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12, 개인번역


  그런데 그이는 그 군중들을 보시고 그 산 속으로 걸어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이는 앉으셨고, 그이의 제자들이 그이를 향해 왔다. 그리고 그이의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치셨다, 말씀하시길,


복된 이들은 숨결에 있어서 짓눌린 이들이다,
왜냐하면 하늘들의 나라가 그들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복된 이들은 애통하는 이들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위로(παρακλησις)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된 이들은 구하는 이들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된 이들은 그 의를 굶주려하고 목말라 하는 이들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복된 이들은 가엾이 여기는 이들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가엾이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된 이들은 가온에 있어서 깨끗한 이들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그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복된 이들은 평화를 만드는 이들이다,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아들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복된 이들은 의를 위해서 고생했던 이들이다,
왜냐하면 하늘들의 나라가 그들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그 복된 이들이 너희들이다, 그들이 너희들을 욕하고 추적하고 나를 위해 거짓말 당하는 너희들에게 온갖 나쁜 것을 말할 때면 꼭 그렇다. 너희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왜냐하면 너희들의 보상이 하늘들에서 넘치기 때문이다. 즉 이처럼 너희들 앞서 있던 예언자들을 그들이 박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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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하나님 나라가 이미 손 안에 있다

  마태복음 5:1에서 예수는 산에 올라가시고, 이른바 '산상수훈'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본문이 이어진다. 이 산상수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토라를 수여받는 장면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파라오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이, 모세로부터 "새로운 왕권"의 소식을 들었고, 파라오가 아닌 그 새로운 통치 아래서 출애굽했고, 그 새로운 왕권의 통치 방식을 확인한 장소가 시내산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찾아오셨고, "새로운 왕권"을 가져오셨다. 그 새로운 왕권의 전모를 밝히는 본문이 마태복음 5~7장, 곧 산상수훈인 것이다. 그 내용 역시 전면적인 토라의 재해석, 다시 말해 새 언약이다.

  먼저 팔복 본문 이전에, '천국'이란 단어가 마태복음에서 언급된 구절들을 정리해보자.

마태복음 3:2, 개인번역
말씀하시길, 
"너희들, 생각을 바꿔라, 왜냐하면 그 하늘들의 나라가 이미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4:17, 개인번역
이때부터 예수는 선언하기와 말하기를 시작하셨다,
"너희들, 생각을 바꿔라. 왜냐하면 그 하늘들의 나라가 이미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4:23, 개인번역
그리고 온 갈릴리에 다니셨다,그들의 회당들에서 가르치시며
그 나라의 그 좋은알림을 선언하시고
그 씨알 안에 있는 모든 병과 모든 부드러움을 돌보시며.

  '천국'이란 단어를 "하늘들의 나라/왕권"으로 고쳐쓴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확인하기 바란다. 이 지면(화면!)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전 번역의 문제를 고찰해보자. 이 "가까이 왔다"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는데, 이제 거의 다 왔다'의 의미일 수 없다. 대개 약속 시간 임박해서 걸려오는 '거의 다 왔다'는 전화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일 뿐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나, 아직 오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게 아니다.

  "가까이 왔다"라는 말은 희랍어 엥기조(ἐγγίζω)를 번역한 것이다. '엥기조'는 때로는 시간상의 가까움, 공간상의 '가까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가까움은 '떨어짐'의 의미는 전혀 없다. '밀접한',  '처분 가능한(at hand)' 가까움이다.

사도행전 10:9, 개역한글
이튿날 저들이 길을 가다가,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야고보서 4:8, 개역한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이 엥기조(ἐγγίζω)는 '엔(εν)'과 '손'을 의미하는 '엥구스(εγγυς)'의 합성어다. 즉 "손 안에"를 기본 뜻으로 갖는 단어인데, ESV 성경은 원문에 근거하여 예수의 천국선포를 적절히 번역했다.

