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히브리서 8:1~13, 개인번역

(1) 그런데 이 말된 것들에게 특이점은,
우리가 그러한 제사장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이는 하늘들 안의 위대한 왕좌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2) 그 거룩한 이들과 참 장막의 섬기시는 이이며,
그 장막을 주께서 펴셨다, 사람이 아니라.)


-요약? 요점?
  '케팔라이온'을 요약으로 읽느냐, 요점으로 읽느냐의 논쟁이 있다. 개역한글은 '중요한 것'이라는 애매한 말로 처리했고, 새번역은 '요점'이라 번역했다. 사전을 찾아보면 "높은 자리, 주된 자리" 또는 "계산된 돈의 합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기본적인 의미는 머리(κεφαλη)에서 왔다. 즉 케팔라이온은 거칠게 직역하자면 "머리적인 것"이다.

  머리는 전체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런데 이 '관련'이란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머리와 전체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는 specific/general(종적 특수성/유적 일반성)의 구분을 넘어서 singularity/universal(독특성/보편성)을 읽자고 말한다. 이 구분에 따라 케팔라이온의 번역도 두 가지로 갈라진다. 즉 케팔라이온은 1) 전체를 지배하는 예외적 머리로도 읽을 수 있고, 그와 달리, 2) 전체 안에 포함되어 있는, 그러나 전체라는 이름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이점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논의는 라캉의 성차공식과도 연관되는데,  머리를 공간상 예외라고 생각한다면(즉 데카르트식으로 몸을 통제하는 마징가 제트의 머리처럼), 그 머리는 몸이 아무리 커져봐야 도달할 수 없는 예외적 장소일 뿐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예외적 장소에 대해 (모르면서) 무언가 자꾸 말하려고 할수록, 역학적 이율배반에 봉착한다.

 



  '요약'이란 그렇다. 내용 전체가 모여서 요약으로 승화한다. 그런데 이 승화된 요약은 전체와 다르고, 전체가 없어도 요약만으로 기능하며(몸이 없어도 비행기로 기능할 수 있는 마징가 제트 머리처럼), (합체 이후) 전체는 이 요약에 의해 규정된다. 또 전체는 이 요약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즉 케팔라이온을 전체로부터 분리되는 진술로서 요약으로 번역한다면, 이는 주인 기표를 예외로 처리하는 남성적 사고방식인 것이다. [바울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κεφαλη)가 되고, 메시아는 남편의 머리가 된다고 했을 때, 이 해석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 머리는 여성을 일반적인 종류로 환원시키고, 남성을 종적 특수성을 가진 예외자로 상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이러한 가정이 나머지 전체 현실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외자에 의해서 전체는 규정되는데 그 규정은 폐쇄적 규정, 법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케팔라이온은 사도행전 22:28에서는 "많은 돈"으로 번역된다. 천부장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많은 돈"을 지불했다고 말하는데, 이때 많은 돈이 "폴루 케팔리우(πολλου κεφαλιου)", 즉 많은(다층적인) 케팔라이온이다. 이때 케팔라이온은 천부장의 시각에서 남성적 예외로 읽어야 하는데, 이는 돈이 여러(πολλυ) 상황을 지배하게 하는 예외 권력이며, 천부장이 얻은 로마 시민권이란, 그 예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돈을 모아서 맞바꾼 것은, 더 강한 권력, 곧 당대 최강의 제국에 속하게 될 권한인 것이다. 즉 '예외'를 모아 '귀속'을 산다. 그런데 그 '귀속'은 다시 '예외'로서 남기 위함이다. 예외가 되려함과 예외가 되지 않으려함 사이의 간극에 천부장의 찌그러진 인격이 있다. 머리가 되려는 그는 더 큰 몸의 일부가 되고자 하고, 더 큰 몸의 일부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여전히 머리로 남고자 한다. 즉 천부장은 식민지인의 머리로, 로마 제국의 몸으로 어긋나 있는 존재다. 그는 머리이자 몸인 기형적 형상으로서, 누구를 대면하는지에 따라서 자기 자신이 결정되는 상징계의 빗금쳐진 주체의 형상이다.

