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토라에 적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몰려든 사람들, 다시 시작된 치유와 가르침 속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물은 것은 이러한 질문이었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풀어버리는 것이 율법에 적법합니까?”

  이 ‘토라에 적법’은 바리새인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만일 저 남자가 메시아라면 토라에 적법한 사람일 것이고, 이 ‘토라에 적법함’이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새 시대로 들어가는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이혼 문제를 예수께 가져왔습니다. 이 주제 뒤에는 바리새인들의 복합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를 시험 및 검증하려는 주제이면서도, 자신들이 풀지 못했던 난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혼은 심각한 사회 문제였습니다. 남성우월주의의 유대 사회에서 남성은 이혼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혼 당한 여성은 가정에서 쫓겨나(열두 지파의 유산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과부가 되었고, 당대 과부란 고아와 함께 사회에서의 가장 먹고 살기 힘든 천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성들은 모세가 이혼할 때는 이혼증서를 써주어야 한다는 계명을 ‘악용’ 하여 새로운 여성을 소유하고 싶은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이것이 문제임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탐욕을 토라에 명시된 내용이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문제 삼는 것은, 위와 같은 유대의 지배체제를 구축한 토라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문제를 꿰뚫어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당대만 하더라도 1000년 전에 쓰인 문서인 토라와, 그 당시 남성을 직접 연결시켜 버립니다.

  “모세의 이혼 증서 계명은 너희 유대 남성들의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장을 향해 쓴거야”

  그리고 그이의 이야기는 창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성과 여성이 창조되었고, 이들은 부모를 떠나 하나의 몸을 이루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묶으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남자나 여자나 자신의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아내를 찾는 남성은 간음을 저지르는 것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이 바리새인들이 토라에 적법하기 위해서는, 이혼으로 넘쳐나는 그들의 유대 사회가 이혼을 멈춰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뜻에 어긋난다고 말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없었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할 수 없었을까요?

  토라를 이혼에 악용한 가장 끔찍한 결과는 바로 아이들입니다. 이혼 당한 어머니는 과부가 되고,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고아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마가복음 이야기는 예수께 아이들을 데려오는 사람들, 그들을 가로 막은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을 향해 분개하시고 혼내시는 예수를 보여줍니다.

  “그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보내주고 막지 말아라!
  왜냐하면 (토라에 적법한 이들에게 주어진다는) 하나님의 통치는
  바로 이러한 아이들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토라에 적법‘이라는 바리새인들이 가져온 주제는 여전히 이어집니다. 토라를 이용해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유대 남성들이 아니라, 토라를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를 찾는 아이들이 토라에 적법합니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이 하나님의 통치를 아이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통치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에게 찾아온 아이들을 끌어안고 축복해주십니다. 그들에게 두 손을 얹으시고.

에피소드 2. 토라에 적법할 수 없는 하나의 이유

  예수는 다시 길을 떠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자 청년‘ 이라고 알려진, 그러나 성경 원문에는 ’하나‘라고만 되어 있는 사람 하나가 달려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어본 적이 있나요? 게다가 달려와서 보자마자 무릎을 꿇는다? 강력한 간청의 스탠스로 이 ’하나‘가 예수께 간절하게 물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좋은 선생님이여!
  오는시대의 삶을 제가 상속 받으려면,
  저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예수의 답변을 듣기 전에, 우리는 이 질문에 관해서 가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은 앞에서 예수를 찾아온 바리새인의 경우와 동일한 주제가 연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토라에 적법‘이라는 조건과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감‘이라는 결과가 바리새인들의 관심이었듯, 이 부자청년의 관심도 ’토라에 적법‘과 ’오는 시대의 삶을 상속받음‘이라는 조건과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부가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곧 오는 시대의 삶을 상속받는 것이구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네요. 이 ‘하나님의 통치, 오는 시대의 상속’이 1세기 유대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이 추구하는 고결한 신념, 영적 체험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로마 제국의 위협과,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짓밟히고 있는 상황,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오랜 예언. 이것들이 다 한데 묶여 ‘하나님의 통치, 오는시대의 삶의 상속’입니다.

  예수께서 그 ‘하나’에게 말합니다. 자신에게 ‘좋음’을 찾지 말고, 한 분 하나님에게서 찾으라고. 오는 시대의 삶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조건이란 토라이고, 이미 십계명이 토라의 계명들을 잘 요약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의 이 말씀에 청년은 ‘좋음’을 빼고서 이렇게 답합니다.

  ”가르치는 분이여, 제가 그 모든 것들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왔습니다“

  예수는 이 청년을 가만히 들여다 보시고,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가만히 들여다 보시고”라는 표현을 기억해주세요. 뒤에 한 번 더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예수는 ‘하나’라 불린 그 친구에게 ‘하나’를 더 요구하십니다.

  “하나가 너에게 남았어. 가진만큼 팔아서, 구걸하는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의 보물들을 갖게 될거야. 그러고나서 나를 따라와라”

  그런데 이 말씀에 그 ‘하나’는 그 ‘하나’ 때문에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슬퍼한 채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실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에수께서 말씀하신 이후 30년이지나면, 유대는 로마에 의해 멸망합니다. 만일 이 사실을 하나가 알고 있었다면, 모든 재물을 팔아 피난을 준비하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것도 그 피난길이 가난한 이들을 친구 삼고, 예수를 따르는 길이었다면 서글프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이것은 그가 가진 “유용한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유용한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 어렵구나!”

