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나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다음은 메일 전문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
버트란드 러셀
(이것은 1927년 3월 6일 국제 세속주의 협회 남-런던 지부의 요청에 따라 버트란 러셀이 행한 강의이다.)
여러분의 위원장께서 여러분들에게 말한 것과 같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강연할 주제는 "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매우 느슨한 차원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단지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종교적 집단과 교리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적합한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불교신자들, 유교신자들, 모슬렘들, 등등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마치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깨달음에 따라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 전에 여러분은 어떤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 단어는 오늘날 성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 때처럼 온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정밀하게 짜져 있는 모든 교리들을 받아들였고 그 교리들의 모든 글들을 확신과 힘을 다해 믿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는 기독교라는 말의 의미에 있어서 좀 더 막연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교리적 성격인데, 당신은 하나님과 불멸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당신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단어가 의미하는대로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모하메드인은 신과 불멸을 믿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는 당신은 최소한 그리스도가 신이라고 믿던지 아니면 적어도 최고의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 정도로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요소는 당신이 "위태커의 연감"(Whitaker's Almanack, 영국 매년 나오는 백과사전식의 잡지)이나 지리책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세계 인구는 그리스도인, 모슬렘, 불교인, 미신을 믿는 자, 등등의 사람들로 나뉘는데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리책은 우리를 다 포함시킵니다. 물론 지리적 차원에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무시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를 말할 때 나는 두 가지를 말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왜 하나님과 불멸을 믿지 않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 나는 왜 그리스도가 최고의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를 말해야 합니다. 물론 나는 그가 높은 도덕적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한편 과거 불신자들의 성공적인 노력에 부응하여 나는 기독교의 정의를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오래전에 기독교라는 말은 온전한(full-blooded)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옥을 다 믿었습니다. 영원한 지옥불에 대한 신앙은 최근까지도 기독교 신앙에 핵심적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 나라에서는 그것은 더 이상 핵심적 요소가 아닙니다. 추밀원(Privy Council, 영국국왕 자문단)에서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지요. 비록 캔터베리와 요크 주교들은 반대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 나라에서는 우리의 종교는 의회에 따라 정해지고 그리고 추밀원에 의해 그들의 생각을 번복할 수 있고 지옥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지옥을 믿어야 한다고 저는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존재
신의 존재는 중대하고 심각한 질문입니다. 만약 제가 어떤 합당한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하면 전 여러분들을 주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여기 가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요약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 저를 용서하셔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천주교회는 신의 존재를 어떤 도움 없이 오직 이성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 도그마(교리)로 믿도록 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도그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여러 도그마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들이 도그마로 세운 것은 자유로운 사색가들이 단순한 이성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여러 논증들을 세운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음에 관한 문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논증들과 이유들이 주장되어 왔고 천주교는 그러한 주장들을 멈추도록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존재는 이성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논증들을 제시했어야만 했습니다. 많은 논증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초 원인 논증
아마도 가장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논증이 바로 최초 원인 논증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는 모든 것들은 원인을 가지고 있고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 계속 뒤로 가면 최초 원인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초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증은 오늘날 잘 통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원인의 개념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원인에 대해 많이 논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떤 생명력 같은 것이 더 이상 아닙니다. 최초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논증은 유효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청년이었을 때 내 마음에 이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논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18살 정도 되었을 때 죤 슈트어트 밀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이러한 글을 읽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누가 나를 만들었어요?'라는 질문은 답할 수가 없다고 가르쳐 주셨다. 왜냐면 그것은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어요?'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문장이 최초 원인 논증의 오류를 나에게 즉시로 알려주었습니다. 여전히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원인이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하나님처럼 세상에도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초 원인에는 유효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논증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지구는 코끼리 위에 자리 잡고 있고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있다. 그리고 그 거북이는 어떻게 있느냐 물으면 인도 사람은 "화제를 바꾸자"라고 말하는 주장과 정확하게 같은 주장입니다. 최초 원인 논증은 이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 세계가 원인 없이 발생될 수 없다고 말할 이유가 전혀 없고, 왜 이 세계가 항상 존재해 왔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 세계에 처음 시작이 있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습니다. 존재물이 처음 시작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우리 상상력 결핍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초 원인 논증에 더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 법칙 논증