Mt 4:17, ESV
From that time Jesus began to preach,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따라서 예수는 하늘들의 통치가 "손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당장 손으로 잡을 수 있을만큼 아주 가깝다(마태복음 14:36).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당장 손으로 잡을 수 있을만큼 가깝다면,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한 것이다. 메시아 예수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 그 자체다. 따라서 예수를 보고 있는 이들은,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왕권이 임박하다고 말하는 여느 예언자들과는 궤를 달리 한다. 예언자들이 말했던 하나님 나라가 그이다.

요한복음 14:9, 개인번역
이만한 크로노스로 너희들과 내가 함께 있었다,
그런데 너는 나를 깨닫지 못하느냐? 필립포스야!
나를 보았던 이는 그 아빠를 보았던 것이다.
어찌 네가 그 아빠를 우리에게 보이라고 말하느냐?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의 용례를 살펴보자. 바울은 오는시대를 말하며, 그 오는시대의 삶을 통해 얻는 온전함(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욱 손 안에 있다고 말한다.

로마서 13:11, 개인번역
'이 때'가 곧 '그 때'임을 보십시오.
그 때는, 이미 여러분이 잠에서 일어난 때요,
우리의 구원이 이제 처음 신실했을 때보다 더 가까워진(손 안에 있는) 때입니다.


  이 구절은 온전함이 나와 무관하게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이미지가 아니다. 온전함을 몸으로 겪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히브리서 7:22, 개인번역
이러한 막대함을 따라서 더 좋은 계약의 보증(손안에 둠)이 되셨습니다,

  또 이러한 가까움의 '신체 근접성'은 '보증'이란 말로도 더 분명해진다. 보증은 희랍어 엥구오스(ἔγγυος)를 쓰는데, 이것이야 말로 '손에 쥐여진 것'이다. 보증이 손에 쥐여지지 않고서는, 보증물은 어떤 것도 보증할 수 없다. 세상은 말 그대로 예수를 손에 쥐고 처분했다. 따라서 세상은 그 보증물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예수는 물리적인 몸을 가지고, 실제적인 사역으로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셨고, 그 예수의 죽음은 사람들의 손으로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벌어진 영원한 제사의 예수만이 더 좋은 계약, 곧 새 언약의 보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은 하나님 나라의 지연이 아닌 실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선언하신 예수께서 산에 오르셨고, 제자들과 군중들이 그를 따랐다. 

1. 힘겨워 하는 이들을 위해

마태복음 5:1~10

  그런데 그이는 그 군중들을 보시고 그 산 속으로 걸어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이는 앉으셨고, 그이의 제자들이 그이를 향해 왔다.
그리고 그이의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치셨다, 말씀하시길,

복되다 숨결에 있어서 짓눌린 이들은,
왜냐하면 하늘들의 나라가 그들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팔복은 인류사의 빛나는 문헌이지만, 그럼에도 각종 오해 속에 파묻혀 있기도 하다. 어순을 그대로 읽으면, 팔복의 여덟개 문장은 모두 "복되다"로 시작된다. 이 '복'은 유대인에게는 아브라함 언약을 상기키셨을 것이다. 온 인류가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게 되기 때문에, 복은 곧 아브라함의 후손됨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팔복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후손에게 주시는 복을 누리는 이들은 다음과 같다" 로 시작된다.


  먼저 지목되는 사람들은 "숨결에 있어서 짓눌린 이들"이다. 개역한글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번역했는데, 이 때 "심령"이라 번역된 것은 희랍어 '프뉴마(πνευμα)'로서 숨결이다. 숨결이 짓눌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이들은 숨결이 짓눌린 이들을 '죄 의식을 가진 사람들'로 이해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에 팔복이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당시 예수를 따라 산에 올라온 군중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살펴보면, 이런 해석들은 설득력이 없다. 산상수훈 바로 직전의 구절을 보면,

마태복음 4:23,24. 새번역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 곧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지금 산에 몰려온 사람들은 모두 병자들이다. 숨 쉬며 사는 것마저도 힘에 겨운 사람들이 예수의 고침을 바라며 그이를 따라왔다. 희랍어 형용사 카코스(κακος)는 "병걸린"으로 번역하지만, "악한"이라는 도덕적 판단으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계관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병든 사람을 곧 죄인으로 여긴 것이다. 이 병자들은 죄의 사람들, '하마르톨로스(ἀμαρτολος)'라 불렸다. 예수는 이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다"라는 충격적인 선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숨 쉬기도 버거운 이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인 자신이 왔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들을 위해 실현되었고, 실현되며, 실현될 것이다. 