  천부장은 바울에게 로마 시민권자인지를 묻는다. 바울은 이렇게 답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천부장이 그토록 얻고자 애썼던, 그리고 이미 얻었다고 여겼으나 여전히 그것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로마 시민권에 대해서 바울의 대답은 간결하기만 하다.
이때 바울에게 로마 시민권은 종적 특수성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시작된 특이점으로 읽히는 것은 아닌가? 그에게 로마 시민권은 예외적 권력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계의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 여러가지 조건들 중 하나가 아닌가? 바울의 간결한 대답이 천부장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한 편에서 로마 시민권은 예외적 권력을 얻고자 많은 머리들을 희생시켜 얻은 것이라면, 유대인으로서 바울에게는 자신도 죄로 가득한 세상의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시키는 '예외 아님'의 표지에 지나지 않았다. 즉 천부장에게는 구성적 예외로서 대상a인 것이 바울에겐 여성편 포함된 특이점으로 읽혔던 것이다. 남성 편에서는 자기 존재를 팔아서도 얻을 수 없는 무언가인 반면, 여성 편에서는 무에서부터 구성된 존재의 구성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로마 시민권은 자기 자신이 시작된 특이점이지, 타인에게 예외적 권력으로 군림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구성적 예외 권력에 대한 결핍은, 천부장을 머리를 찾기 위해 쉬지 못하면서도, 정작 머리 없이 돌아다니게 만든 근본 원인이다. 머리를 얻고자 많은 케팔라이온을 희생시키지만, 결국 그는 머리를 희생시킬 수는 있어도 얻을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우열이 발생한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에 의한 우열은 천부장에게서만 발생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는 없고, '열'과 '더 열'만 있을 뿐이다. 존재의 특이점으로서가 아닌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이해되는 로마 시민권은, 그가 특정 사람들과 대면할 때 덜 열등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태생적 로마 시민권자를 만나게 되면, 오히려 자신은 가짜라는 사실을, 즉 자신의 열등함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 된다. 천부장에게 있어서 바울이야말로 가장 부러운 사람일 것이다. 그러한 바울을 자신이 결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두 번 충격받지 않았을까? 시민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해를 당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에 한 번(본인은 비로마시민으로서 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시민권을 산 것이리라), 자신이 생각하지 않았던 가능성이 실제로 발생한 것을 넘어 그 그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져야 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고난 당하는 로마 시민권자 바울을 대면하는 천부장은, 자신의 손에 의해 산산조각난 욕망이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상황을 대면하고 있다. 산산조각난 욕망은 그에게 그 욕망이 거짓이라고 말해준다. 이 사실을 대면하는 천부장에게는 불안이라는 증상이 동반된다(행 22:29,30).


  케팔라이온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길어졌다. 기자는 앞에서 멜기세덱의 질서를 따르는 대제사장은 "예외의 예외"로서, "옛적에(히1:1)" 예외 권력으로 기능했던 레위적 제사장들을, 다시 보편화시킨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구성적 예외로서 대제사장이 아니라, 보편 세계에 포획되어 있는 특이점으로서의 대제사장이다("우리가 그러한 제사장을 '가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라는 글에 있어서도 케팔라이온은 구성적 예외로 기능하는 '요약'일 수 없다. '요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사실이나 관점"이라 되어 있다. 아마도 새번역은 영어 번역본을 반영하여 point를 "요점"이라 번역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point가 구성적 예외인 요약이라면, 이러한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이렇게 읽는 독자도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개역한글의 애매한 번역으로 돌아간다. "중요한 것", 이 애매한 번역은 잘못되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 단어 안에 기입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왜 중요한가? 바로 우리가 이러한 제사장을 가졌다는 사건이, "이 말된 것들 안에서 말된 것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하는 특이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번역을 해본다.

  "그런데 이 말된 것들은, 이 중요한 사건에 의해서, 또 이 중요한 사건과 함께 새로워진다."

  이렇듯 특이점으로 이해하는 케팔라이온은 에베소서 1:10의 '아나케팔라이오마이'과도 공명한다.


에베소서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메시아 안에서 특이점이 되게 하려(ανακεφαλιομαι) 하심이라.

  특이점은 밖에 있지 않다. "우리가 그러한 제사장을 '가졌다'는 것이다" 지난 주 멜기세덱의 질서를 따르는 제사장을 '예외의 예외'라고 할 때, 그 예외 역시 구성적 예외로서 전체를 폐쇄적으로 규정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한 적절한 답변은, 이미 모든 존재는 구성적 권력의 예외라고 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외의 예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특이점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메시아는 그 사실을 알게 한다. 따라서 메시아를 아는 것은 메시아를 가진 것이고, '메시아를 가졌다'는 고백은 자신이 구성적 예외 아래 종속되는 존재가 아닌, 특이점을 가진 예외의 예외로서 살겠다는 주체적 결단과 같은 것이다. 멜기세덱의 질서를 따르는 제사장은 밖에 있지 않다. 우리가 안에 있듯이 말이다.

