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히브리서 10:1~10, 개인번역

 

[1]

  왜냐하면 노모스는 금세 도래할 좋은 것들의 그림자(σκιά)를 갖지만,
그 문제(쟁점)들의 에이콘 그 자체는 아니며,
해를 따라서 그 디에네케스 속으로 봉헌되는 희생제물 자체로는
앞으로 나아오는 이들이 과정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단번에 깨끗해진 예배자들이 어떤 비뚤어짐에 속한 양심도 갖지 않는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봉헌되던 것들은 중단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들 안에서 비뚤어짐들의 상기가 해를 따라 있다,
(즉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가 비뚤어짐들을 잘라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코스모스 속으로 들어오셨던 이가 말씀하셨다,

 

  차이를 만들고 그 사이에 의미를 기입한다. 기입된 의미는 지나간 것 마저도 새롭게 한다. 히브리서가 노모스에 부여하는 의미를 살펴보자. 일단 10:1~18이 키아스무스 구조로 이뤄져있다는 사실을 염두해둔다면, 전체 의미를 파악하기 용이할 것이다.


  A. 율법의 한계 : 과정을 끝낼 수 없는 제사들

    B. 의식 속에서 비뚤어짐을 망각하게 하는 한 번의 제사
      C.

    B'. 하나의 희생과 새로운 시간
  A'. 율법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 계약


  토마스 슈라이너와 달리 C를 비워둔 것은 이 키아스무스 구조 안에 분명히 반전의 요소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다. 오히려 히브리서는 충격적인 개념으로 넘쳐나는데, 저 키아스무스를 그저 앞 뒤가 같은 대리운전 전화번호로 파악하는 것은, A, B를 A', B'되게 만들었던 핵심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일단 그 C가 무엇인지는 18절까지 보고서 생각해보자.

-이 쟁점들의 에이콘(εικων)
  본문에서 노모스는 '그림자'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림자는 지시하면서도 그 지시 자체는 형상(εικων)이 아니다. 즉 금세 도래할 좋은 것들을 지시하면서도, 그 금세 도래할 좋은 것들은 아닌 것이다. 아닌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그 금세 도래할 좋은 것들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장애가 되기도 한다. 마치 플라톤의 동글의 그림자 같이, 또 칸트가 인용한 부아스Bouasse의 도식에 등장하는 거울 이미지 같이.

  그렇다면 그림자가 지시하고 있던 '형상'이란 무엇인가? 희랍어로는 '에이콘'이라 읽는데, 골로새서 1:5에도 등장한다. 이때 에이콘의 의미는 대개 "보이지 않으시는(τοῦ ἀοράτου)"이란 수식어에 의해 규정된다. 즉 보이지 않는 님, 그의 보이는 에이콘으로서 예수. 

 

  그렇다면 히브리서 본문에서도 에이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무언가'로 사용되었는가? NIV에서는 realities themselves라 번역했고 슈라이너는 이 번역에 만족한다. 그가 이러한 번역에 만족하는 이유는, 그가 realitues를 새 예루살렘에 위치시키고, 오히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은 "짧은 시간 뒤에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에이콘은 골로새서 1:15의 구분을 뒤집은 것이다. 에이콘은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보이지 않는 편에 속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을 현실(realities themselves)이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는 비현실적인 관점이다.

  에이콘에 수식된 것은 문제들(πραγματων)이다(새번역과 개역한글은 번역에서 제외해버렸다). 

