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섬김과 권력, 아니 섬김의 권력

 

  예수와 제자들은 예수의 집이 있는 가버나움(카페르나오움)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을 말이 있었습니다.

 

  ”그 길에서 너희들 무슨 논쟁을 그렇게 했던거야?"

 

  그런데 이 질문에 제자들은 마치 혼난 일을 했다는 것을 안다는듯 침묵했습니다. 하지만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이 얼마나 잘못인지 아는 것은 별개의 일인듯 합니다.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누가 더 위대한 사람인지를 논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누가 누가 잘났냐 가지고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인자라면 하나님의 권위를 휘두르는, 영광의 왕으로, 이스라엘을 차지하실텐데 그때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즉 제자들은 거대한 관료제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점에는 예수가 앉아있고, 그 아래로 고위직부터 말단직까지 서열이 매겨진 그러한 피라미드 형태의 국가 말입니다. 사실 여느 국가들이 모두 이렇게 조직되어 있지요.

 

  예수께서는 긴 이야기를 시작하시려는듯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운을 떼셨습니다.

 

  ”만일 누가 첫째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이들의 끄트머리

  곧 모든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려고 할거야“

 

  즉 적어도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의 사이가 피라미드 형태의 관료제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더욱 아래로 내려가려는 사람들의 연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요? 쉽사리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겉치레가 아닌, 정말 진심으로 서로 낮추려는 이들의 모임 말입니다.

 

  그때 어린이 하나가 후다닥 지나갔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에 있던 예수의 집은 아이들의 놀이터와 같았습니다. 부권이 강력한 유대 사회에서 이혼은 빈번한 일이었고, 그 결과 남편에게 버림 받은 과부와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당대 어린이란 노동력으로 사용될 수도 없으면서도 밥이나 축내는,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짐짝으로 취급되던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곁에 있던 어린이 하나를 번쩍 들어 제자들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색해하는 아이를 꼬옥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아이들 중 하나를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나는 그를 받아들일거야.

  그리고 나를 받아들인 사람은 틀림없이,

  내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말은 '입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만 이해되어선 안되겠습니다. 1) 예수는 예언된 인자이고, 2) 예수가 안아준 사람은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며, 3)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예언에 따라 그 인자가 재편할 이스라엘에 온통 꽃혀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 예수의 말씀은 인자가 바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말에 요한이 불쑥 끼어듭니다.

 

  ”선생님, 지난 번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내쫓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고대인들은 강력한 존재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것으로 그 존재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중세 주술사들이 읊는 주문들은 모두 대개 강력하다고 믿어졌던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후에 이 이름들이 길어지고 길어져서 전문 주술사가 아니고는 읊을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 주문이지요. 그러다보니 유대 지역에서 메시아 예수의 이름은 인기가 좋았습니다.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인자의 이름, 다윗의 후손의 이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그 선언에 응답하시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악령보다 강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던 환자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 속에, 새로운 인물이 이름이 들어서고, 그 새로운 인물은 환자의 이야기를 재구성합니다. 어쩌면 악령으부터 자유를 얻은 환자들도 예수를 정점으로 둔 관료제의 사회를 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누가 큰 지 싸우는 제자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진 않았겠지만, 아무 권력도 없던 그들에겐 인자가 유일한 권력의 이름이었고, 그 이름은 다시 힘을 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유대 전역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그 이름보다, 그 이름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저작권 위반자들을 경계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들 사이에서는 서로 큰 사람이라고 내세우지 말고, 어린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더니, 그 섬김은 '우리를 통해서만' 되어야 한다고 요한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부로는 누가 큰지를, 외부로는 우리 편과 너희 편을 가르는 요한의 생각 속에서는 '권력은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 뿐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요한의 모습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답지 않습니다. 예수는 그런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저지하지 말어, 

  왜냐하면 나의 이름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나를 저주할리 없잖아.

  그 정도면 충분해. 우리에게 맞서지 않는 사람이니 얼마나 고마워.

  그 사람이 우리의 일을 대신해주고 있는거야."

 

  이 말은 요한이 섬김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있던 '이름 무단 사용자들'의 정체가, 사실은은 '예수 일행을 섬기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이 사람들이 대신 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의 능력에 관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즉 예수는 이들을 예수 일행이 밤낮으로 수고하고 있던 그 일을 나누어 하고 있던 조력자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생각을 180도 뒤집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이 "너희를 돕는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너희가 메시아에게 속했다는 이유로 너희를 돕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야,

  물 한 잔이라도 줬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거야."