-예수는 어디로 승천하셨나? : 사건
  기자는 우리가 제사장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가진 그 제사장이 하늘들 안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늘"과 "가짐(소유)"는 또다시 이질적인 의미의 층을 구성한다. 우리는 하늘을 가질 수 없고, 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땅에 속한 것이라는 구획 설정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 마저도 공간적 예외, 혹은 구성적 예외로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이는 "하늘들 안의 위대한 왕좌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이때 "하늘들"도 구성적 예외가 아니라면, 하늘들 역시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직면하는 일상, 현실의 차원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왕좌'는 전차 위에 얹어놓은 좌석으로서 전투하기 위해 출정하는 왕이 앉는 자리이다. 그리고 "오른쪽"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늘들"이라고 불리는 현실의 내밀한 곳에서부터 왼쪽을 배제하겠다는 신적 의지의 표명이다. 마지막으로 "앉으셨다"는 표현은, 마치 "신이 안식하셨다(창2:3)"와 마찬가지로 이제 준비를 마쳤으니 일을 시작하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속한 이 땅에서 하늘들로부터 시작된, 왼쪽과 대립하는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전투에의 동참하라.

  승천 사건은 '행동'이 아닌 '행위(acte)'를 요청한다. 완성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 시작 속에서 실천은 존재와 구분되지도 않을 뿐더러, 존재와 실천은 마치 옷감의 표면처럼 세상에 없던 질감으로 짜이는 중이고, 그 옷감은 예측할 수 없는 주름으로 접혔다가 펴지고 다시 접힌다. 주체는 언제나 줄곧 데카르트로 돌아와 자신이 서있을 수 있는 확고부동한, 명석판명한 무언가를 찾는다. 과거에는 그 무언가가 '정념을 배제하는 이성의 건축물'인줄 알았다. 혹은 이성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물(Ding, 物) 그 자체인줄 알았다. 그러나 마침내 드러난 것은 확고부동한 것은 시간에 따라 흐르고 있는 무언가, 즉 자기 자신도 아니고, 이 흐르는 시간을 벗어난 형이상학도 아니고, 시간을 너머 사고 하려는 인간의 내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저 이 흐름 그 자체, 이 흐름이 만들어내는 형체 아닌 형체, 포착 불가능한 우연의 연속 속에서 포착될 수 밖에 없는 그 필연만이 확고부동하며 그 확고부동함(사건)을 만드는 과정이 행위요, 그 행위를 통해 정초되는 것이 주체인 것이다.


  예수의 행위는 사건을 남겼다. 예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이나, 형이상학에 대한 갈망이나, 정념으로부터의 분리로부터 얻어지지 않는다. 그저 예수가 행위로 남긴 그 확고부동한 사건의 궤적을 따라가면, 그 따라가는 과정은 예수의 흐름을 동일하게 이 세계 위에 새겨놓을 것이다. 홍해의 튼튼한 두 물 벽이 세워졌을 때, 그 두 벽 사이는 공백이었다. 그런데 신의 손길은 그 공백 안으로 새로운 줄을 그어 새로운 무늬를 넣었고, 줄지어 간 인간은 우연 위에 출애굽이라는 필연의 패턴을 수놓는 실이 되었다.

  신은 옷감에 무늬를 넣는 직공과 같다. 망가지고 찢겨진 천 위에 새로운 무늬를 새겨넣어 옷감의 가치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신의 손길이 메시아 예수의 사건들을 통해 확인되었다. 예수의 출생부터 승천까지의 사건들의 연속은 무늬의 패턴을 보여주었고, 누군가 그 패턴을 확인했다면, 자신이 서 있는 옷감의 올을 풀고 새로운 무늬를 넣는 행위를 시작해야하는 것이다. 존재는 그 행위에 의해 스스로 무늬가 되고 그 행위는 자신이 만든 무늬에 의해 평가받는다. 모든 시간이 메시아의 시간인 것은, 이미 종말론적 시간의 베틀은 옷감 전체에 패턴을 완성하기 위해 그 작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디로 승천하셨나? 미스테리 서클을 보는 UFO 동호회 회원과 비슷하다. 그들은 외계인들이 만든 패턴에 감탄하고, 그 탁월한 패턴을 근거로 외계인의 존재를 확신한다. 메시아는 자신을 통해서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고 했다. 이미 메시아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옷감에 수가 놓이고 있었고, 그이가 자신의 죽는 때를 면밀하게 조율했던 것은 자신의 행위 전체가 하나의 패턴을 그리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따라서 그이가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이 카이로스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배신과 죽음의 순간까지도). 메시아적 성취를 일상에서 발견한 사람들은 그 패턴에 감탄한다. 일상 속에 비일상적인 것을 기입하는 새로운 옷감짜기가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사건을 통해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스테리 동호회와 다른 점은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패턴 제작의 행위에 참여한다는 점이고, 또한 다른 점은 그들이 살기 힘든 지구의 구성적 예외로서의 외계인을 갈망한다면, 예수는 살기 힘든 지구의 구성적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특이점으로서 그들이 패턴을 수놓는 동일한 행위를 통해 '가져버린' 예수라는 점이다.