누가복음 1:1, 새번역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6:1, 새번역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위의 몇몇 구절을 보면서 '프랑마(πραγμα)'의 의미를 감 잡아보자. 프랑마는 '현실에서 쟁점이 되는 사안'을 의미한다. 그리고 형상이 아니라 이 단어야 말로 realites에 가깝다. 형상은 이 쟁점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히브리서에서 논하고 있는 이 쟁점들을 뚫어낼 수 있는 한 점을 의미한다. 즉 형상은 언제나 쟁점들 사이에 있다. 쟁점들이 지시하고 있으나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공백이 형상이다. 따라서 쟁점의 그물망 안에서 형상은 그 그물망이 아직 포착하지 못한 공백이다. 신이라는 쟁점에 있어서, 생각해보지 못한 해답이 예수이듯이 말이다. 본문은 저 프랑마를 복수로, 그것도 정관사까지 붙여서 쓰고 있다. 그리고 노모스는 "이 쟁점들"의 에이콘이 아니라 그저 이 쟁점들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기자는 답을 주지 못하는 노모스에게 1) 에이콘을 지시하고 있으나, 2) 에이콘 자체는 아닌 그림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에이콘'을 현실의 쟁점들 안에 속해있지만, 그럼에도 쟁점들 자체가 아닌 쟁점들의 공백으로서의 해법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치 성막 안에 둘러싸인 메시아적 시간처럼. 또 첫 번째 계약의 공백에서 드러나 첫 번째 계약의 곤궁을 해결하는 두 번째 계약처럼.

-과정을 마침/누림이 시작됨, 에이콘 속에서
  텔레오(τελεω) 계열의 여러 동사들이 그저 '이루다', '성취하다'로 애둘러 번역되는 것이 현실인지라, 전부터 그 의미차이를 규명하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히브리서 쟁점들에 대한 나의 대화자 토마스 슈라이너는 '텔레이오(τελειοω)'에 대해서 유익한 내용을 많이 전달해주었는데, 가장 유익했던 것은 Cockerill과 Constantine R. Cambell의 말이었는데, 내가 생각하던 텔레이오스의 의미와 부합하는 말들이었다.

  "의도된 목적으로 데려감"
  "그것의 성취와 관련해선 과거에, 그것을 누리는 것과 관련해서는 현재에 자리매김 해야"

  Cockerill의 인용에서 '의도된 목적'을 나는 '끝'이라 부른다. 그리고 R. Cambell이 말하는 것처럼 텔레이오는 '끝'과 '누림'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그러나 하나는 과거로, 하나는 현재로 자리매김하자는 그의 말을 연대기적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끝(성취)은 곧바로 누림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낳는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저 '누림'이 히브리서에만 독특하게 사용되는 단어 καταπαυσις라 생각한다. 그리고 "곧바로"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사실은 토라의 끝과 안식은 서로 맞닿아 있는 매순간의 의식으로 읽고 있다. 즉 토라와 안식의 관계는 연대기적 시간 위에서의 순서가 아니라, 매순간의 인식에서의 분할인 것이다. 새로운 인식 속에서 주체는 토라를 끝내면서 안식을 누린다.

  텔레이오의 의미를 조금 더 구체화하자면, '부과된 과정을 끝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히브리서 7:19, 개인번역
즉 율법은 이루지 못했다,
(οὐδὲν γὰρ ἐτελείωσεν ὁ νόμος)

  이때도 '이루지 못했다'를 '부과된 과정을 끝내지 못했다'로 읽고,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할 수 밖에 없다'로 이해했어야 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9:9, 개인번역
선물들과 희생들이 앞으로 드려지는데,
양심을 따라 그 고용된 것들(λατρεύοντα)을 이룰 수 없다.

  히브리서 9:9에서도 '이룰 수 없다'를 '부과된 과정을 끝내지 못했다'로 읽는다면, 그 이유가 바로 양심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제사를 계속 드려도 깨끗하지 못한 잔여물이 계속 양심에 남아있기 때문에, 자아는 만족할 수 없었고, 따라서 제사 제도라는 부과된 과정이 끝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과된 과정이 끝날 수도 없기 때문에 카타파우시스로의 진입 또한 불가능했던 것이다. 즉 양심에 죄책의 잔여물이야 말로 제사제도를 반복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히브리서 10장에서 기자가 던지는 질문은 양심 속에서 절합된 토라 끝과 쉼의 시작을 잘 드러내지 않는가?

