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0.

  바리새인과 문법학자들에 대한 일곱 개의 화는 이제 다음의 한탄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한탄은 바리새인과 문법학자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도를 받고 있는 예루살렘 전체를 향한 한탄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도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는 예루살렘 안에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이 한탄을 하십니다. 즉 제자들이 기억할만큼 여러 번 같은 내용의 한탄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문맥을 얘기하자면,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자 정의로운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도망갈 것을 종용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답이 바로 아래의 본문, 마태복음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한탄입니다.


선지자들을 죽이는

너를 향해 보내진 이들을 돌로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얼마나 자주 내가 너의 아이들 모으기를 원하였던가!

새가 자신의 품은 것들을 그 날개들 아래로 모으는 방식으로,

그리고 너희들은 원하지 않았다.

보라, 너희들의 집이 버려질 것이다, 광야처럼.

즉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바로 지금부터 결코 나를 보지 못한다,

너희들이 이렇게 말할 때 까지. 


  '좋게 말되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즉 예수님은 헤롯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예루살렘에 의한 예언자의 죽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누구도 선생이 아니고, 누구도 아비가 아니고, 누구도 인도자가 아닙니다(마태복음 23:8~10). 그런데 누군가의 선생이 되고자 하고, 아비가 되고자 하고, 인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정당성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그 인정받음 없이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계약설'이 이점을 설명합니다.) 즉 국민이 자신의 권한을 통치권력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국가를 통치하는 주권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아진 힘(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서 사회가 병들었고, 따라서 그 권력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타납니다. 이 비판의 목소리를 잘 경청해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사회로의 갱신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예언자의 목소리야 말로,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만일 통치 권력을 위임받은 주권자가 권력을 사용해서 그 비판의 목소리를 막아버리려고 한다면? 이전 통념에 익숙한 사회가 예언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예언자의 입을 닫아버리고 그 통치를 유지하는데만 급급하다면? 사실 이러한 일들이 예루살렘에서 반복되었고 이제는 예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1. 마태복음 23:39

  마태복음 24:39가 신천지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므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너희들이 바로 지금부터 결코 나를 보지 못한다"에서 저 "너희들"은 1차적으로 누구인지부터 생각해봅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한탄하시고, "즉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저 너희들은 지금 예수의 말을 듣고 있는 "군중과 제자들"일 것입니다(23:1). 그리고 같은 내용이 나오는 누가복음 13장의 맥락에서도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서 군중과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지금 예수 앞에는 예수를 돕고자 하는 정의로운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누가복음 13:31). 바로 이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즉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모두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 저주일 수 없습니다.

2) 인용이니까 문맥을 확인해보자
  또한 저 "좋게 말되신(축복받으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시편 118:26의 인용입니다. 

시편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인용이니까 앞 뒤에 어떤 맥락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 25절은 이렇습니다.


시편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이 "구하옵나니, 구원하소서"를 줄이면 "호산나"입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때 불렀던 노래가 바로 시편 118:25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시편 118:25로 예수를 맞아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고, 예수께 우호적인 사람들이 아닙니까?

시편 118:26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본문의 '제물'이란 단어는 '하그'인데, 본래 '축제'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편 118:27,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에게 빛을 주셨다.
너희는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제단까지 축제 행렬을 벌여라.

  빛을 받은 이들은 볼 수 있습니다. 보는 이들은 손에 축제를 즐기는 나뭇가지들을 들고 제단으로 향합니다. 그 제단은 제물을 태우는 현장입니다. 즉 호산나의 찬양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 대한 환영이 있고, 그 뒤에는 제물의 불태움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이때 태워지는 제물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지점이 이스라엘이 보지 못하는 지점입니다. 다름 아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불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장면에서부터 축제가 벌어질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곱씹어보면, 그이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바로 지금부터(ἀπ’ ἄρτι)" 너희들이 나를 못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쉬운 것은 희랍어 성경에는 있는 "바로 지금부터"를 대부분의 역본이 번역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금부터"는 이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십자가를 지셔야만 한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시편 문맥은 제물 이야기의 굴곡을 지나 다시 감사로 돌아갑니다.

시편 118:28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불과 얼마 전 호산나의 찬양을 받았던 예수께서 그 다음 구절인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인용하셨고,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제물의 불태움이며, 그 뒤에 찾아오는 감사입니다. 제단에서 기뻐하는 이들은, 그 제물의 수혜자들일 것입니다. 