  아, 한 가지 더 첨언할 것은, 유다 지파인 예수가 땅이 아닌 하늘들 안에 있어야 제사장일 수 있었다면, 이 조건은 제사장이라 불리는 모든 이들의 조건일 것이다.

에베소서 2:6, 새번역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21, 새번역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참 장막
  "참 장막"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종말론적'이란 말로 구성적 예외를 언표하는 것[각주:1] 외에(이런 방식은 역학적 이율배반에 부딪쳐 난파할 것이다) 참 장막을 사유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을까?

  "참 장막(τῆς σκηνῆς τῆς ἀληθινῆς)"이라는 단어 꾸러미를 던져놓은 기자는 이 참 장막을 부연하는 종속문을 뒤에 붙여놓는다. 참 장막은 '주께서 펼치신 것'이다. 강조점은 '주께서'에 있다. '사람이 아니라'.

  '붙들어매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
에펙센(ἔπηξεν)'으로서 신약 성경에서는 이 본문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되었지만, LXX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한다[각주:2]. 시제는 아오리스트를 사용한 것으로서, 연속되는 크로노스의 한 점으로 읽히기를 거부하는 단어인데, 히브리서 '나타'를 번역한 것이다. 본적인 의미는 '뻗다', '펼치다'. "장막을 (펼)치다." 장막을 펼치는 이유는 공간 확보이고, 이 공간은 함께 거주할 공간이다. 요한계시록을 21장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이사야 54장이 저 "펼침"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줄 것이다.

이사야 54:2
너의 장막 터를 넓혀라. 장막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펴라(πῆξον). 너의 장막 줄을 길게 늘이고 말뚝을 단단히 박아라.

  이사야 54장의 장막을 요한은 계시록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읽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불임 여성이었으나, 남편이 마침내 돌아와 많은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되는 여성으로서, 남편의 외침에 따라 '펼쳐져서'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거주지가 된다. 히브리서 8장의 참 장막은 곧 요한계시록의 그녀, 새 예루살렘이다.

  "참 장막"은 사람이 아닌 메시아께서 펴신 것이며, 앞에 "참"이 붙은 것은 토라가 지시하여 건설한 장막의 한계를 극복하기 때문이며("예와 그림자(σκιά)"와 대비되는 효과를 갖는다), 그 한계란 구성적 예외 권력(레위 계열의 제사장)에 의한 배제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다. 이 배제가 극복되는 장막, 곧 참 장막은 메시아께서 펴신 에클레시아를 의미한다. 추상적인 어휘로 포장해서 비현실을 긍정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할텐데, (동어반복적인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 장막을 비현실화하려는 온갖 해석에 저항해야 한다. 참 장막을 비현실화하려는 숨은 의도는 참 장막에 걸맞지 않는 자신들의 모습과의 타협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참 장막 안에서의 섬김을 행위하지 않으면, 영혼의 부채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 현재진행형이지 않으면 현재는 늘 나에게 밀려나있고, 나는 현재를 현재로서 경험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 현재를 놓친 채 그 어떤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공간적 예외의 공상에 붙잡혀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적일 것이다. 우상은 남성편에서 보는 대상a이기 때문이다. 충족될 수 없는, 즉 현실 안에서 충족될 수 없는 욕망 말이다.

  그 메시아께서 펴신 장막 안에서 섬기는 이들이 "거룩한 이들"이고, 이때 거룩한 이들은 기자에게 이름 모를 추상적인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이신 메시아의 명에 따라 장막을 넓히려고 애쓰는 여자는 곧 자기 자신들이었을테니 말이다. 또한 메시아의 장막 안에서는 섬김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는데(대제사장이 제사장들을 섬기기 때문에), 이때
대제사장의 섬김을 받는 거룩한 이들은 곧 자기 자신들을 가리키고 있다. 대제사장은 구성적 예외 권력이기를 스스로 거절하는, 자신과 자신 외에 비뚤어진이들을 한꺼번에 신께 드리는 새로운 패턴의 특이점이며, 그 직위의 명칭에 걸맞게 새질서가 시작되는 아르케로서(대제사장은 αρχιερευς. 아르케αρχη + 제사장ίερευς)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3) 왜냐하면 모든 제사장은
선물과 제사들을 앞에 가져가는 것 속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그이가 앞으로 가져가시는 무언가를 가지셔야 한다는 필연성(아낭케)이 있다.
(4) 그러므로 한편으로 만일 그이가 땅에 있었다면, 제사장이 아니었을 것인데,
그 선물들을 앞으로 가져가는 것들은 토라를 따라 있기 때문이다.


(5) 곁하늘들의 예와 그림자(σκιά)로서 섬기는 누구든지,
장막을 막 이루려는 모세가 지시를 받았던 것처럼, 그분이 말씀하신다.

  "보라, 너는 모든 것을
  이 산에서 너에게 제시된 틀에 따라 만들 것이다."


