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갈라디아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갈라디아서는 2014년 봄에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만, 5년이 지난 지금, 저에게는 같은 텍스트가 더 다채로운 빛깔로 보입니다. 지난 5년간의 경험이, 달라진 생각이, 지금 저의 상황이 텍스트에 투영되기 때문이겠지요. 이 연재는 신천지 탈퇴자들의 후속 교육으로 사용할 원고의 초안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그래서 종래의 연재와는 달리 개역한글 성경으로 인용할 것이고, 필요에 따라서는 제가 원문에서 직역한 본문을 사용하겠습니다. 또한 달달말숨이라는 유튜브 시리즈에서 제가 소개했던 성경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갈라디아서 전체 문맥 안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드리는 것이 또한 이 연재의 부차적인 목적입니다.

 

  어디서부터 운을 떼면 좋을까요? 갈라디아서는 일단 편지입니다. 바울이 쓰는 편지들은 모두 대동소이한 구성을 가지고 있있는데, [머릿말]-[감사]-[본론]-[맺음말] 로 그 단락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다른 편지들에는 다 있는 [감사] 단락이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편지 구성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겠지요.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바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예수 공동체들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 예수의 복음을 버리고 유대인의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이지요. 문제는 여기서 한 번 더 꼬이는데, 그들 자신은 자신들이 복음을 버린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입니다. 주로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들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유대화주의자들(judaizers, 유대인처럼 되고자 하는 이방인, 갈2:14)이 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것은 유대인처럼 율법대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 가르침에 갈라디아 교회들이 영향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 순진무구한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고 유대 절기를 지키며, 성문화된 법조항들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만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전했던 '할례 없는 복음', '율법 없는 복음'에 대해서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예수 공동체들에게 급히 붓을 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한다면,  갈라디아서를 읽지 않아도 우리는 바울이 어떤 편지를 보내게 될지 대강 그려볼 수 있겠지요? 갈라디아서는 다급한 편지,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바로 잡는 편지, 바울 자신의 사도권의 출처를 밝히는 편지입니다.

 

  그럼 그 첫 [머릿말]부터 함께 확인해봅시다. 갈라디아서 전체 구성을 다음과 같이 나눠보았습니다. 더글라스 무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참고하여 편지로서의 구성이 보이도록 좀 더 간략하게 만들어보았습니다.

 


  I. [머릿말] : 십자가와 새 시대(1:1~10)

    A. 인삿말(1:1~5)  
    B. 책망 : 서신의 배경(1:6~10)

  *[감사] 단락이 없음

  II. [본론] : 복음

    A. 복음의 진리(1:11~2:21)

    B. 복음의 변호(3:1~5:12)

    C. 복음의 삶(5:13~6:10)

 

  III. [맺음말] : 십자가와 새 창조(6:11~18)

 

I-A. 인삿말 : 짧은 [서두], 긴 이야기(1:1~5)

 

1. 바울의 자기 소개가 길어진 이유

 

  갈라디아서의 첫 인사부터 살펴봅시다. 갈라디아 교회의 현재 상황과 바울의 심정을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꼭 붙들고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당대 역사'라는 안경 없이 맨눈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마치 선글라스 없이 태양을 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다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 개인에게 직접 특정 구절을 통해서 마음에 감동을 주셔야만 바른 성경 읽기라 생각해선 곤란합니다. 이러한 성경 읽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개인주의', '열광주의', '반지성주의', '결의론' 등의 온갖 문제에 얽히게 됩니다. 일단 당대 교회의 역사로 돌아가는 것이 성경에 대한 바른 독법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이 [머릿말]에 편지 전체 내용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 이 [머릿말]의 내용을 세세하게 살펴보며, 이어질 갈라디아서 전체 내용을 조망하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겠지요?

 

갈라디아서 1:1~3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절부터 3절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엄청 길지요? 이 긴 문장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것은 바울의 자기 소개입니다. 이 자기 소개가 얼마나 긴지 감이 안오실 수도 있으니까 다른 서신들을 확인해볼까요?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다른 서신에서는 단촐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 소개가 갈라디아서에서는 무려 세 배나 늘어났습니다. 그럼 왜 유독 갈라디아서에서만 이렇게 장황한 자기 소개를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요? 일단 바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부터 생각해봅시다. 저 자기소개를 원문에 입각하여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배치할 수 있습니다. 

 

A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B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닌,

   B'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A'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나(바울)의 사도됨

 

  이렇게 A-B로 산을 올랐다가, 다시 B'-A'로 산을 내려가는 듯한 구성을 "키아스무스(영어로 '키아즘'chiasm이라고도 부릅니다)"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구성의 글쓰기에 익숙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런 구성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울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등산의 목적이듯, 저 키아스무스 구조에서 정상에 놓인 내용이 바울이 하고픈 말입니다. 즉 '자신의 사도권이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이 바울 자기 소개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소개는 자신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교회들과 그것을 조장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이 분명하지요.