자연법칙에서 시작되는 공통적 논증이 있습니다. 18세기에, 특히 아이작 뉴턴과 그의 우주원인론에 의해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논증입니다. 사람들은 항성들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명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항성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중력의 법칙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아주 편리하고 간단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인스타인이 소개했듯이 중력의 법칙을 좀 복잡하게 설명합니다. 저는 중력의 법칙에 대한 아인스타인의 이해를 강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자연이 일정한 방법으로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그 뒤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하는 뉴톤 식의 자연 법칙을 더 이상 따르지 않습니다.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 인간의 관례적 약속들임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여러분들은 별들 사이의 공간의 가장 먼 곳에도 여전히 3피트(91.4센티미터)는 1야드(91.4센티미터)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것을 자연의 법칙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이라고 불렸던 많은 위대한 것들이 이런 종류의 것입니다. 한편 원자들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 알게 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한 법칙들은 우연으로부터 나타나는 종류들의 통계적 평균치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여러분들이 두 개 주사위를 던진다고 할 때 36번 시도에 한 번 더블 식스가 나올 확률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사위의 결과가 설계에 의해 규정된 것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만약 더블 식스가 매 번 나온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어떤 설계에 의해 된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자연 법칙에 많은 부분이 이런 것입니다. 우연의 법칙에서 나타나는 통계적 평균치들입니다. 이것은 자연 법칙을 이전처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내일을 바꿀 수 있는 과학의 순간적 상태를 나타낼 뿐이고 자연 법칙들은 제정자를 전제한다는 개념은 자연 법칙들과 인간의 법칙들 사이의 혼동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법칙들은 여러분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고 또한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식대로 명령하는 것이고 자연 법칙은 어떻게 사물들이 움직이는가에 대한 묘사이며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묘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로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설령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해도 이러한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것들이 아닌 그러한 자연 법칙들을 만들었는가? 만약에 그가 어떤 특별한 이유 없이 그의 선하신 뜻대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그 법칙에 따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자연 법칙의 질서가 흐트러질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좀 더 보수적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신이 정해 놓으신 모든 법칙들에 다른 것들이 아닌 그 법칙들을 주신 이유(최고의 우주를 만들고자 한 이유)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면, 정말 신이 주신 법칙들의 이유가 있다고 하면 신 자신도 그 법에 따라야 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이 신을 중개자로 삼는 것은 별로 좋을 것이 못됩니다. 당신은 신적 섭리 밖에 혹은 그 섭리에 앞 선 법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신은 당신의 의도에 벗어날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궁극적 제정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연 법칙에 대한 논증은 더 이상 이전처럼 어떤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그 논증을 평가함에 있어서 시간을 따라 여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위해 사용되었던 논증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성격을 달리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분명한 오류들을 담고 있는 고지식한 논증들입니다. 그것들은 현대에 올수록 점점 지적 관심을 끌지도 못할 것이고 점점 일종의 도덕적 애매성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설계로부터의 논증(목적론적 논증)
다음 논증은 바로 설계로부터 추론하는 논증입니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계가 지금과 조금이라도 달랐다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계로부터의 논증입니다. 이것은 가끔 흥미로운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토끼는 쉽게 맞추기 위해 하얀 꼬리를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토끼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패러디하기 좋은 쉬운 논증입니다. 코는 안경 쓰기에 좋도록 만들어졌다는 볼테르의 평을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패러디는 18세기에 생각했던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촬스 다윈으로 인해 우리는 왜 생물들이 환경에 잘 적응하는지 훨씬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그들에게 맞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환경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관한 설계에 대한 증거는 없습니다.
설계로부터의 논증을 살펴볼 때 사람들이 이 세계를 (또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과 또한 모든 결함들을 포함하여)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가 수 백만년 걸려 만들 수 있는 그러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매우 놀라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도무지 그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전지 전능한 존재이고 당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수 백만년이 주어졌다고 하면 KKK와 파시스트보다 나은 사람들을 만들지 못하겠습니까? 더욱이 만약에 당신이 일반적인 과학 법칙들을 받아들였다고 하면 당신은 지구상의 인간과 모든 생명들이 시간이 되면 다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태양계의 소멸 단계입니다. 소멸의 어느 단계에 가서는 원형질에 적당한 온도 조건 같은 것을 가지게 되며 전체 태양계에 잠시 동안만 생명이 존재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구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일종의 죽음, 냉기, 무생명 등의 그 무엇을 달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견은 사람들의 마음을 암담하게 만든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 그런 것을 믿고서야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믿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모두 넌센스입니다. 수백만 년 후에 일어날 일 때문에 정말 걱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설령 그 일 때문에 자기가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상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훨씬 더 세상적인 일을 걱정하고 있거나 아니면 단순한 소화불량일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수백만 년 후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어떤 일을 생각해서 정말 심각하게 불행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어진다는 것은 물론 우울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는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위안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둬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불행하게 해줄 그런 것은 아니며 단순히 여러분의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뿐입니다.