-'소유하다' : '소유한 것을 통해 망(網) 속으로 바쳐짐'

  3절이 시작되는 "왜냐하면"은 2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1절 하반절과 2절은 "우리가 가진 제사장"이 누구인지 부연하기 위해 따라온 종속문이므로, "왜냐하면"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장은 1절 상반절일 것이다. 즉 우리는 멜기세덱적인 예외의 예외의 제사장을 가진 이유를 3절부터 제시한다고 읽고 있다.

  제사장은 봉헌(위의 본문에서 "앞으로 가져가다")의 필요성을 갖는다. 신께 드리는 선물들과 제사들을 봉헌하기 위해 있는 직책이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제사장이라면 그이에게도 봉헌의 필연성이 있다. 그런데 (A) '대제사장 예수가 봉헌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B) '우리가 그러한 제사장을 가졌다'는 사실이 인과관계로 연결될 수 있단 말인가?

 

(A) '대제사장 예수가 봉헌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B) '우리가 그러한 제사장을 가졌다'

  즉 예수가 우리에게 소유된 것은, 우리를 바치기 위함이라는 기이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즉 3절에서의 "우리"는 예수의 봉헌물인 것이다.
이때 '가지다'라는 말을 통해 가지고 있던 소유의 개념이 뒤집힌다. 즉 소유한 자가 바쳐진다. 메시아를 소유한다는 것은 메시아를 통해 신께 바쳐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생각해보면 별 특이할 것이 없는 말 아닌가? 핸드폰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핸드폰을 통해 접속할 수 있는 망 안에 내가 포섭된다는 말이니 말이다. 그러나 '소유자'라는 말은 '가졌으므로 권리를 누린다'는 측면이 부각된다. 즉 핸드폰의 기능들 위에 군림하며 망을 사용할 권리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망을 지배하고 있는 통신사 시스템 아래 포섭되는 것 아닌가? 나는 지배하는 줄 알았더니 실은 지배당하는 것이며, 지배하는 듯한 느낌은 사실 망을 지배하는 자가 주는 느낌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은 것 아닌가? 우리는 그렇게 사람들을 포섭하는 과정을 마케팅 내지는 경영이라 부르는 것이고?

 

 



  내가 '망'이라 부른 것을 앞에 언급된 '장막'이라 쳐보자. 메시아가 이미 펴셨고, 펴지고 있으며, 결국 펴질 것이라서, 마침내 만물을 총괄하게 될 현실적인 공간적 차원으로서 망(net)말이다. 메시아를 소유한다는 것은, 이 망에 대한 매개를 얻는다는 말이고, 나는 이 망에 바쳐진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망의 구성적 예외가 아니라 망의 완전히 포섭된 존재로서(그렇기 때문에 "바쳐진다"인 것이다) 망에 관여한다. 그리고 장막이 승천 이후 줄곧 확장되고 있는 망이라면, 그리고 이 '망'은 지리적인 범위로 그 구획을 확정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런데 몇몇 주석들이 고수하듯이, 이 참 장막에 비가시적 성격이 있다고 해야 한다면, 결국 장막은 '네트워크'를 말하는 것 아닐까?

  즉 교회는 메시아를 매개로 헌신된 네트워크인 것이다. 이 네트워크의 확장과 결국 이 네트워크가 잔여를 남기지 않는 전체가 될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아직 전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수학적 이율배반을 대면하는 이들이 "거룩한 이들"이 아닐까? 나는 몇 년 전부터 교회론을 논하는 자리를 갖게 될 때마다, 교회는 어떤 제의적 필연성이 불필요한 인간관계라는 주장을 펴게 되었다. 성만찬은 매끼니로 대체(해체)되고, 세례는 개인의 결단으로 대체(해체)되더라도 메시아를 매개로 가진 인간관계와 그 인간관계가 함께 추구하는 공공선을 위한 일거리가 있다면, 즉 net+work이 곧 교회가 아닐까?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모두가 사제이기 때문에 용서의 선언은 모든 순간 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메시아의 삶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신체적 불멸을 추구한다는 단 하나의 공통 분모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왜 '한편'에 머물러 있는가?

