무게가 그를 누른다. 이미 그 사람의 존재 앞에서 어둠은 스스로가 드러남을 느낀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빛은 어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사라질 뿐이다. 이러한 폭로다. 인격적인 폭로. 그 사람을 구해내는 폭로. 스스로 깨닫고 돌아서게 하는 폭로. 빛의 폭로.

 

  이 세상에 빛이 나타났다. 빛이 나타났으므로 어둠은 모두 그 빛 아래서 정체를 낯낯히 드러냈다. 13절의 의미하는 사건은 십자가의 예수다. 아무런 잘못 없는 자가 부당하게 십자가에 달릴 때,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거짓됨이,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난폭함이,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평범함이 드러났다. 고로, 십자가는 악의 정체를 폭로한 사건이다. 사람들은 유대의 율법을 믿었고, 로마의 평화를 믿었고, 개인의 판단을 믿었다. 그러나 유대의 율법은 죄없는 예수를 죽였으며, 로마의 평화는 그 평화가 깨질까하여 예수를 죽였으며, 이것은 무수한 개인들의 판단이 모여서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틀렸다. 예수가 그들 손에, 부당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수는 모든 악을 폭로하고 죽었다. 빛의 폭로. 아무도 정죄하지 않은채.

 

  그리고 3일 뒤, 새로운 것이 폭로되고 드러났다. 그것은 전인류로 하여금 생존에 목매이게 하고, 소멸의 불안 속에서 욕심을 부리게 하며, 무수한 거짓과 부적절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깊은 심연이 드러났다. 죽음.

그 죽음이 억누르고 있던 빈무덤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이것이 무슨 의미라 생각하는가? 폭로되었다. 죽음이 한 사람 안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마침내 드러났다.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다 빛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3. 지혜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하다. 빛 아래서 어둠이 드러났다. 사실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빛의 부재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겠다. 빛이 드러난 자리에 어둠의 정체가 폭로되었다. 어둠은 무가치하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을 곳이 없다. 모든 것이 낯낯히 드러날 것이다. 당신의 어둠마저도.

 

  그리고 에베소서는 나와 당신에게 묻는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지혜는 무엇일까? 지혜는 배팅이다. 바울은 빛과 어둠에 관해 먼저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남들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어둠을 따라 살 것인가,(이 길의 끝은 죽음이다) 아니면 십자가와 부활로 온통 드러나버린 새로운 생명(영생)을 붙잡을 것인가.(이 길은 죽음을 이긴다) 옳은 것을 믿고, 살아가는 방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곧 지혜이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어둠과 빛을 분별하고, 살아낼 줄 아는 것이 지혜다. 그 어둠과 빛을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뿌리가 깊다. 삶과 죽음의 문제다. 이 지점까지 내려가서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지혜다.

 


4. 나의 시간을 구속해야 할 때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구절.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렇게 해석했다.

 

(엡 5:16)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redeem. 구속하다. 다시 사다.

즉, 지금 이야기는, 최초 어둠에 대해서, 그리고 빛에 대해서, 이후, 이 빛과 어둠을 선택하는 삶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삶의 연장선에서, ‘시간을 다시 살 것’을 말하고 있다. ‘시간’을 다시 사라.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redeem의 의미는 성서에서 분명하다.  ‘구속’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십자가 구속, 희생을 통한 구속을 가리키는 단어다.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고, 그 댓가로 사람은 죽음에서 구출되었다. 이 일로, 어두운 세계에 빛이 떨어졌고, 낡은 ‘날들’로 새 ‘시간’이 돌입했다. 


  그러나 아직 낡은 날들은 끝나지 않았다. 악의 잔여 세력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낡은 날들은 곧 끝난다.

그러니 너에게 주어진 시간을 구속하라. 그리스도를 따라, 이 낡은 시대 속에서 새 날을 살아라. 이런 의미일 것이다.



 

반응형

'바울의 편지들 > 에베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베소서 3:13~21  (0) 2018.05.18
에베소서 4:6  (0) 2018.04.28
에베소서 3:1~12  (3) 2018.04.28
에베소서 2:1~22  (2) 2018.04.09
에베소서 1:1~23  (0) 2018.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