도덕적 논증
이제 우리는 유신론자들이 그 논증의 활동에서 세워 놓은 지적 계보라고 할 수 있는 그 다음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신 존재를 위한 도덕적 논증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옛날에는 신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지적 논증이 있었습니다. 이 논증들은 모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언급되었지만 그는 자신을 확신시켜준 새로운 논법, 즉 도덕적 논법을 발견한 후 다 버렸습니다.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지적 문제에는 회의적이었으나 도적적 문제에 있어서는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격언들을 맹목적으로 믿듯이 믿었습니다. 이것은 정신 분석가가 말한 훗날의 기억보다 유년 시절의 기억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주장을 위한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칸트는 신 존재에 대한 새로운 도덕적 논증을 발견했으며 이것은 여러 가지로 형태로 발전되어 19세기에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옳고 그름에 차이가 있는 것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관심있는 것은 만약 여러분들이 옳고 그름에 차이가 있다고 확신하신다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차이가 신의 명령 때문에 주어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신의 명령 때문이라고 한다면 신 자신을 위해서는 옳고 그름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선하다고 하는 말은 더 이상 중요한 말이 아니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옳고 그름이란 하나님의 명령과 독립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명령들은 그가 그 명령들을 만드셨다는 단순한 사실과 독립되어 선하고 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옳고 그름은 하나님을 통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핵심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하나님보다 선행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이 세상을 만든 하나님에게 명령을 주신 더 위대한 신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매우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지 않는 순간에 악마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전 이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불의(injustice) 교정(remedying) 논증
도덕적 논증의 하나로 매우 흥미로운 형태의 논증이 있습니다. 세상에 정의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신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심각한 불의가 있음을 압니다.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악한 자들이 흥왕하는 것,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혼란스러운지도 잘 모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온 세상에서 공의를 보고자 한다면 이 지구상에 있는 삶의 균형을 바로 잡을 미래의 삶을 가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어야 하고 결국 공의가 있도록 하기 위해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매우 흥미로운 논증입니다. 만약 이것을 과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난 오직 이 세상만 안다. 나는 이 우주의 다른 부분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능성에 대해 주장한다고 할 때 이 세상은 어쩌면 한 샘플일 수도 있고 만약 여기 불의가 있다고 하면 다른 곳도 불의가 있을 확률이 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한 번 당신이 뜯어 본 오렌지 상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맨 위층에 상한 오렌지를 발견한다고 했을 때 당신은 "그러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즉 교정을 위해서) 밑에 있는 오렌지들은 분명 좋은 것일꺼야"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마 전부 불량품일꺼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적 사람이 이 우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 이 세상에 많은 불의를 발견한다. 이것이 이 세상에 공의가 다스리지 않음을 상상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신의 존재가 아니라 신의 무존재를 위한 도덕적 논증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물론 제가 말하고 있는 지적 논증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나님을 믿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지적 논증이 결코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배워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다음 강력한 이유는 당신의 안전을 위해 돌봐 줄 큰 형이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
이제 저는 그 동안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에 관해 잠깐 논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최고의 그리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에 대해서 어디까지 확인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한층 더 나아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교훈도 원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노자와 석가에 의해서 500-600년 앞서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만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영국 현 총리(스탠리 볼드윈)는 매우 진실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그의 뺨을 한 대 치라고 권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것이라고 그도 생각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그리스도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원리는 기독교 국가 재판소에서조차 실행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매우 솔직한 많은 기독교 판사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기독교 원리와 반하여 행동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또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원리입니다. 여러분의 위원장께서 우리는 여기 정치를 논하고자 모인 것이 아님을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총선거에서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지 관찰하게 됩니다. 이 나라에 진보당과 보수당이 예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분명히 그 가르침을 강하게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과 깊이 관련된 그리스도의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기독교 친구들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온전하고자 할진데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교훈입니다. 그러나 실천에 옮기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교훈들은 지키기 힘들지만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역시 그 교훈들에 맞춰 살지 않습니다. 결국 기독교인에게는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예수의 교훈의 결함들