  4,5절과 6절은 "한편으로"와 "다른 한편으로"라는 논리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토라의 규정을 따른다면 예수는 제사장일 수 없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유다 지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라의 규정을 따르는 제사장이라면, 그는 하늘과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없다. 오직 그것의 "예와 그림자"로만 섬길 수 있을 뿐이다. 즉 그는 하늘을 비추지만, 정작 본인이 하늘일 수는 없다. 빗금쳐진 주체에 대한 이보다 적절한 설명이 있을까? 그는 자신의 '욕망함'을 통해서 욕망의 대상을 지시하지만, 정작 그 욕망의 대상을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모든 저주의 성격이기도 하다. 저주는 스스로 얻고자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현재 상태를 말한다. 들뢰즈가 말하듯 저주는 자신의 악행에 대한 평가와 갚음이 아니다. 악행 자체가 곧 저주이고, 저주받은 자는 자신이 저주받은 자인지 모른채 저주에 저주를 보태는 현재상태를 성실히 유지한다.[각주:3]


  제사장 그룹은 하늘을 투영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하늘이 아닌 실존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을 투영하라는 명령은 그들을 줄곧 소외시킨다. 그러나 그들이 소외당하는 것은 명령 때문이라고 오해해선 안된다. 그들이 토라 앞에서 소외되는 원인은 그들이 이미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외된 존재에게 명령은 그 소외를 증폭시켜서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는다. 그 막다른 골목으로 스스로 내몰리는 이들은, 스스로 돌아서려 하지 않고, 산헤드린에 한 사람을 꿇어 앉힐 때까지도 저주를 작동시킨다. 그리고 제사장 그룹은 골고다 언덕에서 결국 스스로 하늘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던 것이다.

  기자는 '망'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한편'에 속한 제사장들은 소외의 주체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진 '망 건설'의 명령은 그들의 소외를 증폭시키는데, 이러는 와중에도 답이 없다. 비뚤어진 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망을 만들어서도 안되지만(아마도 소돔과 고모라를 만들 것이다), 올바른 망을 제시해주어도 비뚤어진 존재는 올바름 앞에서 더욱 소외되기 때문이다.


  "보라, 너는 모든 것을
  이 산에서 너에게 제시된 틀에 따라 만들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인간의 연약함과 그 연약한 인간과 거리를 두고 있는 법의 관계를 보여준다. "한편"에 속한 사람에게 이 "산에서 너에게 제시된 틀에 따라 만들라"는 명령은 올바름과의 대면이자, 자신이 올바름을 구현할 수 없다는 철저한 자기 소외인 것이다. 그리고 최초 이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 자기 소외를 인정하는 방향이 아닌, 자기 소외를 피하기 위한 외적 구성물을 증축하는 방식으로, 즉 유대인 아닌 왕인 헤롯이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는 방식으로 타락했다.우상숭배.

 

(6)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계약의 매개자가 더 좋은 만큼,

이제는 다른 섬김이 발생했다(τυγχανω),
(그리고 그 계약은) 더 좋은 알림들 위에서 법으로 공표되었던 것이다.
(7) 즉 만일 처음의 그것이 나무할 것 없었다면,
장소는 두 번째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 좋은 알림들이 패치된 새로운 버전의 법
  그런데 "다른 한편"이 있다. "더 좋은 계약의 매개자". 이 "더 좋은"이라는 수식은 앞에서 언급한 한편에 속한 매개자, 즉 모세에 대한 존경이 내포되어 있다. 모세가 전달한 내용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달한 모세는 좋은 매개자이다(문제는 좋은 것을 전달해줘도 그것을 구현할 수 없는 비참한 인간성이 있다). 그런데 더 좋은 매개자가 있다. 그 더 좋은 중개자는 모세가 하지 못한 것을 해낼 것이다. "한편"에 속한 문제들을 극복할 것이다.

  "이제"라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발생한 것은 다른 섬김이다. '더 좋은 알림들이 패치된(patched) 토라'가 내면에 기입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다른 섬김, 곧 사랑이다. 일단 뒤의 내용을 읽어보시라.

  시내산에서의 모세는 구성적 예외에 대한 최적의 예시이다. 다른 사람들은 올라오지 못하는 시내산에, 모세만이 예외로서 올갔고 거기서 신의 명령을 받아오지 않았는가? 그 위로부터의 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법제화되었고, 그 법제화 속에서 이스라엘은 법을 벗어나는 모든 것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유대 율법의 문제를 지적한 신학자들은, 이 법제화 자체를 문제 삼으며 율법과 법을 한데 싸잡아서 폐기시키지 않았는가? 복음은 법으로부터 벗어난 사랑을 말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6절은 그러한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계약 역시도 법으로 공표되었다. 다만 옛 계약과 차이가 있다면 "더 좋은 알림들"이 덧붙었는지의 여부 뿐이다.

 

  모세보다 더 좋은 중개자가 가져온 것은 "더 좋은 알림"이고 이 더 좋은 알림이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 위에서 새로운 계약이 법제화되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법제화는 첫 번째 법제화의 문제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이건 앞에서 말했던 것의 반복이다.

히브리서 7:18,19, 개인번역
(18) 즉 이전에 이끌린 명의 무효가 그 명이 갖는 연약함과 무익함을 통해 되었다,
(19) 즉 율법은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더 좋은 소망이 덧붙여 들어왔다,
그 소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가까이 있다(ἐγγίζομεν).

