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히브리서 7:1~28

 

(1) 왜냐하면 바로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인데, 

그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그는 왕들의 살육으로부터 몸을 뒤로 돌린 

아브라함을 만났는데 그를 잘 말했다,

(2) 아브라함은 그에게 모든 것으로부터 1/10도 나누었다,

그는 번역하면 일단 의의 왕이고,

그 다음으로 살렘의 왕, 곧 평화의 왕인데,

(3) 아비없이, 어미없이, 족보없이,

날들의 시작도 삶의 끝도 갖지 않고,

그 하나님의 그 아들과 닮음으로 되어,

그는 제사장으로서 밑도 끝도 없이 남는다.

 

  멜기세덱을 이해하는데 느려선 안된다(5:11). 지금 당장 의미화하라는 요청. 기자는 독자들에게 멜기세덱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비추어볼 줄 알아야 한다는 요청을 7장에서도 이어간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의의 왕, 평화('살렘', 예루'살렘')의 왕이라 번역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를 만났던 이야기가 창세기 14장에 실려있다. 그런데 이 때 "아브라함이 왕들의 살육으로부터 몸을 돌렸다"고 말했을 때, 이 살육은 왕들이 했던 일일까, 아니면 아브라함이 왕들에게 행한 일일까? 개역한글은 아브라함이 왕들을 "쳐서 죽이고"라고 번역함으로써 저 살육의 주어를 아브라함으로 본다. 이는 창세기 14:15의 "쳐서 파하고" 때문인데, 히브리어는 '나카' 동사를 쓴다. '때리다, 쫓아내다'에서 '살해하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는 단어다. 

  왕들을 살해한 뒤, 그 살해를 그치고(몸을 뒤로 돌린), 붙잡힌 조카와 전리품들을 가지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은 복을 준다(이는 요한계시록 19장의 이미지와 비슷하지 않은가?, 혹은 마태복음 12:29와 연관성은?). 

  복과 1/10은 두 대상의 관계를 규정한다. 그러나 이때 복을 십일조처럼 현물로 생각하여, 복과 1/10이 일대일로 맞바뀐다고 생각한다면, 저 관계를 거래라고 오해할 수 밖에 없다. '복'이라 번역되는 단어는 '에우로기아(ευλογια)'로 잘(ευ) 말한 것(λογος)이다. 즉 복은 신에게 말하는 언어 활동이다. 즉 '복'과 함께 '빌어줌'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는 것이 좋겠다. 복은 빌어주는 언어 활동.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줌으로써 아브라함의 이미 지나간 사건은 신의 개입으로서 이해되고 전달된다.

 

창세기 14:19,20, 새번역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브람은 들으시오.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

 

  그리괴 아브라함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긍정하기 때문에, 멜기세덱에게 1/10을 준다. 즉 1/10은 자신의 삶에 신을 개입 시킨 언어 활동에 대한 긍정의 표현으로서 실천적 아멘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1/10을 줌으로써 아브라함의 전투가 신께서 행하신 전투였다는 사실에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1/10을 바쳤다면, 아브라함에게 속한 레위 계열 제사장도 멜기세덱보다 높지 않다. 따라서 레위 계역 제사장이 갖고 있던 제사장으로서의 예외적 권위는 멜기세덱이 등장하면서 허물어진다. 멜기세덱이 제사장인 한 레위 계열 제사장은 더 이상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예외일 수 없으며, 멜기세덱은 시작과 끝이 없으므로[각주:1], 멜기세덱보다 상위의 제사장을 상정하는 것 또한 불가능해진다. 이로써 레위 계열 제사장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멜기세덱 아래서 지워진다.

 

(4) 그런데 당신들은 그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보라,
그에게 아브라함도 꼭대기 쌓인 것들 중 1/10을 주었다, 족장인데도.
(5) 그리고 한편으로 레위의 아들들로부터 있던 이들로부터 제사장직을 취한 이들도
그 (율)법을 따라 그 씨알에게 전달하는 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형제들에 관해서도 있다,
  비록 아브라함의 그 허리로부터 나온 이들이라 할지라도.'

(6) 그런데 그(멜기세덱)는 그들로부터 세대로 계산되지도 않는데,
아브라함은 1/10을 지불했고, 그 알림/약속들을 가진 그(아브라함)를 잘 말했다.

(7) 그런데 모든 맞서는 말없이, 못한 자가 나은 자로부터 잘말함받는다.
(8) 그리고 여기에서 한편으로는 1/10들을 죽는 사람들이 취하고,
거기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있다고 증언된 이가 (취한다).
(9) 그리고 한 마디 하자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1/10들을 취한 레위도 지불(받)은 것이다.