그 교훈들의 우수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복음서에 묘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위대한 지혜와 선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역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싶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가 존재했느냐 하는 것은 의심할만 합니다. 만약 존재했다면 그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우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저는 복음서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난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렇게 현명해 보이지 않는 내용들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예로 그는 그의 재림이 당시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죽음 전에 영광스러운 구름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이스라엘 동네를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구절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처음 제자들기 믿었던 바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대부분 도덕적 교훈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과 이와 비슷한 종류의 말들은 그가 재림이 곧 일어날 것이고 모든 평상적 세상일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사실 재림이 곧 임할 것으로 아직도 믿고 있는 그리스도들을 좀 압니다. 또 제가 한 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은 예수의 재림이 곧 임한다며 자신의 신도들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가 자기 정원에 나무를 심는 것을 보고 신도들은 위로를 받았다는 것 아닙니까? 초대교회 신도들은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정원에 나무를 심는 것 같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예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렇게 현명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결코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문제
이제 도덕적 문제를 다루어 봅시다. 예수의 도덕적 성품에 매우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지옥의 존재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인도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영벌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 계속적으로 분노를 표출한 것을 발견합니다. 물론 이것이 설교자의 공통적 모습이기는 합니다만 결코 뛰어난 모습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매우 온화하고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화를 내는 것보다 성인에게는 훨씬 더 가치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한 말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바람직한 말이 아닙니다. 또 지옥에 관한 이런 유의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이 세상과 올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이 세상에 말할 수 없는 양의 비참함을 야기시켰습니다. 각양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품에 적합한 친절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에 그런 식의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슬피 우는 것과 이를 갊을 언급합니다. 한 구절 넘어 계속 나옵니다. 마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을 생각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비쳐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자주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은 양과 염소의 구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염소에게 말하기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한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의 말을 계속합니다. 지옥불이 죄의 벌이라는 교리는 잔인한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교리는 오히려 세상을 잔인하게 만들고 이 세상에 잔인한 고문의 시대를 허락했습니다. 만약 예수를 복음서가 기록한대로 그렇게 말했다면 세상이 이렇게 된 것에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요성에 있어서 떨어지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가다라 지방의 돼지가 한 예입니다. 돼지에게 귀신이 들어가 바다로 뛰어들어 죽게 한 것은 돼지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것입니다. 그는 전능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귀신들로 그냥 떠나도록 할 수 있었을텐데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또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도 매우 흥미롭고 저를 늘 당황케 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시장하여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갔더니 가서 본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가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리고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는 기록입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는데 그 나무를 탓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 솔직히 지혜에 있어서나 덕에 있어서나 예수가 인류 역사상 알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고 도무지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부처나 소크라테스가 예수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적 요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저는 사람들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어떤 논쟁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종교를 단지 감정적 차원에서 받아들입니다. 가끔 종교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듣습니다. 왜냐면 종교는 사람들을 덕행이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들었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무엘 버틀러의 책, <에레혼 재방문>(Erewhon Revisited, 에레혼은 판타지 가상 나라입니다.)에 나오는 패러디를 아실 것입니다. 멀리서 에레혼에 도착한 힉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을 보내고 그는 풍선을 타고 그곳을 떠납니다. 20년 뒤에 그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와 "태양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로 추앙받는 종교를 창설합니다. 그는 하늘에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승천을 위한 잔치를 열려고 할 때 힉스는 행키 교수와 팽키 교수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은 힉스라는 사람에게 자신의 눈을 고정한 적이 없고 앞으로 그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은 "태양 아들" 종교의 대제사장들입니다. 힉스는 격분합니다. 그들에게 와서 말합니다. "나는 이 모든 허위를 밝힐 것이며 에레혼 사람들에게 나, 힉스만이 풍선을 타고 올라갔음을 말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모든 도덕은 이 신화에 의해 형성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당신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은 것을 알면 이들은 속은 것을 알고 사악하게 변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자 물러서서 조용히 그 곳을 떠납니다.
만약 기독교의 주장에 수긍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도 사악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경우 매우 사악한 것 같습니다. 한 시대에 종교가 강할수록 그리고 교조적 신앙이 깊을수록 잔인함이 더 컸고 상태가 더 안 좋았습니다. 소위 믿음의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온전하게 믿었습니다. 그 때 갖은 고문이 성행했던 종교재판이 존재했습니다. 수 많은 여인들이 마녀로 정죄되어 억울하게 화형 당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갖은 잔인함을 가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돌아보면 인도적 감정의 진보와 형사법의 개선과 전쟁 억제의 단계와 유색인종을 향한 처우 개선과 노예제도 철폐와 이 땅에 있었던 모든 도덕적 진보는 교회 조직들에 의해 반대되었던 것들입니다. 그 중 기독교가 이 땅의 도덕적 진보의 최대 적이었고 아직도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강하게 말합니다.
어떻게 교회들이 진보를 지연시켰나?
