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난 이야기

  유대를 휘젓고 다니며 분란을 일으키는 "예수 일당" 본부인 가버나움에 이르렀습니다(17:24). 예수 때문에 소란스러울 밖에 없었던 것이,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니엘 이야기에 나오는 인자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7장은 인자의 왕위 대관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 인자는 포악한 동물들의 통치를 끝장내고, "옛적부터 계신 "에게 대권을 이양받는 우주 대통령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인자의 과업 안에는 유다의 오랜 숙원이자, 예언의 성취인 포로 해방의 소망이 박혀 있었고요.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름 부어진 그리스도, 그리고 그이를 따르는 둘이란, 다름 아닌 예언에 따라 새롭게 재집결되는(예레미야 30~32) 언약 백성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어깨에 뽕이 들어갈만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논쟁이 붙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누가 크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논쟁 기준을 뒤집어 버립니다. '낮추는 것이 것이다' 라는 모순적인 진술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1) 어린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크다, 

2)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그는 잃어버린 마리와 같다 

 

  이야기가 이어지지고, 드디어 오늘 저의 본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3) '그런데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으로 이어집니다.

 

1. 본문 번역 해설

 

  따라서 이때의 "죄를 범한 형제" 앞에서의 문맥에 따라 여러 이미지들이 겹칩니다. "잃어버린/멸망당한 ", 

"작은 ", 제자들이 낮춤의 본으로 삼아야 "어린이" 말입니다. 이런 이미지들이 겹칠 제자들의 머리 속에 떠오른 구체적인 사람들이 누구일지 상상해보는 것으로 오늘 본문 연구를 시작하면 어떨까 합니다. 

 

  먼저 본문을 원문 의미와 어순을 거칠게 직역을 해보았습니다. 저의 복음서 공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몇몇 번역어들이 낯설 수는 있지만만, 곱씹어보시면 나름의 맛이 있을 거예요.

 

마태복음 18:15~20, 개인번역

그런데 만일 네 형제가 비뚤어졌다면,

 

(1)

너는 가라, 그에게 말하라 너와 그 사이에서만.

그런데 만일 그가 네 (말)을 듣는다면, 

너는 너의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2)

그런데 만일 그가 듣지 않는다면, 

너 자신과 함께 하나 혹은 둘을 곁에서 취하라, 

이는 둘 혹은 세 증언자들의 그 입으로 모든 이야기를 세우기 때문이다.

 

(3)

그런데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흘려듣는다면, 

너는 그 에클레시아에게 말하라.

그런데 만일 그 에클레시아(의 말)도 그가 흘려듣는다면, 

그는 너에게 이방인과 세리처럼 될 것이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만일 이 땅 위에서 묶는다면 

그만큼 하늘에서 묶인 것이 될 것이고, 

너희들이 만일 이 땅 위에서 푼다면 

그만큼 하늘에서 풀린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들로부터 두 사람이
그들이 구하던 모든 문제에 관하여 이 땅에서 함께 소리낸다면, 

그들에게 (그것이) 될 것이다, 하늘의 나의 아빠의 곁에서. 

왜냐하면 나의 이름으로 함께 이끌린 둘이나 셋이 있는 곳, 

바로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만일 형제가 비뚤어졌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비뚤어졌다" 번역어는 희랍어 άμαρτανω 번역어입니다. '모르고서 지은 ' 해당하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단계로 구성된 공동체의 대처 방법이 나옵니다. 제가 번호를 붙여두었습니다. 

 

(1) 먼저 모르고서 죄를 짓는 형제를 보았다면, 일단은 단둘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번째 순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나의 형제를 얻기 위함"입니다. 마치 탕자 아버지의 "죽었던 아들이 살아돌아왔구나(누가복음 15:24)" 공명합니다

 

(2) 그런데도 자신의 무지에 고집을 부린다면, 둘이나 셋을 함께 데려갑니다. 사람들은 토라에 따라 사람의 증언에 증인으로 삼기 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같은 원칙에 따라 유대 법정에서도 사람 이상의 증인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처형에도 사람의 거짓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3) 이렇게 했음에도 고집을 부린다면, 본인의 무지에 기대어 비뚤어짐을 고집하는 그는 '에클레시아' 외인이 됩니다. 그런데 "내쫓으라" 표현은 없고, " 사람이 너에게 이방인과 세리처럼 것이다"라는 문장은 교회의 결정을 염두하고 하신 말씀은 아닌듯 합니다. "이방인과 세리"라는 표현은 적어도 사람은 에클레시아답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내용에 이후, 예수의 말씀은 '묶임' '풀림' 담론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풀림' 희랍어 λυω 언표되는데, '용서'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용서는 αφιημι라는 동사로도 언표되는데, 베드로가 뒤에 예수의 말씀에 αφιημι 답하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풀림' 용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앞에서 "작은 자가 천국에서 "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예수는 하늘을 우선시 하는 흔한 통념을 뒤집습니다.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림" 땅에 우선권을 주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교회에게 주어진 권세(εξουσια)이자, 산상수훈에서의 가르침이나 주기도문과도 같은 내용입니다(마태복음 6:14,15, 누가복음 11:4).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성전이 하는 기능입니다. 한센병자가 성전 제사장에게 용서를 선언 받기 전에는 언약 백성으로 공인된 것이 아니듯, 성전의 선언 없이는 그는 언약 백성의 일원일 없습니다. 따라서 비뚤어진 사람은 용서를 경험하고 선언 받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에클레시아의 일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이 보입니다. 20절에 "만일 사람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있는데, 지금까지의 문맥을 따라왔다면, 우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사람이 땅에서 함께 소리내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매/형제가 하마르티아를 고집하고 있는 일의 증인이며, 형제가 하마르티아를 극복하고 용서의 수혜를 받도록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20절은 오늘 본문의 시작이었던 15("만일 형제가 비뚤어졌다면")로부터 떼어놓고 생각할 없는 것입니다.

 

2. 정리

 

  위의 마태복음 본문은 우리가 공동체에서 흔하게 겪을 있는, ' 모르고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얻을 있을지'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업신 여기지 않고 함께 낮아지며, 그를 잃어버리기는 커녕 다시 얻으며, 땅에서 묶인 것이 이미 풀렸음을 선언하는 성전처럼, 그래서 언제 싸웠느냐는듯이 다시 있는 어린이를 닮은 공동체를 말입니다.  

 

 

🤔 토론 주제 

 

-본문의 문맥을 떠나 20, 22절을 그릇 이해할 있는 경우의 문제에 관해 상상만 해봅시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용서' 영화 밀양에서 비판하는 용서를 비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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