3) '보다'는 '알아보다'
  예루살렘 사회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문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권력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감춰두었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문제를 드러내시려는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이질적이고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예수를 따르던 이들도 예수가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충격적인 모습 마저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찬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나를 보지 못한다"에서 "보다"는 단순히 육안으로 '보다'는 단순히 '육안으로 보다'라는 뜻 외에 '이해하다, 인지하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주의하라"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8:15)

  다시 본문을 읽고 예수께서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즉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바로 지금부터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너희들이 이렇게 말할 때 까지. 


  '좋게 말되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유대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이스라엘에게 예수는 극도로 낯선 분입니다. 그러나 그 낯섬을 끌어안지 않으면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낯섬'이란 바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번제단에서 드려지는 상황, 십자 형태의 말뚝에 발가벗겨진 채로 매달려 계신,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의 형상일 것입니다. 그리고 왜 유대 권력과 로마 권력이 그이를 십자 말뚝에 매달아 둘 수 밖에 없었는지의 문제가, 바로 그이를 따르는 이들의 문제, 예언자적 공동체의 문제일 것입니다. 

  정리하면, 마태복음 23:39는 1)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2) 시편 문맥을 인용하신 말씀이고, 3) 십자가에 못박히는 자신을 이해하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마치 로마의 백부장처럼 말입니다.

마가복음 15:39, 개역개정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마태복음 24장으로 들어갑니다. 아니, 그 본문은 들어가는 본문이 아니라, 나오는 본문입니다.

2. 마태복음 24장은 나오는 이야기

마태복음 24:1~3, 개인번역


  그리고 예수는 그 성전으로부터 나와서 떠나셨다, 그리고 그이의 제자들은 예수께 그 성전 건물을 내세우려고 앞으로 왔다. 그런데 그이는 그들에게 대답하며 말하셨다.


"너희들은 이 모든 것들을 보고있지 않느냐?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씀한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돌 위에 
여기 돌이 
결코 남지 않으리라."


  그런데 그이가 올리브 나무들의 산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사적으로 앞으로 왔고 말했다.


"우리에게 말하소서,

그런 것들이 언제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파루시아에 관한 (표적)과 

'이 시대'의 끝에 관한 표적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4장은 성전으로부터 나와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나귀들을 타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하신 이후, 긴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마치시고 이제 밖으로 나오시는 예수께 제자들은, 건물 성전의 위용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루실 개혁이 건물 성전 중심으로 벌어질 이스라엘 권력 질서의 재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중심은 헤롯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이 모두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1~23장을 온통 들어도 자신들의 생각을 재고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건물 성전이 무너진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개인적으로 나가가 질문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파루시아의 표적"과 "이 시대 끝에 관한 표적"입니다.

  일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은 표적을 구했고, "당신의 파루시아"와 "이 시대의 끝"은 동일시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이 시대의 끝"이란 말을 제자가 어떤 의도로 사용했을지를 생각해봅시다.

1) 이 시대 끝

  "끝"이란 단어는 '쉰텔레이아(συντελεια)'의 번역어입니다. 그런데 희랍어에는 이 '끝'에는 종류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끝내다"라는 동사, '텔레오(τελεω)' 앞에 여러 접두어를 붙여서 동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쉰텔레이아는 '함께+끝'입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쉰텔레이아의 용례를 살펴보면, 일단 마태복음에만 6번,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1번 등장할 뿐입니다. 마태복음, 히브리서 모두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기록임을 감안한다면, 저 쉰텔레이아는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에게 익숙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쉰텔레이오라는 동사 형태는 다른 곳에서도 보이긴 합니다. 누가복음 4장의 예수님께서 40일간의 시험을 마치셨을 때, 이 '마치다'가 쉰텔레이오가 쓰였고, 요한복음 2장의 결혼식의 포도주가 "떨어진 것"도 같은 동사입니다. 사도행전 21:27에서는 "7일이 '끝날' 무렵"으로 쓰였습니다. 즉 '어떤 기간의 마침',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나면 특정 행동이 함께 이어지는 맥락에서 쓰입니다.