(10) 왜냐하면 아직 그 아버지의 허리에 레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말이다).

 

  4절부터 10절까지 면밀히 살펴보자. 기자는 1/10로 연결된 관계를 나열한다. 이는 작은 자가 1/10을 바치고, 큰 자가 그에게 복을 빌어주는 관계인데, 앞에서 말한대로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그러하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지파들도 다른 지파들로부터 1/10를 받는 지파이지만, 그들은 아론 계열 제사장들에게 1/10을 다시 바치기도 한다. 즉 아래와 같이 그려볼 수 있다.

 

  아래로는 1/10을 지불하고, 위에서는 복을 빌어준다. 그런데 8절에서는 아론 계열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를 묶어서 "죽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리고 "살아있다고 증언된 이"는 멜기세덱이다. 다시 배도하려는 유대인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레위 지파의 제사 제도에 목을 매고 있는 그들에게, 멕기세덱과 관련된 논증은 어떻게 들렸을까? 레위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왔는데, 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심지어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그에게 1/10을 바쳤다. 그리고 그 멜기세덱은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이로써 예외라 여겨졌던 레위 계열 제사장은 새로운 멜기세덱이라는 예외로 인해, 그 예외성을 상실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레위는 레위 아닌 지파들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11) 그러므로 만일 한편으로 그 레위적 제사장직을 통해 이룸/완수가 있었다면,

(왜냐하면 그 씨알이 그 제사장직 곁에서 법제화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멜기세덱의 그 질서를 따라 제사장을 세울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아론의 그 질서를 따라 이야기될 필요가 아닌.

 

  이러한 맥락의 핵심을 11절이 잘 말해주고 있다. '법제화'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법제화'는 '예외를 통한 보편화'이다. 법 제정자는 법의 구속에서 벗어나 예외로서 기능한다. 게엄령을 생각해보라. 게엄령에서 법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있는 인물은 그 게엄령을 선언한 자이다. 이스라엘의 법제화는 레위지파를 예외화함으로써 성립된다. 앞에서 예를 든 것은 안식일이었다. 안식일법으로 모든 이스라엘은 구속받지만, 레위지파는 그 안식일에도 일한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법을 어기지 않았더라도, 그가 범죄했을 것이라는 예외상황으로 현실을 판단한다.

 

  그러나 이런 예외를 통한 보편화, 즉 법은 그 예외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그 권위가 법을 밀어붙이면 붙일수록,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 법을 어길 가능성' 속에서 지배당할 뿐만 아니라, 그 사회는 법의 테두리 바깥을 생각할 수 없는 폐쇄성을 띄게 된다. 따라서 멜기세덱 이야기는 레위 지파를 예외화함으로써 얻는 법제화를 깨뜨리는 혁명적 이야기의 성격을 갖는다. 권위를 부여받는 레위지파를 다시 일반화시키고, 상위의 예외를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는, 멜기세덱의 제사장직도 '예외에 의한 보편화'가 아닌가라는 의문이다. 그 역시 통치 영역을 범죄의 가능성으로 규정하고, 법 외부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폐쇄성을 가져오지 않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이다.

 

(12) 즉 아낭케로부터 그 제사장직이 달리 세워졌기(μετάθεσις) 때문에 

율법의 달리 세움도 있기 때문이다.

(13) 즉 이것들이 그이 위에서 이야기되는데, 

그이는 다른 지파에 속하여 함께가지셨고,

그 지파로부터 누구도 그 제단에 드렸던 바가 없다.
(14) 즉 모두 앞에 명백하다, 유다로부터 우리의 주께서 솟아나셨던 것이,
이 지파 속에는 제사장에 관하여 모세가 말했던 것이 전혀 없다.
(15) 그리고 더욱 분명하다,
만일 멜기세덱의 닮음을 따라 다른 제사장이 일어났다면,
(16) 그이는 살몸의 명의 율법을 따라서가 아니라,
파괴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을 따라 되었다는 사실이.
(17) 왜냐하면 다음의 사실이 증언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오는시대 속의 제사장임을,
  멜기세덱의 그 질서를 따르는." (시편 110:4)

 

