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릿말] : 십자가와 새 시대(1:1~10)

    A. 인삿말(1:1~5)  
    B. 책망 : 서신의 배경(1:6~10)

  *[감사] 단락이 없음

  II. [본론] : 복음

    A. 복음의 진리(1:11~2:21)

    B. 복음의 변호(3:1~5:12)

    C. 복음의 삶(5:13~6:10)

 

  III. [맺음말] : 십자가와 새 창조(6:11~18)

 

 

II-A. 복음의 진리(1:11~2:21)_(1)

 

0. 내용변경을 알리는 표시들

 

  드디어 편지의 본론으로 들어왔습니다. 본론인지 아닌지를 제 마음대로 정하는 것은 것은 아닙니다. 당대 편지들에는 새로운 내용을 전개할 때 그 시작을 알리는 여러 방식들이 있었습니다. 그 방식들 중 두 가지가 갈라디아서에 등장합니다. 먼저는 "형제들아"처럼 사람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의를 환기하고 내용에 주목을 요구하며 새로운 내용을 시작합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보라"가 있습니다. 이 "보라"는 실제로 육안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 내용에 주목하라는 의미입니다.) 두번 째 방법으로는 "알다"라는 동사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들은 고대 편지들에는 흔한 방식입니다. 아래 갈라디아서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때 "형제들아"와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는 이제 새로운 내용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와도 같습니다. 기억해두셨다가, 다른 서신들에도 적용해보시면 좋겠네요. 바울은 이제 "내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인 자신이 전했음에도 이것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님을 밝힐 것입니다. 사람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것이라고 바울은 앞에서 그렇게 구도를 짰습니다. 따라서 편지의 문맥상 자연스럽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신적인 기원을 말할 것임을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갈라내셨다

 

갈라디아서 1:12~14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닌(갈라디아서의 머릿말이 오버랩되시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 복음입니다. '사람에게서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님'은 유대화주의자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바울은 계시 받기 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즉 사람에게서 받거나 배운 것으로 복음을 대체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들과 자신의 입장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공감대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출발점이 같기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교회들이 바울처럼 사람에게서 배운 것으로부터 메시아 예수로 말미암은 것으로 복음의 내용을 바로 잡는다면 말입니다.

 

  바울의 과거는 자연스럽게 유대교 이야기가 됩니다. "유대교에 있을 때에",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로 유대교에 대한 강조가 눈에 띕니다. 그런데 바울이 유대교에 있었기 때문에 행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가로 막는 것이, 유대교에 대한 열심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즉 유대화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기대하는 바의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에 대한 증인이 바울입니다. 부르심 받았다면 유대교식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르심과 유대교는 서로 맞서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우리는 '아, 그래서 유대교가 기독교가 된 거지?' 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문제의 양상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로마서 9~11장).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대체되었다는 입장을 "대체주의"라 부르는데, 이것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않는 입장입니다. 대체주의의 간편함을 일단 치워두고 바울이 말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갈라디아서 1:15~17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이어지는 모든 내용들은 온통 '단절'에 대한 내용입니다. 15절의 "택정"은 '갈라냄', '따로 세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은 인간적인 조건들과의 단절로부터 시작됩니다. 모태로부터의 단절처럼 바울이 사도로 임명될 때의 부르심은 "혈육"과의 단절로 이뤄졌습니다. 이 단절이 하나님의 결정("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절은 바울 밖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 안에 있는 단절입니다(라캉의 "여성적 예외"). 자신만의 독특한 단절이면서도 신의 결정으로부터 생긴 단절이기 때문에 영원한 단절입니다. 곧 신으로부터 기원한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바로 이 단절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단절'은 예레미야에게도 있었던 예언자적 단절이기도 합니다(예레미야 1:5). 이 내부적 단절, 신적인 어긋남, 인간적인 모든 것을 끊어내면서도 그것과 맞닿아 있게 하는 빗금이 진정한 유대인다움입니다. 이것을 문화적 규범이나 양식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이 '신적인 단절'을 염두하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18~20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바울은 사도들과의 교제 속에서 복음을 얻은 것도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즉 바울의 전향은 유대교에서의 인간적 친분에서 사도들과의 인간적 친분으로 넘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3년의 단절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21~24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바울은 메시아 예수의 계시로부터 새롭게 되었고, 그 메시아 예수로 인해 자신이 가진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재조정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유대교의 생활방식이 그가 충성하는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메시아 예수만이 충성의 대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에 대한 충성은 인간적인 조건이 들어맞아 발생하는 것이 아닌, 존 바클레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상응성", 이 땅의 어떤 것과도 들어맞지 않는 무엇입니다(바울은 이것을 "넘침"으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 속에서 위대한 단절을 만들어냈고, 바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오직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율법과 할례 없이 이방인들도 이 넘치는 비상응성을 누릴 수 있음을, "삶"이라 부르는 시간이 두 쪽나는 단절을 경험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2. 복음에 의해 재조정된 유대교의 지위