로마서 9:28, 개역개정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긴 쉰텔레이오가 '이루고' 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마치고'로 봐야 합니다. 이제 주께서 말 다 했으니, 이제 그 말대로 속히 시행하겠다고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13:4에도 쉰텔레이오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13:4, 개역한글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때 '이루다'로 번역된 단어가 쉰텔레이오입니다. 모든 일이 '마치려 할 때에'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즉 악한 모든 것이 끝날 것이고, 그 끝과 함께 새로운 시작이 도래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루다'는 말은 모든 것의 끝과 새로움의 시작으로 구성됨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시대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올람 하제'이고, 다른 하나는 '올람 하바'입니다. 올람 하제는 일반적으로 "현 시대"로 번역하는데, 다니엘 7장이 보여주듯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짐승들의 시대입니다. 유대인들이 고대했던 것은 이 현 시대의 끝이었고, 이 끝과 함께 도래하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 새로운 시작을 올람 하바, "오는 시대"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이 올람 하제의 끝이자 올람 하바가 시작되는 중심이 '성전'입니다. 지난 주에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누카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성전이 능욕당했을 때, 마카비 가문의 형제들이 분기탱천하여 시리아를 몰아내고, 다시 성전을 봉헌했던 날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이것을 마키비 혁명(B.C. 167)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메시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규정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메시아는 1) 이방 민족을 몰아내야 하고, 2) 성전을 깨끗게 해야 합니다. 올람하제는 이방에 의해 성전이 모욕당하는 시대요, 올람 하바는 이방민족이 심판받고 그 성전이 깨끗하게 되어 마침내 펼쳐지는 새 시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현 시대가 끝나고 오는 시대만을 고대하고 있는 제자들이 놀라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그 중심이 건물 성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에 메시아가 오시기만 하면, 성전은 정화되고, 이방 민족들은 유대인들의 발 아래 꿇게 될 것인데(이로소 올람 하바가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그 끝과 시작의 분기점인 성전이 무너진다는 말은 제자들의 통념을 온통 산산조각내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 쉰텔레이아는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도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3:39, 40, 4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이 "세상 끝"을 "현시대의 끝/오는시대의 시작"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9:26과 통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 당신의 파루시아

  당신의 파루시아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가 됩니다. 파루시아는 기본적으로 '왕의 행차'를 가리킵니다. 로마 황제가 자신의 점령 지역을 방문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에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병행본문인 마가복음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모든 일이 쉰텔레이오할 때(마가복음 13:4)" 라는 표현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에게 있어서 파루시아는 메시아가 마침내 성전에 입성하시는 것이 파루시아입니다. 

  그 파루시아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하는 두 가지 임무가 수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성전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둘은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파루시아에 대해 다음의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셨는가?
-성전은 깨끗게 되었는가?

-이방 민족은 심판을 받았는가?

-오는시대는 마침내 도래했는가?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셨고, 그 성전은 곧 완전한 부활의 몸이었므로 깨끗한 몸이었습니다. 그 예수의 몸이 현시대를 끝내고, 오는시대를 시작하는 중심입니다. 세례는 그 예수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참여'의 의미는 내 몸으로 현시대를 끝내고 오는시대를 시작해서, 내 몸 역시 새 시대의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새 성전이 되는 길"을 거절하는 것 자체가 심판이고, 새 성전들에게 오는시대는 "이미"라는 말로 포착됩니다.

3) 표적이 필요없는 사람
  따라서 현시대의 끝/오는시대의 시작을 확인하게 하는 표적은, 자신의 몸입니다. 부활로 살아가는 자신의 몸이, 이제 현시대가 이 몸성전에서 종결되었음을 확인하게 하는 유일한 표적입니다. 따라서 표적을 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 표적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께서 마태복음에만 두 번 반복하신 이 표적 담론은, 새 시대를 확인하고 싶어할 뿐 결코 자신이 새 시대를 스스로 이뤄가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규정합니다. 악은 욕망의 자동성을 의미합니다. 욕망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욕망을 자동적으로 반복하고 있음 자체가 악마적입니다. 이것을 끊어야 하는데, 끊지는 않고서(악하고), 타인의 쾌락을 확인하려고만 하는 관음(음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안은 요나의 표적입니다. 3일의 끊음과 이후 새로운 삶의 태도로 살아가는 부활입니다. 유대인들이 쉰텔레이아라는 단어를 통해서 포착하고 있던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몸에도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표적이 필요없습니다. 자신이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1,2, 개인번역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여러분을 가까이서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세요. 이러한 제사가 이치(말씀)에 맞는 여러분의 예배입니다. 이 '현시대'의 틀에 자신을 맞추지 마세요. 오직 생각을 위로부터 새롭게 함으로 변신 되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보고 인정하는데 이르세요. 그 뜻은 하나님을 닮아 좋고, 받아들일만 하며, 온전한 목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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