제가 기독교가 아직도 그렇다고 말할 때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사실을 예로 들어보죠. 잠깐 인내하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렇게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한 순진한 여자가 매독에 걸린 남자와 결혼했다고 가정합시다. 이 경우 천주교회는 "결혼은 불변의 성례입니다. 당신은 금욕을 견디든지 함께 지내야 합니다. 만약 함께 지낸다면 당신은 매독에 걸린 아이를 낳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피임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연적 동정심이 독단적 교리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도덕적 성품이 고통에 절대적으로 죽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옳고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 현재 교회는 여러 가지로 방법으로 소위 도덕이라는 미명아래 여러 사람들에게 합당치 않고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당연히 아시겠지만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여러 가지 방법의 진보와 개성을 여전히 막고 있는 것이 교회의 주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교회는 도덕이라는 미명으로 인간 행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편협한 행동 규범을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인간 행복을 위해 이것 저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교회는 그것은 행복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행복이 도덕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도덕의 목적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려움, 종교의 기초
제 생각에는 종교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주로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모르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요 부분적으로 당신이 어려울 때 옆에서 지켜 줄 큰 형과 같은 존재를 가지고 싶어하는 느낌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모든 것의 근거입니다. 신비에 대한 경외, 패배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잔인성의 부모입니다. 그래서 잔인성과 종교가 서로 손잡고 간다는 것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이 두 가지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사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기독교와 교회와 모든 옛날 교회들에 반대하는 과학의 도움으로 그 세상사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과학은 수 세기 동안 인류가 지녀왔던 비겁한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를 가르칠 수 있고 또 우리 자신의 심장도 우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어떤 상상의 도움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늘의 후원자들을 만들지도 마십시오. 수 세기 동안 교회들이 만든 장소 말고 여기 아래 이 세상을 우리가 살기 더 좋은 곳을 우리 자신의 노력을 믿어보세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서있기를 원하고 좋은 사실들, 나쁜 사실들, 아름다운 것들, 흉한 것들 모든 것을 포함한 이 세상을 공정하게 그리고 바로 보기를 원합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지식으로 세상을 정복하세요. 공포에 의해 정복당하여 비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고대 동양의 전체주의에서 온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인에게는 가치 없는 개념입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여러분들을 죄인이라고 하면서 여러분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말을 하는 것은 자존적인 사람에게는 경멸적이며 가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서서 세상을 정면으로 솔직하게 봐야 합니다. 이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옛날 상태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좋은 세상은 지식과 친절과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 세상에는 과거에 대한 후회도 필요 없고 오래 전에 무식한 사람들의 말들에 의해 자유로운 지식에 족쇄를 채우는 일도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는 조망과 자유로운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 죽은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이 창조할 미래는 훨씬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러셀이라고는 '하이퍼 러셀 요요'밖에 모르던 나에게, 14페의 글로 나비처럼 찾아온 그. 사실 우리집에는 그의 책도 있다. 러셀의 서양철학사. 그는 나의 철학 선생님이자, 내 전도 대상자. 물론 그는 죽었지만, 아직 그의 사상은 살아있다. 그의 저서들은 무신론자들의 필독서니까. 나는 내가 그에게 대답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쓰는 다음의 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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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박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의 수원이라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전도사입니다. 저는 오목천동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데, 아마, 박사님은 모르시는 곳일거에요.
저는 박사님이 믿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기독교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에게 박사님은 참으로 어려운 사람입니다. 박사님 저서들이 얼마나 영향이 컸던지, 돌아가신지 한참 지난 오늘날에도 무신론자들은 박사님 저서를 필독서로 권할 정도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 가르치기가 많이 빡빡해졌습니다. 박사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은 정말 많아요.
박사님이 알지 못하는 시골 촌구석 전도사가, 박사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을 비판한다면 받아주시겠습니까? 일개 인간이, 신에 대해서 그럴듯해보이는 험담을 늘어놨을 때, 신은 박사님께 불벼락을 내리지 않았던 것과 같이, 저에게도 같은 관용으로 제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사님이 쓰신 순서대로 저의 의견을 개진하겠습니다.
1.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박사님은 그리스도인을, 1) 하나님과 불멸을 믿는 자, 그리고 2) 그리스도를 가장 지혜롭게 믿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건 첫 단추부터 완전 잘못 끼운거에요. 이렇게 불멸과 지혜를 전제하고 들어가니까, 예수는 소크라테스와 다를바가 없어졌습니다. 아, 만약 박사님이 듣보잡이었다면 저는 이 글을 읽지도 않고 스크롤을 내렸을거에요. 박사님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호도하는 사람이니까, 이 시작부터 엇나간 글을 제가 읽느라 시간을 낭비합니다. 박사님은 가장 중요한 특이점을 놓치고 가셨습니다.
먼저 불멸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박사님이 의도하는 불멸은 무엇입니까? 불멸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영혼의 상태에서 얻는 불멸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범신론자들처럼 이 땅에 삶으로든 죽음으로든 귀속되는 것도 불멸이라 할 수 있겠죠. 도대체 불멸이 뭡니까? 세네카는 불멸을 믿고서 목숨을 걸고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세네카를 믿지 않습니다. 박사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될겁니다. 불멸과 지혜를 기독교인을 규정하는 요소라 전제하니까, 불멸과 지혜를 추구한 많은 사람들 제쳐두고 예수만 믿는 사람들이 모순처럼 느껴지실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착각하니까요.
기독교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부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인이 말하는 불멸의 뜻입니다. 그리고 박사님이 '기독교인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답하시려 했다면, 당연히 이 문제를 먼저 짚으셨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생겨난 이유가 바로 부활이니까요. 소크라테스와 다르게 예수는 부활했고, 그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500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전했습니다.(부활의 의미는 차차 말씀드릴게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 운동은 곧 부활운동이었습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새로운 몸(이것도 뒤에 말씀드릴께요)을 입고 일어난 한 사람에 대한 신앙. 이것이 기독교인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 하잖아요. 불멸과 지혜가 아닙니다. 핀트가 어긋났어요. 죽음을 이긴 부활한 한 사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입니다. 물론, 이 부활은 영혼의 상태에서 얻는 지복의 상태가 아니고요(박사님은 이러한 상태를 '불멸'이라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다시 정리해봅시다. 기독교인은, 불멸과 지혜가 조건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2. 신의 존재
그래요. 이제 이어지는 내용들은 부활없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입 안을 텁텁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될 것입니다.