마태복음 9:12,13, 개인번역
"강한 사람은 의사의 필요를 갖지 않지만 열악한 이들은 (의사의 필요를) 갖는다. 
그런데 너희들은 가서 이것이 무엇인지 배우라,   
  '긍휼을 내가 원한다, 희생이 아니라.' 
즉 내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비뚤어진 이(하마르톨로스)들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우리 자신들도 숨 쉬기 어려울 만큼 힘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가? 개인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전부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늘을 보게 하지 않는다. 이 땅에 숨 쉬기 어려운 사람들을 보게 만든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는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들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셨다. 병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말 그대로 "붙잡을 수 있었다". 만일 숨 쉴만 하다면, 그 숨 쉴만한 삶은 숨 쉬기 어려운 이들의 손이 붙잡을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누구보다 시원하게 숨 쉬셨고, 숨 쉬는 이의 삶은, 숨이 억눌린 삶을 향했다. 숨 쉬는 자와 숨이 억눌린 사람은 언제나 아주 가까이 있다. 이 가까움을 유지해야 한다. 오는시대는 바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 가까움에 있다. 그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로 이해된다.

   복되다 애통하는 이들은,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위로(παρακλησις)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배척된 하마르톨로스들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인데, 이번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 대신 '파라클레시스'가 등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들에게 속했는데, 그들이 마땅이 누려야 할 그 나라는 몸을 가진 누군가의 위로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위로는 마땅히 그들의 것이고, 이 위대한 본문을 복을 받기 위해서 위로받을 일을 만들어야 한다고 읽지 않는다면, 위로받을 일 없는, 즉 숨 쉴만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는 방식은 위로함이라는 능동태 뿐이다.

  그리고 이 파라클레시스는 거룩한 숨님의 역할로 표현되며(요한복음에서 "보혜사"로 번역된다), 바나바는 이 '파라클레시스의 아들"이라 불렸다(사도행전 4:36). 
   
    복되다 구하는 이들은,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모두 땅을 상속받은채로 태어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열 두 지파에게 분배했고, 예배를 관장하는 레위 지파외에 모든 지파는 자기 지파에게 분배된 땅에서 산다(레위지파는 나머지 지파들 소득의 1/10로 삶을 영위한다). 따라서 유대인이라면 살 땅이 없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땅을 구한다면, 이들은 분배받은 땅을 저당잡힌 노예들이다. 또한 땅이 없다는 말은 이스라엘 포로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주신 땅은, 이제 로마 제국의 소유가 되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포로가 된 사람들이, 다시금 살고 싶어서 땅을 구한다. 

  이 땅 없는 삶, 즉 '나그네'라는 삶의 방식은 평생을 자기 땅 없이 살았던 아브라함과도 연결된다. 그가 나그네인 이유는 신의 호명을 받아 우상숭배적 통치를 거절했기 때문이고, 그 거절은 그에게서 소위 말하는 '영향력'을 빼앗았다. 삶의 터전 없이 고분분투하면서도 온전한 삶을 지켜나갔던 그에게, 정의로운 신은 마침내 땅을 상속한다는 것이 '계약'이다. 누가 땅을 상속받을 것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은 나그네들을 위해 준비된 땅이다.