 

  이 말은 어떻습니까? 메시아의 나라는 섬김을 요구하고, 메시아를 명분으로 내세운 섬김은 반드시 보상을 받습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이름으로 악령을 내쫓은 이들의 행위는 '보상을 반드시 받을 섬김'이 되어버렸습니다. 요한은 이 말을 어떤 표정으로 듣고 있었을까요? 

 

2. 언약백성의 운명을 가르는 기준

 

  그리고 예수는 마치 시인처럼 "온전하다"라는 말이 매 연마다 들어간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제가 "온전하다"라고 번역한 이 말은 '참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선하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으며, '아름답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즉 '진선미'를 모두 의미하는 말이기에, 개역성경이 "나으니라"라고 번역한 것이 못마땅한 단어입니다. 그럼 예수의 말씀을 직접 읽어봅시다.

 

  그리고 이 신실한 작은 이들 중 하나를 걸려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에게는 짐승이 끄는 돌맷돌을 그의 목에 매달아

  그 바다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차라리 온전하다.

 

  이 말씀을 하시는 와중에도 예수의 가버나움 자택에서는 어린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신실한 작은 이들"을 말씀하셨을 때 그이의 시선은 이 어린이들을 향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자리랄 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그저 예수를 정말 좋아하는 작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에게 섬김은 커녕,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운명은 참혹합니다. 

 

  한국인인 우리에게 "맷돌과 바다"라는 키워드들은 아무 이야기도 소환하지 않습니다(제가 실험해봤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경우는 다르지요. 맷돌과 바다는 유대인의 상상을 역사의 한 장면으로 데려갑니다. 바로 출애굽의 장면입니다.

 

출애굽기 15:19, 새번역

파라오의 말들은 결국 기병을 태운 병거를 끌고 바다 속에 잠겨버렸다. 야훼께서는 그들 위에 바닷물을 덮으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넜다.

 

느헤미야 9:11 

바다를 가르시어 바다 한가운데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시고 뒤쫓는 자들을 깊은 바다에 빠뜨리시어 돌처럼 거센 물결에 잠기게 하셨습니다.

 

  언약백성의 출애굽을 추격했던 파라오 기병의 결말이 "맷돌과 바다"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참한 이미지는 후에 언약백성을 파멸시키고 포로로 끌고 갔던 제국, 바벨론에게 적용되기도 했습니다(예레미야 51장 이야기입니다. 이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https://youtu.be/3FJT10_kZDU). 예수의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신실한 사람들을 섬기기는 커녕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파라오의 기병들이나 바벨론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말은 바다에 가라앉는 맷돌처럼 '반드시 패망'이었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표현만 달리 해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만일 너의 손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 손을 자르라.

  네가 그 삶 속으로 다친채 들어가는 것이 온전하다,

  그 두손을 가지고 그 게헨나 속으로 떠나는 것보다,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만일 너의 손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의 의미도 문맥 안에서 뚜렷합니다. '만일 너의 손이 신실한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에 사용된다면' 입니다. 예수는 그럴 바에 그 손을 자르라고 명합니다. 인자가 가져오는 새로운 삶인 '영생'에 잘린 손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되고, 옳고, 아름다운 일이라 말합니다. 사람이 불구가 된 것이 참되고 옳고 아름답다는 말인가요? 그럴리가요. 자신의 신체를 잘라내서라도, 신실한 작은 이들을 섬기겠다는 사람의 삶이 참괴도 옳고 아름답습니다. 영생은 이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게헨나가 있습니다.

 

  '게헨나(γέεννα)'는 희랍어 발음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지옥'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게헨나에서 '게'는 땅을, '헨나'는 '힌놈'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맷돌과 바다가 한국 사람에게 별 다른 이야기를 상기시키지 않듯, 우리는 '힌놈의 땅'이라는 말을 들어도 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상상의 근거가 우리 손에 있습니다.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역대하 28:3, 새번역

아하스는...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을 하고,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는 행위였다.

