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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0, 개인번역


'어긋난 걸음들'과 '모르고 지은 죄들'로 시체상태인 여러분 역시, 

그 모르고 지은 죄들 안에서 그때 어긋난 걸음을 걸었습니다,

  바로 이 코스모스의 시간을 따라,

  그 공기의 엑수시아를 관장하는 이를 따라,

  (이 공기는 곧 설득되지 않는 아들들 안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는 그 숨결입니다).


  걸음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본인이 가겠다는 방향과 속도가 걸음 속에 들어있다. 다시 말해 본문의 "어긋난 걸음들"은 의도를 품은 죄, 곧 알고 지은 죄를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마르티아는 흔히 '죄'로 번역되지만, 이것은 '모르고 지은 죄'를 의미하는 단어다.
  로마서를 연구하다 겪은 충격은,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속죄제사이고, 구약에서의 속죄제사는 모르고 지은 죄에만 해당한다는 사실이었다(8장). 즉 예수는 하마르티아를 처리하신다. 그런데 이 사실이 의도를 갖고 지은 죄는 구제 불능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의 서로 내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알고 지은 죄는 사실 모르고 지은 죄이기도 하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못박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기도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였다. 즉 메시아 예수의 기도는 알고 지은 죄를 모르고 지은 죄에 포함시킨다.
  또한 모르고 지은 죄라고 할지라도, 그 무의도 안에는 정말 의도가 없을까? 술 먹고 성추행을 했다고, 그 성추행 안에서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 판단에 대해선 분개할만 하지 않은가? 무의도로 포장한 의도로 넘치는 세상 속에서 의도와 무의도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의 관계에 관하여 오늘날은 정신분석이 그 사유를 이어가고 있다. 아감벤은 <유아기와 역사>에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전환되는 그 경계 영역에서 언어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는 무의식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게 별로 없지만, 저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언어는 연구할 수 있다. 무의식도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라캉의 사유도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언어철학을 통해 탐구하려는 시도이다.

  본문의 "시체상태(νεκρος)"는 심장 박동이 멈추어버린 유기체의 죽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는 살아있다. 그런데 시체상태. 오늘날에는 이런 형상을 상상하기에 좋은 시절이다. 좀비, 뱀파이어,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의 형상 아닌가? 살았으나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 말이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무의식이 그의 걸음을 어긋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그를 어긋나게 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시간'과 연관짓는다. '언어와 시간'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된 담론이 아니었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며, 모르고 지은 죄들 안에서 걷는 어긋난 걸음마저도 그가 인식한 시간 속에서의 걸음이다. 바울은 시체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의 시간을 "이 코스모스의 시간"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곧 "그 공기의 엑수시아를 관장하는 이'와 동격인데, 어쩌면 우리가 사탄이라 부르는 대상은, 어쩌면 우리가 빠져있지만 빠져있음을 성찰하지 못하는 시간이 아닐까? 들키지 않으면서도 인간 전영역을 지배하는 가장 간교한 지배자의 형상으로서 말이다.

  코스모스의 시간은 코스모스가 규정한 시간과 시간 사이의 결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또 그 결여가 채워지고 넘쳐질 것에 대해서 무지함으로 그 지배자의 형상을 유지한다. 코스모스를 가득 채운 이 시간의 공기를 사람들은 호흡하고, 그 공기는 그 공기를 들이 마쉬고 내뱉는 사람들에 시간의 속성답게 '그 외의 것'을 생각조차 못하게 하며, 설득되지 않은 상태를 전부로 만든다.


그 설득되지 않는 아들들 안에서 우리 모두도

그때 우리의 살몸적 욕망들 안에서 생활했습니다(αναστρηφω),

살몸적이고 생각을 관통하는 원함들을 행하며 말입니다,

그리고 본성상 진노의 아이들이었습니다, 남겨진 이들처럼.


  조작 시간은 사람이 사륵스의 상태를 고수하도록 추동한다. '아나스트레포'는 생활방식을 의미하는데, 베드로에게 이 단어는 에클레시아적 삶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러나 바울은 같은 단어로 시체상태의 생활방식을 드러낸다. 살몸적 욕망들 안에서의 생활. 본문의 "그때(ποτε)"는 과거의 한 때가 아니라, 위에서 바울이 언급한 "코스모스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간의 결여를 모르는 시체로서의 호흡을 가리킨다. 이때 시간은 그저 살몸적으로 살았던 배경이 아니라, 공기를 내뿜는 근원적인 차원이다.

  본문의 "남겨진 이들"은 누구일까? '남겨짐'은 전체에 포괄되지 않는 잉여를 의미한다. 즉 남겨진 자들은 본성상 진노의 아이들이나, 아직 진노가 완결되지 않은채로 남겨진 사람들이다. 즉 진노의 아이들은 로마서 9~11장에서 말하는 "진노의 그릇"과 같이, 진노를 받고 있으나, 여전히 진노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
남겨진 이들은 본성상 진노의 아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그들에게는 결여가 남아있다. 결여가 남은 이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 결여가 채워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즉 남성 편에 남아서 대상a를 갈구 하는 그들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남성 편에 남아있는 것이면서도, 바로 그 결여를 지나 여성 편으로 넘어올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본성상'은 그들의 출생조건을 가리킨다. 본성을 인간 본성으로 읽고서, 본성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저 퓨시스를 앞에서 언급된 "바로 이 코스모스의 시간에서의 삶"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무의식과 의식은 작동하고, 그 사이에서 시간은 조작된다. 그리고 인간은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다른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 가능성이 남아있기에,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조작될 수 있고,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새로운 언어가 고백될 수 있다. 남겨짐은 이 가능성으로의 남겨짐이다. 남겨진 이들은 심판받을 전체에 최종적으로 귀속되지 않으며, 윤리적 판단은 유보된채 여전히 그 시간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시간 속에 남아있는 중에도 시간(크로노스)은 축적되는데, 그 축적 속에서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계산되지 못하고 남은 측면(결여)도 함께 축적된다. 그리고 축적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계산되지 않았던 시간이 폭발하며, 그 폭발이 넘침의 형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아적 시간이다.