2. 의와 자비의 역전

              복되다 그 의를 굶주려하고 목말라 하는 이들은,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복되다 가엾이 여기는 이들은,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가엾이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역전이 시작된다. 즉 숨이 짓눌린 병자들, 울 수 밖에 없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살 땅이 없어 그 땅을 구하는 비천한 이들은, 그 의를 갈망하게 되었다. '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요,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 인정받는 것이요, 오는시대를 사는 것이다. 하마르톨로스가 감히 꿈 꿀 수 없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들 눈 앞에 있는 예수를 통해 그 의가 채워졌다(이뤄졌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며, 그 예수 안에서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 인정받을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게 되었고, 오는시대를 살게 되었다. 

  이 위의 두 절은 병행으로서 함께 읽을 수 있다. (이 두 절을 중심으로, 팔복의 구절들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 의를 굶주려 하는 사람은 자비롭다. 자비로운 사람은 신의 자비를 입고, 그 신의 자비는 그들을 배부르게 한다.

        복되다 가온에 있어서 깨끗한 이들은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그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땅을 구하고 상속받는 이들과 연관된다. 땅이 없어도 하나님을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땅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실 땅에서의 삶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인격의 깨끗함이다. 깨끗한 인격으로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실 땅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복되다 평화를 만드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아들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애통하는 이들과 연결된다. 우는 사람이 위로받는다. 평화는 이웃 혹은 국가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단어인데, 울 때 서로 위로해주는 관계가 곧 평화요, 이웃과의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복되다 의를 위해서 고생했던 이들은, 
       왜냐하면 하늘들의 나라가 그들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숨결이 짓눌렸던 이들과 연결된다. 이로써, 그들의 짓눌림은 모두 의를 위한 고생이었음이 드러나고, 하늘들의 통치가 그들에게 속했다는 최초 진술로 돌아온다. 

3. 그들이 너희들, 예언자의 계보를 잇는 소금


  아마도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팔복이 자기 자신들에 대한 내용임을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산에서 선언된 말씀은 3인칭으로 "~하는 이들은" 이 신의 통치에 참여한 사람들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2인칭으로의 전환이다.  

       그 복된 이들이 너희들이다, 
 
  그리고 팔복의 내용은 그들의 당면한 현실로 이해된다. 

      그들이 너희들을 욕하고 추적하고 
      나를 위해 거짓말 당하는 너희들에게
      온갖 나쁜 것을 말할 때면 꼭 그렇다. 
      너희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왜냐하면 너희들의 보상이 하늘들에서 넘치기 때문이다. 
      즉 이처럼 너희들 앞서 있던 예언자들을 그들이 박해했다.

  여기서 이 산에 모인 사람들을 욕하고, 추적하고, 이들을 속이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땅의 상속자"라 말하고 있다. 그들은 힘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가져가자, 그것에 분개하여 이들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일을 당할 때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고 말한다. 그 일을 당하는 사람이 이 언어들이 가리키고 있는 주인공이다. 그런 일을 당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 "하나님의 아들들", "땅의 상속자"임에 분명하다. 그는 당한다. 갚아줄 수도 없는 비천한 처지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더욱 자신이 누구인지 더 분명해진다. 이들의 처지보다 더 보복하시는 하나님을 더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없다. 토라의 결말(신명기 32:35)은 신의 보복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2:14~21, 개인번역

  여러분을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흐느껴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를 향해서 이와 같은 마음을 품어,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오히려 짓눌린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자신에 대해서만 사려깊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온전한 일을 앞서 생각하세요.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사세요.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들이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사안을 맡기세요. 기록되기를, 

  "원수 갚음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원수가 배고프거든, 언제든지 그를 먹이십시오. 만약 그가 목마르거든, 언제든지 그를 마시게 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여러분이 그 원수의 머리 위에 핀 숯불을 쌓아놓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정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세요.
  다만 신은 우리가 우리의 손을 더럽히지 않길 바라신다. 

이사야 59: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그리고 이러한 삶은 예언자들의 계보를 잇는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온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에게 핍박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핍박 속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에 진실을 전달하고 그 세상이 망하지 않게 한다. 그래서 팔복 이후 이어지는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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