 

역대하 33:4~6, 새번역

므낫세는...아들들을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번제물로 살라 바쳤으며,

 

예레미야 7:30,31, 새번역
나 주의 말이다. 참으로 유다 백성은, 내가 보기에 악한 일들을 하였다. 그들은, 나의 이름을 찬양하려고 세운 성전 안에다가, 자기들이 섬기는 역겨운 것들을 세워 놓아서 성전을 더럽혔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과 딸들을 불태워 제물로 바치려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이라는 산당을 쌓아 놓았는데, 그런 것은 내가 명하지도 않았고,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다.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는 몰렉이라는 가나안 신 숭배가 벌어지던 곳입니다. 몰렉은 유아인신제사를 받는 신이었는데, 이 몰렉에게 유다의 왕들 조차 자신들의 자녀를 불에 살라바쳤던, 끔찍한 연기가 피어오르던 곳이 힌놈의 골짜기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저지르던 유다의 사람들이 시체가 될 것이고, 장례도 제대로 치루지 못할만큼 비참한 패망을 맞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7:32~34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오면,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살육의 골짜기’라고 부를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매장할 자리가 더 이상 없어서, 사람들이 도벳에 와서 시체를 묻을 것이다. 그 때에는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에 사는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아무도 그것을 쫓아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에서, 흥겨워하는 소리와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신랑 신부의 목소리를 사라지게 하겠다. 온 나라가 황무지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헨나, 즉 "힌놈 골짜기로 던져진다"는 표현은 맷돌과 함께 바다에 던져진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우상숭배자의 결말을 맞게 된다는 유대적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충격적인 것은, "신실한 작은 이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극치이며, 그러한 자는 반드시 패망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인 윤리를 넘어서, 고와와 과부를 돌보지 않는 유대 사회 전체가, 그러한 반역과 우상숭배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았던 1세기 유대는, 예수의 저 말이 있고나서 30여년 뒤 로마에 의해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게헨나에 던져졌습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언급보다 역사적 실재에 관한 언급으로 저 본문을 읽는다면, 연약한 이들을 섬기는 것은 개인 윤리적 차원에서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서슬퍼렇게 다가옵니다.

 

3. 소금에 절여졌나요? 소금을 사용하고 있나요?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도 같은 메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너의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 발을 자르라.

  네가 그 삶 속으로 절뚝거리며 들어가는 것이 온전하다,

  두 발을 가지고 그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그리고 만일 너의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을 던져버려라.

  외눈으로 그 하나님의 그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온전하다,

  두 눈을 가지고 그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그곳은 그들의 구더기가 죽지 않고 그 불은 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불에 염장될 이기(ἁλισθήσεται) 때문이다.

 

  즉 '신실한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로 향하는 발이라면, 그 일을 바라는 눈이라면 차라리 자르고 뽑아버리는 것이 언약백성을 망하지 않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 힌놈 골짜기로 던져진 사람은 실제로 있었고 이 사실을 모르는 유대인은 없었습니다. 우상숭배를 고집하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예루살렘 전체가 게헨나와 같았고, 그 멸망하는 도시와 운명을 같이한 이들이 유대인의 조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도시가 멸망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우상숭배한 도시도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기준을 변경하실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 우상을 숭배하던 이들의 시체에 구더기가 들끓는 처참한 말로와, 우상들과 함께 꺼지지 않는 불은 불멸의 기준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졌습니다.

 

  토라는 소금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소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향을 피울 때 반드시 첨가해야 하는 것이었고(출애굽기 30:35), 모든 곡식 제물에도 소금을 쳐야 했습니다(레위기 2:13). 즉 소금은 하나님과 언약백성을 매개하는 중요한 물질이었습니다. 

  더불어 파멸한 도시의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는 모두 소금 기둥으로 변했고, 점령지에는 소금을 뿌려 다시는 파종이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사사기 9:45). 이 경우 소금은 다시는 소생할 수 없는 파멸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는 이 두 가지 소금의 의미를 모두 사용하시는듯 합니다. 작고 신실한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도시는 파멸될 것이고, 다시는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 게헨나의 불에 염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소금에 의해 파멸되지 않고, 오히려 그 소금으로 한 분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소금은 온전하다.

  그런데 만일 그 소금이 짜지 않다면, 

  너희들이 무엇으로 그것과 같이 간을 하겠느냐?

  너희 자신들 안에 소금을 가져라,

  그리고 서로들 안에서 평화하라.”

 

  예수는 서로 누가 위대하는지 논쟁하는, 예수께서 왕좌에 오르셨을 때 차지할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제자들에게 소금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금의 의미를 오해할 수 없도록 직접 풀어주십니다. 그 소금이란 서로들 안에 갖고 이어야 할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그저 싸우지 않는 상태일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 유지되는 아슬 아슬한 평화도 아닐 것입니다. 서로 섬기며, 함께 사회의 변두리로 향하는 이들 사이에 있는 그것, 그것을 가리키는 평화일 것입니다.

 

  예수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가버나움 자택을 떠나 유다의 국경 지역과 요단강 간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군중들이 예수일행을 향해 몰려들었고, 예수는 늘 그래왔듯이 그들을 고쳐주시고, 가르쳐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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