"단번에 깨끗해진 예배자들이 어떤 비뚤어짐에 속한 양심도 갖지 않는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봉헌되던 것들은 중단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때 양심을 도덕성이 아닌, 인식이나 의식으로 읽어야 한다(영역본에서는 그야말로 consciousness라 번역한다). 희랍어로는 συνειδος인데, 이 단어는 '에이도스와 함께'라고 파자할 수 있고, 이때 에이도스는 에이콘과 같은 계열의 단어이다. 즉 쟁점 사이에 있는 공백이 양심이고, 그 공백은 공백으로 남아있으려는 매순간의 끝냄 속에서만 쟁점들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단번에 깨끗해진"에서 "단번에"라는 부사를 통해서는 메시아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고, "깨끗해진"은 9:14에서 양심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히브리서 9:14, 개인번역
(오는시대의 숨결을 통해 그 자신을 님께 흠없이 앞에 드리신) 그 메시아의 피는
너희들의 그 양심을 시체상태의 일들에서부터
사시는 님께의 고용된 일 속으로 얼마나 더 깨끗게 하겠는가?


-디에네케스를 구원하기
  '디에(δια)'는 '꿰뚫음'을 '네케스'는 '나르다'는 의미의 페로(φερω)의 변형이다. carried through. 뚫고 데려감이다. "항상", "늘"이라 번역된다. 디에네케스(διηνεκες)는 성경에서 히브리서에서만 네 번 출현하는데 모두 오늘 본문인 10장에 무려 세 번 포진해있다(7:3, 10:1,12,14). 그런데 혹 이 디에케네스가 그저 굴곡없는 '항상'이 아니라, 그 앞에 붙은 전치사가 보여주듯, 어느 지점으로의 도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 도달은 어떠한 모종의 과정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텔레이오 안에 내포된 바로 그것을?

히브리서 7:3, 개인번역
아비없이, 어미없이, 족보없이,
날들의 시작도 삶의 끝도 갖지 않고,
그 하나님의 그 아들과 닮음으로 되어,
그는 제사장으로서 밑도 끝도 없이 남는다.

  우리는 이미 히브리서 7장에서 디에네케스를 본 적이 있다. 이때는 에이스 토 디에네케스εις το διηνεκς를 "밑도 끝도 없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때 사전에서 찾은 뜻을 각주로 달아놓았다.

  "continuous, unbroken, from beginning to end"

  왜 이 단어들이 있는지 이유가 보인다. 일단 '디에네케스'의 '디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갈라졌다. 디아를 관통의 의미로 본다면 from beginning to end가 된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해서 데려가는 것이다. 이때 처음과 끝을 상정하지 않고, 과정만 생각한다면 continuous로 읽을 수 있겠다. 그런데 '디아'를 '둘'로 본다면, 이미 갈라져있던 '둘'이 같은 목적지(εις το)로 가져와졌다는 의미로 unbroken이 될 수도 있다. (영어 different도 두 개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랐기 때문에 '다른'이 된 것이다.) 즉 unbroken으로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서로 다른(diffenrent) 상태로 brocken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추가
  <Phinehas, the Sons of Zadok, and Melchizedek>에서 확인한 내용은, 히브리서 7:15에서 인용하고 있는 시편 110:4(LXX 109:4)과의 비교를 통해 διηδεκες의 의미를 추론하는 방식이다.

  ὤμοσε Κύριος καὶ οὐ μεταμεληθήσεται· σὺ ἱερεὺς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εδέκ.

