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걸린 여자(5:21~34)
예수께서 배를 타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셨다.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고, 예수는 바닷가에 계셨다.
예수는 의도적으로 바다를 가운데 두고, 몇 번이나 움직이신다. 마치 바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시려는 듯
1. 너무나 닮은 두 사람
회당장 가운데 야이로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보더니 그 발아래에 엎드려 간곡히 말했다.
"내 딸이 죽게 생겼습니다! 내 딸이 죽게 생겼습니다! 부디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구원하시고 살려 주십시오!"
예수께서 야이로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따라가면서 예수를 밀어 댔다.
새로운 인물. 야이로. 그는 회당장. 유대인은 어딜 가던지 회당 중심으로 움직였다. 시나고그. 그런데 그 유대인 회당장이, 예수께 찾아왔다? 당시 예수는, 반유대주의자로 낙인 찍힌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여겼고,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라면 학을 땠다. 그런 예수에게 회당장이 찾아가서 엎드렸다? 무엇을 뜻할 것 같은가?
분명 회당장 야이로는 두려웠을 것이다. 그가 예수에게 찾아가는 데까지는 많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왜?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회당장이라는 직위, 유대인 친구들, 친지들,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그 발걸음이 어떠하겠는가.
비슷한 경우들을 우리는 선교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것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 선택은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두려움으로 발걸음이 주저되는 선택이었으리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믿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믿고 있었다. 무엇을 믿고 있었는가? 예수가 자기 딸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두려움의 크기보다, 예수를 향한 믿음의 크기가 더 컸을 것이다. 그것이 그를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했을 것이다. 이 주저하면서 내딛는 한 걸음으로, 그는 예수와 함께 죽어가는 자기 딸을 향해서 걷고 있다.
그리고 그 때, 야이로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야이로의 인생이 끼어든다.
12년째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자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가진 돈도 다 썼지만, 나아지기는커녕 상태가 심해졌다) 그 여자가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들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 분의 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텐데'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 이 여자가 가던 예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 여자는 어떤 여자인가? 12년을 혈루증이라는 병에 시달리던 여자다. 혈루증은 자궁하혈이다. 이 병은 유대에서 불결하게 여겨지는 병이라, 이 병에 걸린 사람을, 유대인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과도 격리되어 홀로 외딴 곳에서 살아야 하는 병을, 이 여자는 무려 12년을 달고 살았다. 이 여자의 지난 12년간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는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도, 고작 1년 뿐이다. 학교생활 내내 당해도 3년이면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 여자에게는 그런 기약도 없다. 졸업도 없는 유대 사회 속에서 희망도 없이, 그저 혈루증을 안고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채 병든 몸을 이끌고 살아야 하는, 이 여자가 살아온 삶의 무게를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을 해보자. 그런 이 여자가, 예수를 만나려 한다. 그냥 만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야이로와 함께 가셨고, 그 뒤를 큰 무리가 딸아가면서 예수를 밀어댔다고 말하고 있다. 그 어마어마한 군중 사이를 뚫고, 이 남들이 더럽다고 여기는 이 여자는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평생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던, 이 여자가 예수의 도움을 얻고자 자신을 개취급 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지나가야 한다. 기분이 어떠했을 것 같은가? 죽을만큼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믿고 있었다. 무엇을? 예수는 나를 고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두려움보다 컸다. 그래서 예수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 야이로와 마찬가지로.
2. 접촉, contact
그러자 이내 흐르던 피가 말랐다. 그 여자는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곧바로 알아차리시고 무리 중에 돌아서셔서 말씀하셨다. "누가 내 올을 만졌느냐?"
제자들이 말했다. "이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미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나았다. 그런데 예수는, 마치 사람들 들으라는 양, 누가 내 몸을 만졌느냐며, 한 사람을 무대의 중앙으로 세우려고 하신다. 그리고 그 무대의 중앙에, 모든 사람들이 비천하다고 여기는 한 여자가 올라온다. 여자는 다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주목을 받는 것은, 평생을 남들의 눈총속에 살아온 그녀에게 분명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기록한다. “그녀는 두려워서 떨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즉, 그녀는 예수와 ‘접촉’했고, 그 접촉으로부터 자신이 치유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 앎은, 예수와 이 여자, 단 둘이 아는 것이었다. 그 어떤 이가 뭐라한들 분명한 사실이었다.
예수와의 접촉. 여러분은 어떠한가? 여러분은 예수를 만졌는가? 성서는 누구든지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자만이 구원이라 말한다. 즉, 예수를 만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리는 그를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인 그 분은 우리의 밥이 되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살점을 뜯고, 피를 마셨을 때, 그것을 잊을 수 있을까?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잊을 수 없다. 마치 혈루증 걸린 여자가 예수의 옷에 손을 뻗었을 때, 그 병이 나았던 기억을 평생에 걸쳐 잊지 못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다. 잊을 수 없다. 예수를 만지고, 그 분을 먹고, 그 분으로 인해 구원을 얻은 그 충격적인 기억을 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이 거꾸로 뒤집히는 그 위대한 사건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예수와의 접촉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과의 접촉을 갈망해야 한다. “어? 지금 예수님은 이 땅에 안계신데요?” 그렇다. 그 분은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러나 하늘로 승천한 그 분께 우리의 손이 닿는다. 그냥 닿지 않는다. 성령을 통해 닿는다. 예수와의 접촉을 갈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주신다. 그 성령은 예수와 나를 연결시키는 와이파이다. 그 분의 연결이 공간을 채운다. 예수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아는가?