1) 최초 원인 논증
최초 원인 논증이 완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저도 이것에 얽매이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상상력 결핍을 말씀하셨잖아요. 오히려, 창조주에 의해서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믿지 못하는 것도 상상력 결핍에 포함되나요?
2) 자연 법칙 논증
파스칼은 자연법칙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규명하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자연은 규칙도 가지고 있지만 변화무쌍하기도 합니다. 자연을 닮은 신들의 대표적인 경우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죠. 얼마나 변화무쌍합니까? 게다가 자연은 확률게임으로 빠지면, 할 말이 없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신을 믿는 이에게는 신의 섭리로, 확률을 믿는 이에게는 절묘한 확률로 보일테니까 말입니다. 자연 법칙의 논증으로도 신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도 박사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부활을 빼버리면 기독교 진영이나, 반대 진영이나 별로 할 말들이 없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3) 목적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도 결과에서부터 원인을 도출한 것이니, 제대로 된 논증이 될 리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언급해야 겠습니다. 지금 세계의 모습이, 결코 세계의 최종 모습일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의 모습이 잘 갖추어져있다한들, 이것이 절대자가 바라는 세계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두 가지 근거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은 언제나 선하신 신이 창조했다고 보기에는 악의 존재가 너무도 분명하죠. 둘은 부활이 지금 이 시대가 창조주의 최종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도덕적 논증 : 악의 문제
이제 이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악에 관해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박사님의 글자들은 폭격을 맞은 듯 이리 저리 난리가 났습니다. 신을 못믿는 분이 영지주의 악마설까지 입에 담으신다니요. 옳고 그름은 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야 분석철학 할 수 있지요. 이성으로 옳바른 것을 담지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연구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옳고 그름은 천사와 악마의 대결이 아닙니다. 옳음의 세력과 그름의 세력이 있어 어느 한 쪽에 속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름의 세력은 옳음의 세력에 기생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박사님을 까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박사님이 있어야 까는 사람들이 생기죠. 그리고 기독교인이 있어야 박사님처럼 기독교를 까는 사람들이 생기죠. 언제나 옳음이 있고, 그름은 그 옳음에 상대적으로 기생합니다. 그래서 옳음에는 절대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지만, 그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말대로 빛과 어둠의 유비에 더 적합하죠. 빛의 부재가 어둠일 뿐, 어둠은 빛과 싸우지 않습니다.
저는 박사님이 믿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기독교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에게 박사님은 참으로 어려운 사람입니다. 박사님 저서들이 얼마나 영향이 컸던지, 돌아가신지 한참 지난 오늘날에도 무신론자들은 박사님 저서를 필독서로 권할 정도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 가르치기가 많이 빡빡해졌습니다. 박사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은 정말 많아요.
박사님이 알지 못하는 시골 촌구석 전도사가, 박사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을 비판한다면 받아주시겠습니까? 일개 인간이, 신에 대해서 그럴듯해보이는 험담을 늘어놨을 때, 신은 박사님께 불벼락을 내리지 않았던 것과 같이, 저에게도 같은 관용으로 제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사님이 쓰신 순서대로 저의 의견을 개진하겠습니다.
1.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박사님은 그리스도인을, 1) 하나님과 불멸을 믿는 자, 그리고 2) 그리스도를 가장 지혜롭게 믿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건 첫 단추부터 완전 잘못 끼운거에요. 이렇게 불멸과 지혜를 전제하고 들어가니까, 예수는 소크라테스와 다를바가 없어졌습니다. 아, 만약 박사님이 듣보잡이었다면 저는 이 글을 읽지도 않고 스크롤을 내렸을거에요. 박사님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호도하는 사람이니까, 이 시작부터 엇나간 글을 제가 읽느라 시간을 낭비합니다. 박사님은 가장 중요한 특이점을 놓치고 가셨습니다.
먼저 불멸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박사님이 의도하는 불멸은 무엇입니까? 불멸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영혼의 상태에서 얻는 불멸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범신론자들처럼 이 땅에 삶으로든 죽음으로든 귀속되는 것도 불멸이라 할 수 있겠죠. 도대체 불멸이 뭡니까? 세네카는 불멸을 믿고서 목숨을 걸고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세네카를 믿지 않습니다. 박사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될겁니다. 불멸과 지혜를 기독교인을 규정하는 요소라 전제하니까, 불멸과 지혜를 추구한 많은 사람들 제쳐두고 예수만 믿는 사람들이 모순처럼 느껴지실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착각하니까요.