  LXX는 멜기세덱의 영원성을 설명하기 위해
'εἰς τὸν αἰῶνα'을 쓴다. 그런데 기자는 이것을 의도적으로 'εις το διηνεκες'로 고쳐 쓴다. διηνεκες는 오는시대를 가리킨다. 성막이라는 공간으로의 진입은 새로운 시간으로의 진입에 대한 표상 아닌가? 그래서 διηνεκες를 '성막'으로 고쳐 읽어도, 혹은 '오는시대'로 고쳐 읽어도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비뚤어짐을 잊을 수만 있다면
  비뚤어짐이라고 번역한 것은 '하마르티아'인데, 이는 '모르고 지은 죄'를 의미한다. 즉 인간의 무의식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자신은 줄곧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인식 자체가 죄의식이다. 그리고 이 죄의식은 제사제도의 정당성이면서도, 제사제도는 결코 그 죄의식을 잘라버리지 못한다(본문의 "잘라내다"는 베드로가 군병의 귀를 잘랐을 때 쓰였던 동사이다. 아파이레오αφαιρεω).
  오히려 상기시킬 뿐이다. '나는 희생제물이 필요한 사람이지' 이걸 꾸준히 되뇌이는 것의 부작용은, 모르고 죄를 짓기는 커녕, 모르고 선을 행할 가능성 자체의 차단이다. 누림에 대한 거절이다.

 

   "'당신은 희생과 봉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은 나에게 몸을 짜주셨습니다.
   당신은 비뚤어짐들에 관한 번제들도 좋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

     그때 내가 말하길,

    '보시옵소서! 제가 왔습니다,
    (책의 머리에 나에 관해 쓰여있었습니다),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당신의 싶음을.'

  더 위에 말씀하시기를,

  "희생들과 봉헌들과 비뚤어짐들에 관한 번제들도
  그분은 바라지 않으셨고, 좋게 생각하지도 않으셨다."
  (이것들은 노모스를 따라 봉헌되는 것들이다)

  그때 말씀하셨다,

  "보시옵소서! 제가 왔습니다,
  당신의 싶음을 행하기 위해서."

  그이는 그 첫 번째 것을 위로 들어버리신다,
이는 그 두 번째 것을 세우기 위함이다.
이 두번째 싶음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
메시아 예수의 그 몸을 단번에 봉헌하심을 통하여.


  기자는 시편 40편을 인용한다.

시편 40:6~8, 새번역
주님께서는 내 두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사나 예물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번제나 속죄제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내가 지금 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기자는 '법의 위치 이동'을 말하는 구약 구절을 다시 인용했다("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주목할 만한 점은 시편에는 "귀"라 쓰인 것을 기자는 "몸"이라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님이 메시아께 짜주신(καταρτίζω) 몸은 곧 부활의 몸일텐데, 기자는 시편의 '귀'를 제유법으로, 그것도 부활의 몸으로 읽고 있다. 즉 부활의 몸은 감각기관을 벗어난 추상적 개념이 아닌, 우리의 감각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무엇이다. 주판치치는 윤리를 위해서는 영혼불멸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칸트의 주장에서, 요청되어야 할 것은 영혼불멸이 아니라 몸의 불멸이라 말한다. 윤리는 감각과 무관한 영혼의 일이 아니라, 감각을 수반한 몸을 매개로만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님은 비뚤어짐을 위한 제사, 즉 속죄제사를 좋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속죄제사가 비뚤어짐을 잘라낼 수 없기 때문이다.

-뜻? 욕망!
  히브리서 본문을 보기 전에 먼저 연구하게 된 본문은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 빚진 노예 이야기였다. 그때 내 시선을 붙잡은 대목은, 노예가 자신이 주인에게 했던대로 간청하는 자의 멱살을 붙잡았을 때, 그에 대한 예수의 해설이다.

마태복음 18:30, 개인번역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고(ὁ δὲ οὐκ ἤθελεν),

  그는 주인의 용서와 같은 조건이 주어졌더라도, 그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신의 긍휼도 거저라면, 인간의 악행에도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신과 같이 하고 싶지 않다면, 그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악의적으로 재사용할 수 있다. 이 욕망의 차원에서 악은 선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선을 패러디하는 것이다.

     '보시옵소서! 제가 왔습니다,
    (책의 머리에 나에 관해 쓰여있었습니다),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당신의 싶음을.'