그런데 긍휼 안에서 더 넘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다층적인 아가페를 통하여, 

어긋난 걸음들로 시체상태인 우리도

  메시아와 함께 살게 하셨고 (여러분이 이미 거저 온전케 되었습니다)

  메시아와 함께 일으키셨고

  메시아와 함께 곁하늘들 안에 앉히셨습니다,

    이는 그분이 도래한 시대들 안에서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여러분에게 (있는)

    최고의 사용 안에 있는 그분의 거저로 넘치는 그 넘어섬'을.

    다시 말해 그 거저로 여러분이 신실함을 통해 온전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으로부터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있는 그 선물이며,
일들로부터도 아니니, 이는 누구도 자랑받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시/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시아 예수 안에서 '좋은 에르곤들' 위에서 지음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들' 안에서 걷게 하시기 위해
좋은 에르곤들을 앞서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넘침"과 "넘어섬"을 말한다. 신은 넘치는 분이시고, 그 넘침만이 현시대의 조작시간을 깨뜨리며 인간을 시체상태로부터 구제한다. 구제받은 인간의 실존은 "메시아와 함께", 그 메시아의 결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메시아와 함께 살고, 메시아와 함께 부활하며, 메시아와 함께 승천한 실존. 그리고 에베소서는 이 실존이 미래로 이해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 사람들이야 말로 신이 도래한 시대들 속에서 내세운 사람들이다. 이 넘침과 넘어섬의 사람들이야 말로, 신의 자기 항변이다. 신이 이 사람들을 준비했고, 신이 이 사람들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신의 시편이며, 신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억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살몸 안에서 이방인들이었고, 

손으로 살몸에 행한 할례의 말됨에 의해 무할례자라 불리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여러분이 바로 그 카이로스에 메시아 없이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이질적인 사람들이며

이 알림의 계약들에 낯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갖지 못하고 이 코스모스 안에서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그때는 멀리 있었던 여러분이

메시아의 피 안에서 곧장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이가 우리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이는 그 양쪽을 하나로 만드셨고

그 울타리의 분할벽을 풀었고,

적, 자신의 그 살몸 안에서

도그마들 안에 있는 계명들의 그 노모스를

중단시켰는데/기능부전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그 둘을 자신 안에서 

  평화를 만드는 새로운 한 사람 속으로 살게(창조)하기 위함이고,

  그리고 그이가 그 양쪽을 '서로'의 이전 상태로 돌리기(ἀποκαταλλάσσω) 위함입니다

  한 몸 안에서 신께 그 말뚝을 통하여,

  그이는 적을 자신 안에서 죽이며.


  그리고 그이는 와서 먼 너희들에게와 가까운 이들에게 평화를 알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이를 통하여 바로 우리 양쪽이 

한 숨 결안에서 그 아빠를 향해 나아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이상 낯선이들이나 이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이들과 함께 공동체가 되었고

그 하나님의 식구들이 되었습니다, 

그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터 위에서 건설되며, 

(메시아 예수께서 그 터의 머릿돌이십니다)

그이 안에서 함께 연결된 모든/각각의 건물이

주님 안의 새로운 성전 속으로 커져갑니다, 

그이 안에서 여러분도 하나님의 거주지 속으로 지어져 갑니다,

숨결 안에서.

  

  바울은 에베소의 믿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하도록 촉구한다. 퓨시스를 넘어선 인격의 변화에 이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변화는 이미 완성된(메시아의 피 안에서) 것임을 잊지 않도록 격려한다.

  (14~19절에 대해 예전에 써놓았던 글을 덧붙여 둔다. 2018.1.4) 
  헤겔의 '지양(aufheben)'은 예수 십자가 '사건'이 가져온 '효과'에 대한 개념화이지, 그 사건 자체일 수 없다. 에수의 십자가 이전에도 말뚝들은 숱하게 박혔지만, 화해를 당연한 전제로 두지 않았다. 헤겔이 "마력(Zauberkraft)"이라 말하는 것은, 자신의 사상의 중핵인 그 효과 자체가 메시아의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단어 선택으로 보인다.


"참으로 정신이 이러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것과 함께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머묾으로써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시킬 수 있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지젝은 이 마력을 사건의 효과가 아니라 바리노비치식 농담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과 함께 있기 때문에 마력이 생긴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 '몸 안에서' 죽고, 3일의 공백을 지나, 적이 사라진 인간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이를 믿는 이들의 정신세계 안에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생각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헤겔의 지양은 이 새로운 생각의 세속화 버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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