  그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이 12절이하의 내용이다. 일단 그 예외의 예외인 제사장은 '기존의 법(율법)과는 다른 세움'이다. 그 다름이란, 예수를 토대로 이야기 되는 것들인데, 그 예수는 제단에서 섬기는 레위 지파와는 무관한 분, 즉 유다 지파에서 나신 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이가 레위적 정통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참된 정통성을 보증한다는 역설이다. 멜기세덱처럼 말이다. 이는 고린도후서 3장의 바울의 입장과도 유사한데, 사도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제시한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은 성령이 자신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결국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곧 정통성을 증명할만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 정말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표지라는 말이다. 신으로부터 기인한 정통성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정통성 없음의 정통성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부활이다. 15절의 "일어났다면"은 부활을 의미하는 초대 교회의 용어이고, 기자는 그 부활을 "파괴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을 따른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것에 대비되는 것은 "살몸에 속한 명령의 율법"이다. 즉 레위적 제사장이 예외로 기능하며 법으로 운용하던 폐쇄적 사회 안에서, 다시 멜기세덱과 닮은 메시아가 예외로 기능하게 되었을 때 벌어지는 사태는 법이 아닌 "파괴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곧 부활)"으로 운용되는 사회로의 변모이다. 파괴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이외에 그 어떤 성문화된 법칙들은 그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기자는 메시아를 예외의 예외, 정당성없는 정당성, 파괴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으로서 부활의 인간으로 정의하고, 이것을 시편 110:4와 연결시킨다. 시편 110편은 히브리서에서 줄곧 인용되던 중요한 시편이다(1:3,13, 8:1, 10:12, 12:2). 

(18) 즉 이전에 이끌린 명의 무효가 그 명이 갖는 연약함과 무익함을 통해 되었다,

(19) 즉 율법은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더 좋은 소망이 덧붙여 들어왔다,
그 소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가까이 있다(ἐγγίζομεν).

 

  18절을 보자. '명령'의 형태로 부여된 율법은 무효가 되었다. 그 무효됨은 그 명령이 갖는 연약함과 무익함 때문이었다. 여기서 연약함은 그 명령을 지키려는 사람의 연약함일 것이고, 그 연약함을 해결해줄 수 없는 법은 그를 범법자로 규정할 뿐이다. 즉 율법은 사람을 살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율법 곁에 덧붙여 들어온 새로운 소망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정당성 없는 정당성), 마침내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파괴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부활)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기자는 엥기조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이 단어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와 같은 단어), 이 소망이 우리의 신체와 접하여(엔in + 기조hand) 이뤄지고 있는 소망이 되었음을 천명한다.

 

(20) 그리고 이러함은 맹세 없이 되지 않는데, 

(21) 즉 한편으로 맹세없이 그들은 제사장이 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이를 향해 말씀하신 것을 통한 맹세와 함께,
주께서 맹세하셨고, 그리고 관심변경됨 없이,
당신은 그 오는시대 속의 제사장이시다.

(22) 그러함을 따라 더 나은 계약의 보증이 되셨다, 예수께서.

 

  20절은 앞에서 언급한 '맹세'를 기입한다. 신이 맹세했다. 우리는 맹세란, 말과 자기 신이 자신을 일치시키는, 타자의 신뢰를 얻기 위한 최후의 최종적 행위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신은 자신과 자신의 맹세를 일치시키며 더 할 수 없는 극단의 신뢰를 표명했다. 그리고 7장에 들어와서 기자는, 신이 말과 자신을 일치시켰다는 그 맹세의 내용이, 예외의 예외로서의 멜기세덱적 제사장의 출현과 성취였음을 밝힌다. 즉 메시아 예수가 오는시대 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신적 맹세의 내용이고, 예수의 제사장됨은 신이 맹세로서 보증한 내용이 되는 것이다.

 

(23) 그리고 한편으로 넘치는 이들이 제사장이 되어 있는 것은,

죽음에 의해 곁에 머뭄이 막힘을 통해이다.
(24) 다른 한편으로 그이는 그 머뭄을 통해서 그 오는시대 속으로,
이양되지 않는 제사장직을 갖는다.

(25)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이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각각/모두의 텔로스 속으로 온전케하실 수 있다,
그들을 대신/위해/넘어 모든 때에 그 만남/대면 속으로 사시기에

 