  18절은 인간성의 나약함을 말한다. 19절은 첫번째 법제화의 실패를 말한다. 율법은 문제가 없지만 인간의 문제는 단순 규정들 모음이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그것이 신이 직접 제시한 규정이라도) 깊었던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것의 이루지 못함은 두 번째 것의 자리를 준비했다. 기자는 '자리'를 주어로 써서 말하는데, 즉 실패가 새로운 것이 도래할 자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7:19에서 소망을 수식하는 "더 좋은"이 보인다. 율법에 덧붙여 들어온 소망이, 8장에서는 "더 좋은 알림들"로 언표되고 있다. 즉 메시아를 통해 들어온 더 좋은 소망(알림들)은 율법을 폐기하기는 커녕, 율법을 보존한다. 율법의 다른 사용방식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율법에 의한 법제화는 폐기되지 않는다(상징계는 여전하다). 다만 소망은 '법' 자체를 재해석하게 만들고, 그 사용방식을 전환시킨다.

  기자는 예레미야
31:31~34을 인용하며, 토라에 대한 패치 소식이 이미 오래전에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18) 즉 이전에 이끌린 명의 무효가 그 명이 갖는 연약함과 무익함을 통해 되었다,

(19) 즉 율법은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더 좋은 소망이 덧붙여 들어왔다,
그 소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가까이 있다(ἐγγίζομεν).



출처: http://jaeduggi.tistory.com/1091 [아, 우주는 겁나 우아하

(8) (그런데) 그분이 그들을 나무라며 말씀하시길,

  "보라, 날들이 온다, 주가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집 위에서와 유다 집 위에서

  내가 새 계약을 이룰 것이다,
  (9) 너희들의 아비들에게 행했던 그 계약을 따라서가 아니라,
    (그 이집트로부터 그들을 밖으로 이끌기 위해,
    그 날에 나의 그 손으로 그들을 곁에서 붙들었던).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나의 그 계약 안에 머물지 않았고,
  바로 나는 그들에게 관심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가 말한다."


  흔히 이 구절들은 '새 언약'에 관한 본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본문의 목적은 새 언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아니라, 8절이 보여주듯 첫 언약에 붙잡혀 있는 연약한 이들에 대한 나무람에 있다. 즉 예레미야를 잘 알고 있는 유대인에게 예레미야를 보여주며, 토라가 덧붙여짐을 통해 새롭게 될 것임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즉 출애굽 때의 계약에 다른 계약이 "덧붙여진다". 왜냐하면 첫 번째 계약안에 이스라엘이 머물지 않았고, 그들이 머물지 않았기에 신은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패치 속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옛 표현은 그들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준비로 다시 읽힌다. 이스라엘이 계약에 어긋나 있을 때, 정의로운 신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대신 신은 새로운 계약을 준비했다. 이는 로마서 9~11장과도 같은 내용이다. 로마서 1장에서 세 번이나 명시된 "내버려둠"은 9~11장에서 기다림이었음이 드러나고, 토라에 의한 모든 사람의 유기는, 신의 두 번째 계획의 일환으로 포섭되는 것이다.

  (10) "바로 그 날들 뒤에 이스라엘 집에 내가 배치할 바로 그 계약에 관하여,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나의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주면서, 
  그들의 가온 위에 그것들을 새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신을 위하여 있을 것이고,
  그들은 나에게 씨알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11) 그리고 각각은 자신의 시민에게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은 자신의 형제에게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너 주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말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속한 나를 작은 자에서부터 큰 자까지."


-달라진 법의 위치와 행위 수행적(performative) 확신
  그럼 그 새로운 계약에 대한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자. (새로움을 과거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예외로 구성되는 남성적 전체가 아닌 예외 없는 비전체를 지지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법은 폐지되지 않는다. 법제화는 여전하다. 다만 법의 위치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 위치의 변화가 곧 변혁이다. 작은 변화를 통해 전체를 새롭게 하는 신의 내재하는 손길이다. 몸 밖에 있던 토라는 이제 생각 속으로 들어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할하던 법은, 이제 사람 내부를 분할하고 그 분할된 인간의 차원을 언표하는 단어가 프뉴마와 사륵스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전체와 부분의 변증법으로 본문을 조명하려고 했다. 나머지를 유적 일반성으로 규정하는 종적 특수성, 즉 구성적 예외를 잘못된 것으로, 그리고 성경이 이미 특이점을 내포하고 있는 보편성을 말하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래의 본문은 이러한 시도에 결정적으로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신을 위하여 있을 것이고,
  그들은 나에게 씨알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잔여는 없다. "위하여"로 연결된 신과 씨알의 관계에 잔여는 없고, 이 잔여없음의 관계에서 플레로포리아(πληροφορια)를 고백할 수 있다. 플레로포리아는 "넘칠 때까지 운반하다", "공백을 남기지 않은 채 어떤 것에 완전히 동의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달라진 법의 위치는, 법과 주체의 공백을 지우고 행위로 전환되는 확신을 가져온다.