 

갈라디아서 2:1~3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그리고 다시 14년이 흘렀습니다. 바울은 키프로스 태생의 유대인인 바나바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 디도와 함께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교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도,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때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 사도들("유명한 자들")을 만나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제출하고 같은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유대인 사도들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계시를 인하여" 만난 것으로, 교회 공동체가 전하는 하나의 복음을 서로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사실을 이들 모두가 인정했습니다. 4절에 있는 "그러나"는 그 앞에 있는 부정어 "않게 하려 함"과 연결되어 강조 용법으로 번역되어야 합당합니다. "내가 달리거나 달렸던 것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히려 나와 함께 있던 헬라인인 디도는 할례받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갈라디아서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렇게 4절이 한 문장입니다. 디도가 할례를 받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바울이 말합니다. 바로 거짓 형제들 때문입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갈라디아 교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유대화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유대교의 생활방식 아래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모두가 유대인이었고, '기독교'라는 단어는 사용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예수 운동은 '갱신된 유대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대 이러한 주장은 매우 강력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복음이고,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주장을 교회가 철회하게 하기 위해서 그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그 경계는 '유대교의 생활방식과 복음 사이에 놓이는 경계'입니다. 복음의 경계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이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생활방식을 공유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은 유대인처럼 하고, 이방인은 이방인처럼 '생활방식의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복음됨을 지키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는 복음 안에서 각자의 문화적 양식대로 살아도 되는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 예수에 대한 충성이 이러한 자유를 보장합니다. 복음, 즉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에 대한 충성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은 문화적 경계로 한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이로써 복음의 진리가 가진 성격이 드러납니다.

 

1) 복음은 모든 인간적 차원의 단절을 가져오는 신적인 기원을 갖습니다.

2) 그 단절은 자신의 고유한 생활방식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3) 문화의 색깔들은 복음 안에서 그 다채로움을 보존합니다.

4) 유대교의 생활방식은 그 다채로움 안에서 유대인들만의 생활방식으로 상대화되고 재조정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조건문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복음이 하나의 문화적 규범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되면, 복음이 가져온 신적인 단절성과 다채로움은 상실되고, 계급화된 연합만이 남습니다.

 

3. 신적인 단절로 인해 출현한, 다채로움을 지켜가며,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연합의 공동체

 

갈라디아서 2:6~8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갈라디아 공동체들을 속이고 있는 스스로 속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저 유명한 이들"인 유대인 사도들에게 두었습니다. 사도들이 모두 유대인이니, 저들의 생활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그 결과가 예상되었습니다. '신적인 단절로 얻는 새로운 정체성'은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으로 대체될 것이고, 오직 하나의 문화가 그리스도 교회를 단조로이 칠하게 될 것이며, 교회의 하나됨은 유대인들의 권위 아래서 계급화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거절합니다.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신적인 단절)", "바울의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은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전함과 동등하며(문화적 경계 유지로 다채로움 보존)", 하나님은 이방인을 향하는 바울과 유대인을 향하는 베드로를 모두 한 공동체의 사도로 삼으시고 "연합"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밝히며 말입니다. 아래의 악수는 정확히 이것을 보여줍니다.


갈라디아서 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유대인입니다. 바나바는 이방인입니다. 그 가운데 있는 바울은 유대인이면서도 이제 이방인을 향합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유대인의 생활방식을 요구하던 전과 달리, 이제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점은 유대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표제어로 해설을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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