 

  개역한글 어순은 원문 어순과 다르기 때문에 사도권의 출처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저 1절의 "말미암아 사도된"의 "말미암아"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도 양쪽에 걸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의 출처부터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메시아 예수와 하나님. [개역한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오직"이라 번역한 단어는 '알라'라는 희랍어인데 본래 앞에 있는 "아닌"과 연결되어 "오히려"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흔히 영어에서의 not A but B 구문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언급할 때는 대개 하나님을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 예수님이 따라 나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님이 먼저 나와요. 그리고 그 하나님도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표현하며 메시아 예수의 부활 사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사도로 임명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즉 자기 소개에서 언급된 내용과 그 배치가 모두 이 사도권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맞추어져 있습니다.  

 

2. 모든 형제들이 주목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공동 발신자"를 언급하곤 합니다. 물론 언급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만, 언급할 때는 주로 디모데나 실루아노 정도가 등장하곤 합니다.

 

빌립보서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바울 서신의 내용이 바울 자신에게 비롯됨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동 발신자를 언급하는 것은 수신하는 사역자들과의 친밀함을 표현하고, 또 이를 통해 교회가 신뢰를 갖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마치 율법에서 두 세 사람의 증언을 통해 그 증언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이 신뢰감을 가지고 편지를 읽을 수 있도록 공동 발신자들을 언급해왔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서의 공동 발신자 언급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울의 결연한 각오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디모데나 실루아노를 언급한 정도로는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을만큼 갈라디아 공동체들의 상황이 악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을 말합니다. 즉 바울은 메시아의 교회 전체와 함께 이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들은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의 편지의 내용들을 수락함으로써 이 형제들과 계속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바울의 편지를 거절함으로써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도 단절될 것인지.


3. 십자가로 시작된 은혜와 평강의 세대 

 

  그럼에도 "은혜와 평강"은 여지없이 언급됩니다. 이 표현은 교회들이 주고받는 편지의 전형적인 인삿말입니다. (이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삿말에 대해서는 사카린 형제의 요한계시록 1장 해설을 참고 바랍니다.) 그러나 "전형적인"이라는 말이 "상투적인"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교회가 '거저얻음'과 '샬롬의 관계'를 인삿말로 쓰게 된 것에는 시대변혁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이 복음이고, 갈라디아 교회는 그 사건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지요. 그 사건에 대해서 바울은 4절부터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1:4,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개역한글 번역을 수정하고 싶습니다. 4절 앞에 "그"라는 말을 넣었어야지요! 원문에는 3절의 "예수 그리스도"와 4절의 "그리스도께서"가 관계대명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사건으로 그 근원이 되셨는지를 상술하는 내용이 4,5절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리신 사건, 곧 그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제물이 되어 죽어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거저 얻은 것'이고, 이 죽으심을 통해 사람을 포함한 만물과 '샬롬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 죽으심의 목적으로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와 "우리 죄를 위하여". 따라서 메시아의 십자가 죽으심 이후로는 '악한 세대에서 건짐받은 우리'가 존재합니다. 이 우리를 통해서 모든 시간은 반으로 나뉩니다. 우리가 존재하기 전과, 우리가 존재하고 난 후. 그 전과 후를 가르는 다른 표현이 있다면 우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입니다. 이 분명한 절단면을 교회를 구성하는 하나님 백성이 공통적으로 고백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쪼개졌고, 우리의 죄악된 과거는 사멸로, 우리의 새로운 현실은 완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세대"라고 번역된 희랍어 원문은 "아이온(αἰών)"입니다. '시대'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즉 악한 '시대'로부터 벗어나 '새 시대'를 누리는 사람들이 탄생한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이후 말입니다!(그래서 더글라스 무도 갈라디아서 머릿말의 표제를 "십자가와 새 시대"라 한 것이지요) 옛 언약에 속한 이들은 이 새 시대를 줄곧 염원해왔습니다. 율법이 완성되고 예언이 성취되는 바로 이 새로운 시간을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새로운 시간이 마침내 도래했고 그 도래는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건짐받은 사람들만이 고백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십자가를 통한 새 시대의 출범이 이미 이뤄졌고, 이 사실을 언급한 바울에게서는 찬양이 터져나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이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의 이야기가 바로 갈라디아 교회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누리게 된 새로운 시대는, 할례나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메시아 예수의 피뿌림을 통해서 시작되었어! 바로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의 공동체들과 함께 부르고 싶은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시작된 새 시대를 부정하는 것입니까? 이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세한 사건의 정황에 대해서는 바울이 6절부터 설명해줄 것입니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