데살로니가전서 1:5
복음은 그저 말로 된 것이 아니라,

힘으로, 거룩한 숨결로 즉 전적인 힘입음(πληροφορια)으로 되었기에...

-매개 전달보다는 매개가 되기
  법의 위치가 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법을 밖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 11절 해석의 문제는 저 "시민"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있다. "시민"으로 구성된 공동체가 새 언약에 참여하는 에클레시아라고 보는 견해는 히브리서 본문을 종교적 범위 안에 한정하는듯 하다. 물론 유대인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히브리인을 접하고 있는 시민이나, 또 히브리인의 형제로서 또 다른 히브리인이나 토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 그리고 이미 토라를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메시아적 소망을 체현해가는 행위만으로도 기존의 자신의 해석에 대한 의문을 던져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자기 세계관에 대한 의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본문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본문의 시민을, 얻을 수 없는 욕망을 얻고자 살아가는,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계약 안으로 들어왔으나, 계약 당사자인 국가 권력에 의해 소외되고 있는 호모 사케르라고 읽으면 어떠한가? 그런데 호모 사케르들에게 소망이 덧붙여져 갱신된 새로운 법에 관해 말로 전달해봐야 그것이 비현실일 경우(즉 특이점을 가지고 새로운 현실의 무늬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경우), 그것은 그저 말잔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매개이다. 매개가 없다면, 그는 이 새로운 네트워크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매개가 곧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께 이르는 트랙은 인간 욕망과 맞닿아 있는, 욕망과 떨어짐 없는 삶, 곧 메시아적 사건의 연속 외에 무엇이 있을까?

  신은
어느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자가 다른 네트워크에 참여하지 않은 자를, 자신의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도중에도 늘 볼 수 있는 이러한 현실로 세계를 이끌었다(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이러한 현실이 최선이다.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즉 네트워크는 접혀있고, 펴지며, 또 접힌다. 연속성과 비연속성은 늘 교차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한편의 네트워크에서 다른 한편의 네트워크로의 전이는 법과 욕망이 일치된 인격, 그 인격의 행위가 만들어내는 사건, 그 우연적 사건들의 연속을 통해 필연적으로 포착되는 의미를 통해서 이뤄진다. 신은 우리와 함께 한다.

  11절에서 누가 작은 자이고, 누가 큰 자인지 구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12) "내가 그들의 불의들에게 자비롭게 있을 것이고,
  그들의 비뚤어짐들을 결코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13) 새로운 것을 말씀하심 속에서
그분은 그 처음 것을 옛 것되게 하셨다.
그런데 그 옛것되어 철지난 것은 사라짐 옆에.


  전이는 값없이 이뤄진다. 선과 악에 대한 보상을 한 번 철폐해야, 선과 악에 대한 제대로된 보상을 시작할 수 있다. 문은 이렇게 열린다. 그러나 문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문을 지난다면, 선을 추구해야 한다. 무규정은 무규정 자체로는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기 때문이다.

  13절에서 새로운 시간을 느낀다. 새로운 것을 '이미' 말씀하셨고, 그 '이미' 말씀하신 새로움이 '지금' 현실이 되었다. 이로써 신이 직접 새긴 글자는 그대로 있으나, 그 글자에 대한 반응이 상이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방식으로 신은 새 것을 낳았다. 1) 과거에 미리 말하기 2) 현재는 잔여없는 넘침으로 살게 하기 3) 미래에는 비뚤어짐들을 기억하지 않기

  새로운 것을 말씀하셨다는 말은 언제에 속하는가? 신은 이미 과거에 새로운 것을 말씀하셨고, 또 현실 속에 새로운 것을 말씀하시며, 미래에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우리는 지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또 새로울 것이다. 즉 신이 발설하는 모든 것은 새로움이다. 그런데 그 새로움을 과거의 구습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그 새로움을 묵은 것 만들면서 권력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3절의 방점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말씀하심 속에서"에 찍혀야 한다. 그분이 새로운 것을 발생하시는 것 안에 있을 때, 처음 것은 옛 것이 되며, 그 옛 것은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 속에서 우리의 행위와 기억에서도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1. "여기서 우리는 기자가 가진 공간적이고 종말론적인 신학의 한 예를 본다. 한편으로 이 땅에 있는 장막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 하늘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히브리어 주석>, 복있는 사람, 토마스 슈라이너, p. 372 [본문으로]</히브리어>
  2. http://lexicon.katabiblon.com/index.php?lemma=%CF%80%E1%BD%B5%CE%B3%CE%BD%CF%85%CE%BC%CE%B9 [본문으로]
  3. 요한복음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렁이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누가복음 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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