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83日.


  우리는 요즘 '토라 이야기'에 대해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집이라 생각해본다면, 이 토라 이야기는 1층입니다. 집을 사러 모델 하우스에 들어왔다고 생각해보세요. 1층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고, 2층도 올라가보고, 테라스에도 나가보고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 속에서 살 것이니, 신중하게 들여다 볼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우리가 살 집입니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로 세상을 읽고, <성경> 이야기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 <성경>이라는 집을 1층에서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1층을 크게 크게 얘기하자면, 다음 여섯 개의 카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창조된 우주와 인간


  지난 주 1, 2, 3번 그림들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했습니다. 먼저 '창조된 우주와 인간'입니다. 창조는 빛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생겨난 이후, 하늘과 땅이 생겨났습니다. 하늘은 하나님 계시는 빈 공간이고, 땅은 사람 사는 지구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늘과 땅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하늘과 땅 사이에 세우셨습니다.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이 모든 말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다스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다스림'은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원을 부탁받은 정원사를 생각해보세요. 다스림은 가꾸고, 돌보고, 살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생명답게 다룬다는 말입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저 명령 때문에 사람이 자연을 파괴했다고 얘기합니다만, 정말로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신 '다스림'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바로 이 일 하기를 원하십니다.


  게다가 '다스림'은 왕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니 다스림은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왕의 일을 사람에게 맡기셨으니, 사람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왕입니다. 그렇다고 또 그 왕이 제 멋대로 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왕'은, 세상을 구석구석을 사랑하며 돌보는 책임을 맡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2. 타락한 인간 망가진 세계



-매 순간 선택의 순간 속에서 왕처럼 살기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선악과 앞에 서는 아담과도 같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과 악을 구분하는 앞에 섰다면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계속 선악과를 따먹는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선택이, 생명을 미워하고 죽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싸움을 할 때면 이러한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말싸움을 할 때, 네 말이 맞냐, 내 말이 맞냐 싸우며,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런데 그 때 '누가 맞냐'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하고서 이 민족이 둘로 쪼개져 싸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저 사람이 생명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선악과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때 마다 생명을 생명답게 다루는 정원사가 되지 못하고, 나 하나 살기 위한 것을 선이라 착각한다면, 그것이 정말 타락입니다. 아담의 모습입니다. 생존의 수레바퀴 속에서, 살고자 선택하면 타락이고, 살리고자 선택하면 생명입니다. 


-일상이 되지 못하면 힘 없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것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의 힘은, 저 생명 살리는 선택이 '일상'이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아담을 극복하는 길은 일상에 있습니다. 즉 일상 속에서 생명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람, 참된 왕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어렵습니다. 가끔 불쌍한 사람 위해서 내 남은 돈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는 일이지만, 날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아끼고 돌보는 일이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을 말합니다. '쉬지 말고'를 말합니다. '범사에', 즉 '모든 일에'를 말합니다.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사랑으로 해요, 일상 속에서 곧게 생명!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하는 이의 말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고자 했했던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는 '비뚤어짐'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에서 비뚤어진 것입니다. 즉 생명을 가꾸고 돌보는 왕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인데, 여기에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럼 왜 비뚤어지고, 왜 생명 살릴 수 없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일상 속에서 생명 살리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지킬 수 없고, 생명을 생명답게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뚤어진 사람의 일상 속에서 부차적인 일, 혹은 잊혀진 일이 됩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그들은 당장 옳고 그름을 내가 판단하는 것보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살려 '하나'를 만들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선과 악을 나눠보려다 '둘'을 만듭니다. 그에게는 옳고 그름, 니 편 내 편 가르는 일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보려고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게 되고, 내가 옳다고 스스로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죄다 선악과를 먹는 일입니다. 옳고 그름 앞에서, 우리는 무언가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 숨결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쉐마'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이스라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를 이루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왕은, 수없이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 속에서도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일상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불연듯 찾아왔던 선악과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아담은 보기 좋게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채, 무언가 옳은 것을 스스로 찾아보려고 했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나 하나 살 것만 눈에 보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고자질 하는 최초의 인류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결코 생명 살림이 일상이 될 수 없는, 병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 : 하나님에 대한 수치와 자랑

  죄를 지어, 하나님과 끊어진 사람은, 왕의 역할을 다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의 영향은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병들게 만듭니다. 그 문제 중에 하나는 '부끄러움'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쑥스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치스러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가르는데, 하나님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자고 말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21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 선포가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단순한 말로는,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작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랑합니까?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이는, 생명 살림을 일상적으로 할 수 없는 자기 자신도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수치를 감추기 위해 하나님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자랑합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생명력이 없을 때,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서 하는 것이 자랑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 옷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감추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계속 무언가 자랑거리를 찾으며, 그것을 '인생의 꿈'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 더 하나님 아닌 것으로 자랑할 수 있을지를 서로 경쟁합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 없는 자랑'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겸손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 좋아하는게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힘들어"라는 노래도 있는가 봅니다. 게다가 겸손 앞에는, 겸손 자체가 자랑이 될 수 있는 함정도 놓여 있으니 더욱 힘든 일입니다.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게 될 수 있을까요? 

  무언가 잘 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드러내보이고 싶고, 칭찬받고 싶습니다. 이것을 제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럴 때, 자신을 감추고, 하나님 한 분을 드러내는 마음이야 말로, 성령으로 새롭게 된 마음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은, 이것을 가끔이 아닌 일상 속에서 이뤄갑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 속이 하나님이 사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살고, 어느 날은 안 계신게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일상 속에서, 사랑과 겸손을 이뤄나갑니다. 예수 믿는 이들의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일상을 바꾸는 힘입어,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으로 하나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제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날마다 새로워지기에, 다른 것을 결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을 자랑하기,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력이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들어와, 목숨을 뛰어넘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숨결, 곧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부어진 창조의 숨결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새 마음을 창조하시는 주의 영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서 항상 계시는 것만이, 수치와 자랑의 문제를 해결하고,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에 "주 안에서 자랑하라" 라고 기록된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제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이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흔히 시상식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이 '영광'이라는 말은 본래 '뚜렷이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자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낸다" 와 같은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만 자랑하는 사람의 삶을 통해, 뚜렷이 드러나십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성령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 생명 얻은 사람은 다시 하나님을 밖으로 드러냅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우리의 날마다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나님만 자랑하는 삶이 됩니다. 제 속에 성령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 가릴 것이 없으니, 내 속에서부터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허나 하나님이 속에 안계셔서, 선과 악의 문제 앞에서 자기 생각으로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은, 사탄의 꾀임에 넘어감이요, 하나님보다 더 빛나는 것이 있다고 착각함이요, 그 결과는 곧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타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인간은 생명으로부터 끊어졌고, 죽음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마치 나무에서 잘려져 나간 가지처럼, 당장은 그 잎이 푸르름을 유지할지언정, 시간이 가면 말라비틀어져, 모든 생명력을 소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것을 자랑하며, 서로를 수치스럽게 여기느라,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이 다스림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결책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해결책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함께 살펴봅시다. 



부끄러움과 자랑의 문제(수정).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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