  시편 40편의 다윗의 목소리에서 기자는 메시아의 목소리를 듣는다. 다윗과 메시아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저 '당신의 싶음'이고, 마태복음 18:30의 동사와 같은 계열의 단어이다. 토 뗄레마 수(τὸ θέλημά σου). 뗄레마는 주로 '뜻'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뜻은 무엇인가?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그 무시간적 진리에 대한 지식이 곧 신의 뜻인가? 신이 가진 논리 체계를 우리는 신의 뜻이라 말할 수 있는가? '뗄레마'는 동사 '뗄레오(θελεω)'의 명사형이므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원함'이다. '~하고 싶음', 곧 신의 뜻은 신의 욕망이다.

  다윗도 메시아도 신과 같은 '싶음'을 가지고 있다. 메시아는 바로 그 신의 '싶음'을 위해서 왔다고 말한다. 죄책의 잔여를 위한 제사들이 신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신은 비뚤어짐이라 언표된 그 인간의 곤경에서 풀어주고 싶었고, 그 동일한 싶음으로 메시아는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들리셨을 때, 첫 번째 계약도 함께 들려서 제도로서의 부적절함을 드러냈고(이는 곧 내면화의 요청이었다), 두 번째 계약에 속하여 메시아는 다시 감각을 가진 새 몸으로 세워지셨다.

  토마스 슈라이너는 10절을 확정적(positional) 성화인지 점진적(progressive) 성화인지의 논의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본문의 방점은 그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거룩해지는지, 아니면 거룩하진 않지만 거룩한 편으로 위치 이동한 것인지에 있지 않다(전자는 사드고 후자는 돈 주앙이 아닌가?). 문두에 있는 "그 두 번째 싶음 안에서(ἐν ᾧ θελήματ)"에서 그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 "둘째 것의 탁월성과 최종적 제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하지만, 정작 그 탁월함과 최종성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뿌옇다. 그 두 번째 계약은 그의 말대로 "새로운...효과적이고 결정적이다." 그러나 그 좋은 두 번째 계약이 정작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별로 말해주지 않은 채, 신자들은 거룩하고 정결하기 때문에 다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결론으로 도약한다.
  10절의 내용을 살펴보자. '신의 싶음'은 그 두 번째 계약을 세우기 위해 첫 번째 계약을 들어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싶음을 위해 메시아 예수는 자신의 몸을 드리셨다. 신과 예수가 '싶음'을 공유한 결과가 두 번째 계약이며, 그 신과 예수 사이에 우리가 거룩해져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거룩'은 우리 역시 신과 에수의 '싶음'을 공유하는 것, 신과 예수의 교제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 두번째 싶음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

 

  이 거룩을 점으로 표시할지, 선으로 표시할지의 문제인가? 아니면 신의 뗄레마의 문제인가? 어쩌면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간 신의 말 속에서 그의 욕망을 제거해버리는 작업을 성실히 해왔던 것은 아닐까? 신의 목소리에서 정념이 제거 되었을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삶과 무관한 논리 뭉치 뿐이다. 신이 정념적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만큼, 신이 비정념적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신의 욕망을 빼고 텍스트에 남는 것은 공백에 무언가가 '있다'는 가상의 존재론 뿐일텐데, 이것이 신의 뜻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서두에 살펴보았던 키아스무스의 마지막 조각을 끼워넣을 시간이 되었다.

A. 되풀이 되는 제사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율법의 불충분성

  B. 되풀이 되는 제사들은 단번의 제사로 폐지됨
    C.

  B'. 레위 계열 제사장들은 멜기세덱적 제사장 예수로 대체됨

A'. 더 이상의 속죄제사가 필요없는 새 언약의 충분성

  여기서 C는 '거룩하게 된 우리' 를 놓고 싶다. 오늘 본문에서 처음 등장한 주어이자, 신과 메시아가 공유하는 싶음의 결과로서 우리. 거룩이 우리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나의 욕망과 떨어뜨려놓고 나를 상상할 수 없듯이, 이제 본문이 '우리'라 부르는 이들은 거룩이라는 욕망과 자기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들의 인식은 매순간 토라의 종결과 두 번째 계약의 누림이 절합되어 있고, 그렇게 분할되었음에도 통합된 인격으로 쟁점들의 에이콘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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