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에서 둘로, 허나 하나를 잊은 둘로

  세상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도 하나였고, 남자와 여자도 하나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 어디 서로 싸우는 장면이 나오나요? 하나님과도 사이가 좋고, 남자와 여자도 사이가 좋습니다. 심지어 사람과 동식물과도 사이가 좋습니다. 우주와 그 속의 땅구슬, 땅구슬 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은 이렇게 지어졌습니다. 처음부터 나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을 닮아 모두 하나였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에서 둘로 넘어가면서 좋은 날이 다 지나갔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맞서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부부는 서로 자기기 잘못 아니라며 책임을 미루고, 인류 최초의 형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여서 거대한 탑을 지어 하나님을 감시하려고까지 했습니다. 둘로 나뉘어 싸울줄만 아는 사람들 때문에, 온 우주가 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한 편에 치우칠 뿐입니다. 심지어 모세조차도 이 일을 해결하려고 달려 들었다가, 사람만 죽였지 뭡니까?


시편 14편

[1]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주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너희 모두는 다른 길로 빗나가서 죄다 썩었으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이 시편을 잘 읽고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썩고, 바른 일을 하지 않고, 지혜롭지 않고, 다른 길로 빗나가서 착한 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 없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없다고 생각하니, 하나되는 생각과 행동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온통 이런 사람들 뿐입니다. 내 마음에도 불연듯, '하나님은 없어'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둘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둘은 바로 '삶과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삶이든 죽음이든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둘이 있습니다. 바로 '나와 너'입니다. 이 '삶과 죽음'과 '나와 너'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둘입니다. 여러분은 둘을 어찌 하나되게 하겠습니까? 대부분은 이렇게 배치시킵니다. '나에게는 삶을, 너에게는 죽음을'. 그래서 하와는 아담에게 책임을 떠밀었고, 가인은 아벨을 죽였으며,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싸웁니다. '나는 그런적 없어요'라고 핑계를 대도 소용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마음 속으로 미워해본 적 없는 사람은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란 , '나는 살고 남은 죽이자'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일서 3:15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오는 시대의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저 '살고'라는 말을 '옳고'로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려'. 다들 이러고 살지 않습니까? 


사사기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행동했다.


  이 구절의 '왕'을 '하나'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한 분 왕이신 하나님 없다 하니,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행동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서로 찢겨 싸우는 일입니다. 썩는 일입니다. 착한 일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는 본래 이러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자신이 늘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말해주면 그것을 듣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어린이들도 남의 말을 듣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살아남는 나!'를 부르짖는 세상 속에서 어린이들도 점점 그런 생각에 물들고 있는듯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를 잊었습니다. 둘은 나쁜 것이 아닌데 하나를 잊으니 둘이 잘 살리가 없습니다.


-고발자 : 둘이 그저 둘로 남게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 일을 바로 잡으십니다. 그분은 천상회의를 구성하셔서, 이 세상의 비뚤어짐을 곧게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천상회의 자리에, 사람을 비뚤어지게 한 장본인이 참여해있는 것입니다!


욥기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님 앞에 섰는데, 사탄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이럴수가 있습니까? 사탄의 다른 이름은 '고발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악행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그들이 망하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역할이에요. 그런 사탄이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여해서 무슨 짓을 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는 치밀하게 고소 고발하는 유능한 검사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설득력있게 '이 사람은 죄인이니 어서 처벌하시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여지없이 사탄의 레이더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어쩌면 누가봐도 나쁜 사람은 사탄이 별로 신경쓰지 않을지도 몰라요.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 실수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더 주목해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평소에도 행실이 신중할 뿐만 아니라, 가족끼리 잔치를 벌이고 나서도 혹시 모르고서 죄를 지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선, 잔치 후에 항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욥에 대해서도 사탄은 하나님께 고발장을 내놓습니다.


욥기 1:9~11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즉 '욥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보세요. 그럼 더이상 욥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을거에요'입니다. 욥도 이러한데 우리는 오죽 하겠습니까? 사탄이 하나님의 천상회의에서 고발하는 족족, 우리는 처벌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 단호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라고 봐주실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똑같이 나쁜 일을 저질렀는데,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봐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을 누가 공정하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공정하십니다. 그 분의 바로잡음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실들이 그분의 책에 쓰여있고, 그래서 이제 우리는 큰일 났습니다.

-둘을 하나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상황은 꼬여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하나님의 천상회의에는 사탄이 참여해있습니다. 사람이 잘못하는 족족 사탄은 하나님께 고발하고, 사람이 다시금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은 요원한 일로 보입니다.


  둘 로 찢어져 망가져버린 세상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늘 계신데,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눈에 드러나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본이 아니게 인류 대표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드러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둘로 찢어진 사람과 세상을 다시 싸매서 하나되게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창세기 12:1~3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비뚤어진 사람에게 이 약속이 하나 남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 하나 믿고, 사람은 다시금 하나될 것을 그리워했습니다. 그가 바란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2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는 죽음이 활동하지만,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수가! '삶과 죽음', '나와 너'를 어찌 생각하고 있습니까? 삶은 너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이것이 하나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고, 나와 너가 하나되고,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내가 죽음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요? '희생', '고난', '사랑'. 하나를 그리워하는 삶은 이래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증표로 아브라함과 어떤 의식을 치르셨습니다.


창세기 15:9~11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부족과 부족이 중요한 약속을 할 때, 그 부족 대표들 사이에 이렇게 약속을 합니다. 가축을 놓고, 그 가축을 반으로 가릅니다. 그 쪼개진 가축 사이를 약속의 당사자들이 지나갑니다. 이처럼 하는 이유는, 만약 이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을 경우에, 계약의 당사자가 이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 의식의 의미는 목숨을 건 약속입니다. 자신의 전부를 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 의식을 준비하라고 명하신 그 날, 해가 뉘엿뉘엿 지는가 싶더니, 금새 어둠이 짙게 깔리고, 사방이 어두워졌습니다. 땅에는 동물들의 사체가 여러 개 놓였습니다. 암소가 두 마리, 암염소가 한 마리, 수양이 한 마리, 그리고 산 비둘기와 집비둘기가 이렇게 각각 한 마리씩 놓여 있었습니다. 물론 의식대로 동물들은 반으로 갈라놓아, 양쪽에 놓였습니다. 암소, 암염소, 수양은 반토막 난채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습니다. 산 비둘기와 집 비둘기도 양 쪽에 놓여 있었습니다. 대지는 죽은 동물들의 피로 흥건히 젖어있어, 그 주위는 온통 피바다 였습니다. 척박한 팔레스타인 땅 위에는 핏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였습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화덕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이 나타났습니다. 그 불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 쪼개 놓은 동물들 사이로 유유히 지나가버렸고, 이내 사라졌습니다.


  창세기 15장에 기록된 이 이야기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 속에서 불은 하나님입니다. 마치 모세에게도 그렇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아브라함에게도 불의 형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갑니다!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감히 이런 말이 맞진 않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목숨을 건 약속입니다. '내가 죽음을 끌어안고서 이 약속을 지킬께.'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바로 잡아, 하나되게 하는 바로 그 일' 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은 자신의 전부를 걸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저 말대로 이뤄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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