예수께서 누가 그랬는지 보려고 둘러보셨다. 그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두려워서 떨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말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한 마음으로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다 나아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두려웠지만,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예수와 닿기 위해 움직였던 그 비천한 여자는 구원을 얻었다. 이제 죽어서 천국을 가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 예수와 접촉한 그 시간 이후로, 이 여자는 하늘의 사람이 되었다. 몸도 정신도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이 여자는 이제 진짜 인생을 산다
3.두려워하지 말아라! 믿기만 해라!
그리고 이러는 와중에, 마음이 급한 한 사람이 있다. 누구인가? 야이로다.
야이로는 마음이 급하다. 지금 딸이 죽어가고 있다.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예수라는 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이 촌각을 다투는, 딸의 생사가 걸린 이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야이로는 멈춰있다. 예수는 지금도 혈루증 걸린 여자와 대화 중이시다. 야이로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서는 기록하진 않았지만, 아마 그는 초조하고, 불안하고, 근심되고, 걱정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 앞에서 자기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그 여자를 저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야이로에게 최후의 시험이 닥쳐왔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했다.
"따님은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귀찮게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딸이 죽었다. 기껏 예수를 모셔오려고 했더니, 딸이 죽었다. 이쯤되면 야이로가 화를 내도 괜찮을 것 같다. 예수께, “이게 뭐냐고! 내가 당신을 믿지 않았냐고!” 소리를 지르고 땅에 주저앉아 울어도 될 듯하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 말을 옆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믿기만 해라!"
이게 뭔가? “두려워하지 말아라! 믿기만 해라!” 장난하시나? 믿기만 하라고? 무엇을? 딸은 죽었는데, 이제 무엇하러 예수를 믿나? 예수가 죽은 딸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죽었는데, 내 모든 것을 걸어 살리고 싶었던 딸이 이제 더 이상 숨쉬지 않는 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같이 가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 집에 도착해서 보니 사람들이 울고 통곡하며 소란을 떨고 있었다. 예수께서 안으로 들어가셔서 말씀하셨다.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느냐? 왜들 그렇게 우느냐? 그 아이는 죽지 않았다. 자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를 비웃었다.
예수는 그저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야이로의 집에 마침내 도착하셨다. 이미 당시의 관습에 따라 사람들이 곡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소란 피우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소란이다! 죽은 사람 앞에 곡을 하고 있는 것이 소란인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거 아닌가? 예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는 야이로의 딸이 죽지 않고 잠들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비웃는다. 사람들은 비웃는다. 죽은 이를 잔다고 말하는 예수를 비웃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싸늘하게 식은 시신을 보고 그것을 잔다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마치 태양이 동에서 서로 뜨는 것이 당연하듯,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당연하듯, 그러나 이 당연한 것을 모르는 자를 비웃는 것은, 너무나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느날,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그러나 만약 아래 있던 물이 위로 역류한다면?
그 죽은 딸과 예수의 접촉이 일어난다면?
예수와의 접촉은 귀신 들린 자를 고쳤다. 예수와의 접촉은 12년의 혈루증 마저 낫게했다.
그리고 이제 그 예수가 죽음과 접촉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예수는 죽음 마저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음에는 차마 이길 수 없어 정복당할 것인가?
예수께서 사람들을 다 밖으로 내보내시고,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과 함께 온 사람들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더니 "달리다굼" 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이제 일어나라!"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그 아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거듭 명하시고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그 일이 벌어졌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물이 아래에서 위로 역류하는, 모두의 상식을 깨뜨리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싸늘하게 식은 시신에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고, 야이로의 딸은, “달리다굼” 이라는 당시 아이를 깨울 때 부모가 부드럽게 말하는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났다. 일어났다. 그렇다. 부활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예수와의 접촉이, 죽음을 이겼다. Domita Mors!
4. 그의 가르침과 그가 보여준 것
우리는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바다를 가운데 끼고 왔다갔다 하시는 예수께 어떠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 바다를 넘고 넘어서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시는 마지막 퍼즐을 얻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려고 하시는 바?
돼지가 바다에 빠진 날을 기억하는가? 이 날 예수에 의해 악이 처리되었다. 그리고 악이 처리된 이후, 예수는 두 사람을 만나셨다. 야이로, 혈루증 걸린 여인, 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 예수께 다 나아와도, 이 두 사람은 예수께 나아오지 않아도 될 법한 사람들이었다. 왜인가? 이들은 마음에 돌덩이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을 것에 대한 돌덩이, 자신을 싫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로 들어가야 하는 돌덩이, 게다가 이 사람들은 가시덤불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회당장직을 박탈당하면 어떡하지? 내가 거지가 되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나를 밀어내면 어떡하지? 혈루증 걸렸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어떡하지?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의 소식을 듣고, 그저 흘려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역사의 등불을 붙잡았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그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는 그 말을 붙잡았다. 그리고 두려움을 넘어, 현재의 걱정을 넘어, 예수를 붙잡았다. 한 사람은 군중을 뚫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딸의 죽음을 뚫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주의 날이 찾아왔다. 죽었던 딸이 일어났다. Domita Mors! 죽음이 정복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해라”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의도가 분명해진다. 그 분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결국, 그가 죽음의 파도 마저도 잠잠케 하실 것이라는 것을.
이것으로 그의 가르침과, 그의 가르침의 실제가 이 땅에 드러났다.
반응형
'복음서, 예수의 도전 > 마가가 목격한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7:31~37 : 왜 배트맨은 조커를 죽여선 안되는가? (0) | 2014.07.02 |
---|---|
마가복음 5:1~20 : "나는 군단이다", "아냐 너는 사람이야." (2) | 2014.07.02 |
마가복음 6:7~29 : 역사의 바톤터치 (0) | 2014.07.02 |
마가복음 6:1~6 : 불신앙에 말문이 막히셨다 (0) | 2014.07.02 |
마가복음 6:45~56 : 죽음을 밟고서 (0) | 2014.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