기독교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부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인이 말하는 불멸의 뜻입니다. 그리고 박사님이 '기독교인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답하시려 했다면, 당연히 이 문제를 먼저 짚으셨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생겨난 이유가 바로 부활이니까요. 소크라테스와 다르게 예수는 부활했고, 그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500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전했습니다.(부활의 의미는 차차 말씀드릴게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 운동은 곧 부활운동이었습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새로운 몸(이것도 뒤에 말씀드릴께요)을 입고 일어난 한 사람에 대한 신앙. 이것이 기독교인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 하잖아요. 불멸과 지혜가 아닙니다. 핀트가 어긋났어요. 죽음을 이긴 부활한 한 사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입니다. 물론, 이 부활은 영혼의 상태에서 얻는 지복의 상태가 아니고요(박사님은 이러한 상태를 '불멸'이라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다시 정리해봅시다. 기독교인은, 불멸과 지혜가 조건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2. 신의 존재
그래요. 이제 이어지는 내용들은 부활없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입 안을 텁텁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될 것입니다.
1) 최초 원인 논증
최초 원인 논증이 완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저도 이것에 얽매이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상상력 결핍을 말씀하셨잖아요. 오히려, 창조주에 의해서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믿지 못하는 것도 상상력 결핍에 포함되나요?
2) 자연 법칙 논증
파스칼은 자연법칙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규명하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자연은 규칙도 가지고 있지만 변화무쌍하기도 합니다. 자연을 닮은 신들의 대표적인 경우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죠. 얼마나 변화무쌍합니까? 게다가 자연은 확률게임으로 빠지면, 할 말이 없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신을 믿는 이에게는 신의 섭리로, 확률을 믿는 이에게는 절묘한 확률로 보일테니까 말입니다. 자연 법칙의 논증으로도 신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도 박사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부활을 빼버리면 기독교 진영이나, 반대 진영이나 별로 할 말들이 없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3) 목적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도 결과에서부터 원인을 도출한 것이니, 제대로 된 논증이 될 리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언급해야 겠습니다. 지금 세계의 모습이, 결코 세계의 최종 모습일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의 모습이 잘 갖추어져있다한들, 이것이 절대자가 바라는 세계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두 가지 근거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은 언제나 선하신 신이 창조했다고 보기에는 악의 존재가 너무도 분명하죠. 둘은 부활이 지금 이 시대가 창조주의 최종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도덕적 논증 : 악의 문제
이제 이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악에 관해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박사님의 글자들은 폭격을 맞은 듯 이리 저리 난리가 났습니다. 신을 못믿는 분이 영지주의 악마설까지 입에 담으신다니요. 옳고 그름은 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야 분석철학 할 수 있지요. 이성으로 옳바른 것을 담지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연구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옳고 그름은 천사와 악마의 대결이 아닙니다. 옳음의 세력과 그름의 세력이 있어 어느 한 쪽에 속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름의 세력은 옳음의 세력에 기생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박사님을 까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박사님이 있어야 까는 사람들이 생기죠. 그리고 기독교인이 있어야 박사님처럼 기독교를 까는 사람들이 생기죠. 언제나 옳음이 있고, 그름은 그 옳음에 상대적으로 기생합니다. 그래서 옳음에는 절대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지만, 그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말대로 빛과 어둠의 유비에 더 적합하죠. 빛의 부재가 어둠일 뿐, 어둠은 빛과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으신 것이고,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옳음은 없는 것이며, 절대적으로 옳으신 그 분은 옳음과 그름의 덫에 안빠지십니다. 거기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상대적 타자들에게만 가능한 것이지요.
이렇게 세상에 악이 발생했습니다.