  제자들은 이 말에 ’놀랐다‘고 쓰여있습니다. 아마도 부유한 이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들이고,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에수는 부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게는 이 말이 ’가진 것이 많은 이가 자신의 재물을 나눠주고, 새 친구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기 어렵다‘로 들립니다. 심지어 메시아께서 원하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매우 충격을 받아“ 서로 쑥덕거립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온전해질 수 있단 말이야?“

  이때의 ’온전‘이 기억나시지요? 토라에 합당하다는 의미로서의 온전, 바로 앞장인 9장에서 줄곧 언급되었던 온전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저렇게 말하는 제자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십니다. 마치 부자청년을 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옆에 있으면 불가능하지.
  그러나 하나님 곁에선 불가능하지 않아.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 곁에선 가능하기 때문이야“

  저는 저 ”모든 것이 하나님 곁에선 가능“이라는 말에, 변화산 사건과 부활이 생각납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 그리고 커텐 뒤에 이미 살아있는 사람들.

  베드로가 못참겠다는듯이 나섭니다.

  ”보세요, 우리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이 말 왜 한거에요? ‘저 부자 청년이 하지 못한 것을 우리는 했습니다. 그러니 합당한 보상이 있는 거 맞지요?‘ 이런 의도 아닐까요? 그리고 베드로의 머리 속에서 저 ’합당한 보상‘이란 하나님의 통치, 오는시대의 삶과 연관되어 생각될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보장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약간의 변용이 있어요.

  ”집, 형제들, 자매들, 엄마, 아버지, 자녀들, 땅들을
  나와 복음 때문에 놓아버린 사람은 반드시
  지금 이 카이로스에서 100배의
  집들, 형제들, 자매들, 어머니들, 자손들, 땅들을
  받을 것이다. 다만 박해와 함께 받게 될거야.
  그리고 오는 시대의 삶도 받게 될거야.
  그런데 많은 첫째들이 끝들이 될 것이고,
  끝들은 첫째들이 될 거야.“

  돌려받지 못하는 것 하나를 찾아보세요. 이혼 이야기로 시작된 오늘 본문에서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다만 잃어버린 집은, 집들로 돌려받고, 아버지가 제외된 넘치는 가족들을 돌려받았습니다. ”이 카이로스“라는 시간 속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넘치는 보상들의 시간인 이 카이로스에는 이상하게도 ’박해‘도 벌어집니다. 아래 질문들을 생각해보세요.

-오는시대의 삶은 이 박해가 끝나면 받는 것인가요? 아니면 이 박해와 함께 누리는 것인가요?
-그리고 끝이 되는 첫째들은 누구이고, 첫째가 되는 끝들은 누구인가요?

  모두 분명한 답변이 있는 질문들입니다.

에피소드 3. 인자가 왕위에 오르는 길

  이제 배경이 바뀌었습니다. 예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예수는 앞에서 그들을 이끄셨는데, 이 일로 제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을 메시아라 선언하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예수, 그리고 그 예수를 죽이려는 반대파들이 온통 저 예루살렘에 몰려있습니다. 큰 군대를 이끌고 간 것도 아니고, 갈릴리 어부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누가봐도 사지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는 곧 있을 비참한 결과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어.
  그런데 ’인자‘는 대제사장들과 문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그들은 ’인자‘에게 죽음을 언도할 것이며,
  인자를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이고,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을 것이며,
  ’인자‘를 채찍질 하고 죽일거야.
  그리고 삼일후, ’인자‘는 일어날거야“

  예수는 자신이 고생하다 죽는다고 말씀하지 않고, ’인자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자에 관해 유대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다니엘 7장과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번에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반응합니다. 그 반응을 제 식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다니엘서 7장에 쓰인대로, 인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저희 형제들을 우의정과 좌의정 시켜주세요“

  그들은 인자 이야기를 이루실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해하고 있던 다니엘 7장의 인자 이야기는, 그들의 보상이자 그들의 영광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인자 이야기 이해를 의아해 하십니다. 인자 이야기는 예수의 마시는 잔과 예수가 잠기는 물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이들은 그 잔과 물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들은 그 잔과 물을 알게 되고, 그들도 마시고 잠기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스운 것은 나머지 열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예수께 먼저 다가가 높은 관직을 요구했던 이들을 불쾌해합니다. 예수는 이 제자들을 모아두고 예루살렘 근처에서 이제 얼마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중요한 가르침을 전달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란 이방인의 통치와는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전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첫째‘와 ’끝‘에 관한 이야기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러한 방식으로 첫째가, 이러한 방식으로 왕위에 오르는 인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에피소드 4. 소리로 가득해진 여리고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초입입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열두 지파를 이끌고 가나안을 차지할 때 여리고부터 점령해야 했듯, 이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열둘을 이끌고 여리고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리고에서 만난 사람은 티마이오스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란 의미의 ‘바’를 붙여서, ‘바티마이오스’라고 하는데 이 이름이 ‘바디메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는데, 길가에 앉아서 예수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아주 신학적으로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마치 예수께 나오는 어린아이들을 가로 막았듯이, 사람들은 이 시각장애인의 입을 막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울부짖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친절하게 그의 울부짖음을 두 번 적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예수는 위트있게 답변하십니다.

  “이번에는 너희들이 소리쳐서 저 사람을 불러와라”

  그러자 사람들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기운내시고, 일어나세요! 이분이 당신께 소리내셨습니다.

  마치 그 옛날 여리고에 나팔 소리와 찬양 소리로 가득했듯, 여리고는 바디메오와 사람들의 외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신다는 소리에 바디메오는 자신의 유일한 유용한 재산인 겉옷을 던져 버리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뛰어서 예수를 향해 왔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보았던 어떤 사람과는 달리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그는 ‘다시/위를(두 가지로 번역 가능합니다) 보는 것’이라 답했고, 그는 곧장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눈을 뜨게 된 바디메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너의 신실함이 너를 온전하게 했어“

  그리고 그 ‘가라’ 이후, 바디메오는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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