  메시아 이전까지 많은 이들이 제사장이 된 것은, 신적 맹세의 내용도 아니었고, 죽음이라는 한계 때문에 인간 제사장이 끝까지 씨알과 머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즉 사람은 가고 역할만이 남는다. 그 '역할'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람이 왔다가 다시 가고, 새로운 사람이 왔다가 다시 가는 일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역할을 보존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 역할을 영원히 감당할, 역할을 보존해야만 했던 그 이유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자이기 때문에, 짐승들에게서 이양된 그의 권력은 다시 이양되지 않는다(다니엘 7). 그리고 바로 그러한 예수를 "통해서(dia)"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모든 텔로스(에이스 토 판텔레스)' 속으로 온전해진다. 이때 '텔로스'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개역한글은 '텔로스 속으로'를 '온전히'라고 부사로 처리했다. 그러나 텔로스는 공간적 완성이 아닌 시간적 함의를 가지고 있고, 그 시간적 함의는 현재적 미래, 미래적 현재의 변증법, 즉 종말론적 독법으로 읽혀야 한다. 그것이 메시아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의 온전함인 것이고, 모든 순간 신을 대면함이다. 어떤 설명으로도 이 모든 순간을 단절시키거나, 신을 대면하지 않는 부재의 상황을 기입할 수 없다.

 

  메시아는 모든 때에 하나님을 대면하시며 사신다. 그리고 그 메시아 안에 있음은 마찬가지로 신을 대면하는 삶인 것이다. 텔로스 속으로의 온전은, 신을 대면하는 영원한 현재에 머물게 한다. 죽음은 그 머뭄을 중단시키지만, 죽음을 이긴 메시아 안에서는 죽음을 잊는다. 26절에 언급되는 깨끗함과 열등하지 않음과 더럽지 않음과 하마르톨로스는 모두 죽음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가? 유대인들에게 죽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현시하는 현상은 질병이다. 그래서 병든 사람을 더럽다고 여겼고, 깨끗하지 않다고 여겼으며, 열등하다고 여겼고, "하마르톨로스"라 불렀다. 문제는 병에 걸렸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다. 메시아 예수의 치유는 자신의 부활에 대한 예고였고, 부활은 죽음과의 단절을 현실 위에서 증명한 "파괴할 수 없는 잠재력"의 현시였던 것이다. 

 

(26) 왜냐하면 그러한 분이 당신들에게 대제사장으로 적절하셨기 때문이다,
깨끗하시며, 열등하지 않으시며, 더럽지 않으시며,

하마르톨로스들로부터 나뉘시는, 그리고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신 이,
(27) 그이는 날들을 따라 아낭케를 갖지 않으신다,
마치 대제사장들이 이전에 개인적인 비뚤어짐들을 대신해 희생들을 올려드리고,

그러고나서 그 씨알의 죄들을 대신해 올려드리듯이.
왜냐하면 이것을 그이는 한꺼번에 하셨기 때문이다, 그 자신을 올려드리며.
(28) 즉 율법은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지만,
반면 그 율법과 함께 있는 맹세의 말씀은 아들을 이미 완성된 오는시대 속으로 세운다.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신 이"라는 표현은 다시 예수를 두번 예외화시킨다. 하늘과 관련된 일을 다루기 때문에 예외화되었던 레위적 제사장 제도를 다시 한 번 넘어서는 이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다. 

 

  제사장들은 속죄일이 되면, 자신들의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고, 이후 민족 전체의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이중 제사를 드렸다. 이 27절은 개역한글에서 "단번에"로 번역되어 속죄제사의 일회적 완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때 반복적인 제사 제도가 이에 대비되었다. 그러나 7장의 맥락에서 '에파팍스'는 예외화를 통해 전체와 예외로 분절되었던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합시킨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메시아께서 자신을 올려드리셨기 때문에, 제사장 계급의 예외화를 통한 법(토라)으로의 통치(이중 제사)는 더 이상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예외화를 통한 법으로의 통치는 어떤 이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예외화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제사장도 사람이라 죽음을 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제사장 제도의 예외화를 유지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제사장 역할을 감당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28절을 들여다보자. 그렇다면 예외를 통한 법제화를 위해 쓰인 토라는 무용한가? 토라 곁에는 맹세의 말씀이 덧붙여 있다. 즉 토라는 더 이상 실효가 없으나, 맹세의 말씀의 '배경'을 제공한다. 이전에는 통치 방식으로서 사용되었다면, 메시아 이후 토라는 그 사용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토라는 맹세를 지시하고, 그 맹세의 말씀(곧 멩세와 자신을 일치시키신 하나님)이 멜기세덱을 닮은 자신의 아들을 오는시대 속으로 세운다. 그리고 '그 오는시대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종말론적 시간관은 여기서도 빠지지 않는다. 기자는 메시아가 가져오는 새로운 시간이 이미 완성된 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으로의 참여는 '현재'라는 형식을 띌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 확신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1. διηνεκής 히브리서에서만 4회 출연하는 독특한 단어, "통째로", "밑도 끝도 없이" "continuous, unbroken, from beginning to en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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