5) 불의 교정 논증 : 악의 해결
악, 불의는 다른게 아니에요. 변덕스러운 사람만큼 악한 것은 없어요. 상대적인 것은 악한 것입니다. 언제는 선하고, 언제는 악한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층위의 오해가 있으신 거에요. 4)번 항목에서, 하나님 마저도 상대적인 분으로 생각하니까, 하나님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죠. 박사님 말씀은,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해결에 대한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의 근거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5) 불의 교정 논증 : 악의 해결
악, 불의는 다른게 아니에요. 변덕스러운 사람만큼 악한 것은 없어요. 상대적인 것은 악한 것입니다. 언제는 선하고, 언제는 악한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층위의 오해가 있으신 거에요. 4)번 항목에서, 하나님 마저도 상대적인 분으로 생각하니까, 하나님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죠. 박사님 말씀은,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해결에 대한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의 근거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런데 부활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 모든 악은 죽음 위에 세워졌습니다. 죽기 때문에 살고자 하고, 살고자 하기 때문에 뺏습니다. 착취와 빈곤 속에서 인격이 말라들어갑니다. 그런데 자꾸 말씀드리지만, 이 죽음을 깨뜨리고 일어난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목격한 사람들과, 이 소식이 전세계로 퍼져나가, 이제 무신론자인 박사님도 이 문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근거가 불충분한 논증이 아니라, 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어릴적부터 배워온 것이 한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박사님과 논하고 싶은 것은, 바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제가 믿고, 믿지 않고를 떠나서 언제나 타당한 것입니다. 저의 인식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기 때문에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시작은 부활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박사님이 부활은 없어라고 말한다고 해도, 역사적 사실이 변하지 않습니다. 역사를 제거한채 기독교를 숙고하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근거를 중요하게 생각하시잖아요. 지금 박사님 논증에는 중요한 근거가 빠져있습니다. 제대로된 결론이 나올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6) 그리스도의 성품
6) 그리스도의 성품
제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왼뺨대기 운동본부입니다. 이 왼뺨을 돌려대라는 말은, 일상에서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지만, 예수는 당시 사회적,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여, 깊은 의미의 층위를 만들어내셨습니다. 박사님은 전혀 이런 층위를 모르시고, 단편적인 성서해석을 가지고 기독교 진리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유대 지역에서는 주인이 종을 경멸하며 때릴 때, 오른손등을 사용해서 뺨을 가격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오른뺨을 맞은 종이 왼뺨을 돌려댔을 때의 그 새로운 상황을요. '이 자는 왜 나에게 왼뺨도 내미는거지?' 이 사람이 다시 왼뺨마저도 때리려고 하면, 손을 트위스트해야 하잖아요. 섬김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악을 깨닫게 하는 지혜이죠.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판단에 대한 말씀도, 이 판단은 법정에 선 판사에게 직무유기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여기서의 판단은 정죄와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서적인 복수심도 포함합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유대사람들은 로마에 대한 복수로 들끓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 더,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소유를 팔아서 주었던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설명하실 것입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박사님의 성서 해석이 단편적입니다. 당시의 역사와 시대상, 그리고 예수의 의도와 목적을 고려하지 않은, 그저 그 시절의 문장을 오늘의 상황에 일대일로 적용해놓고, 어? 맞지 않네? 하면서 폐기처분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런식의 태도로는 그 어떤 고전 텍스트도 읽을 수 없을텐데요.
7) 예수 교훈희 결함들
박사님은 불트만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듯 합니다. 그 때는 복음서가 교회의 목적을 위해서 짜집기된 문서라고 생각했었고, 결국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고 결론내렸었죠. 그러나 시대는 많이 변했고, 이제 많은 신학자들은 그 복음서가 일관된 신학을 가진 저자에 의해서 정교하게 쓰였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존재했고, 우리는 그에 대해서 정말 많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과거 인물 중에서 그리스도 만큼의 많은, 다양한 관점의, 그러나 일관된 문헌들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6)번 항목에서 언급한 오류들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동네를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오리라" 혹은,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이 구절들은 재림을 가리키는 구절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가리킵니다. 인자는 다니엘 7장에서 언급하는 바로 그 인자고, 그 다니엘 7장의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 다니엘서의 그 인자라는 사실이 십자가에서 밝혀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선포됩니다. 그래서 "인자가 그 '다스림'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입니다. 자세한 것은 제 <성서는 역사에요, 이야기에요>라는 제 시리즈를 읽어보시면 될텐데, 문제는 당신은 이제 읽을수 없죠.
저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박사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신학적 연구의 성과들을 누리지 못하시고, 본인의 불충분하고 왜곡된 근거에 기대다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신 것이 너무도 안타까워졌습니다.
8) 도덕적 결함들
박사님 생각해보세요. 만약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이용하던 이가 편안하게 죽었습니다. 이렇게 편하게 살다, 편하게 죽은 악인들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죽음 이후에 이러한 선과 악에 대한 평가와 심판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토대 위에서 정의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 어떤 사탕발림이 사람을 정의롭게 할 수 있습니까?
8) 도덕적 결함들
박사님 생각해보세요. 만약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이용하던 이가 편안하게 죽었습니다. 이렇게 편하게 살다, 편하게 죽은 악인들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죽음 이후에 이러한 선과 악에 대한 평가와 심판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토대 위에서 정의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 어떤 사탕발림이 사람을 정의롭게 할 수 있습니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이 점을 잘 알았기에, 그토록 영혼불멸을 아테네의 청소년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쓴 것 아닙니까? 내세를 말하지 않고서는, 현실의 영원한 가치를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상대주의자, 그저 말 장난으로 밥벌어 먹는 소피스트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지옥은 정의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인도적'이라는 판단은 누가하는 것입니까? 온화하고 예를 갖추는 것이 화를 내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입니까? 성서에 보면 지옥은 인간을 위해 준비된 공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끝까지, 이 영원한 정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스스로 지옥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피차 물고 뜯으면 멸망할 것이 자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 사랑하라는 예수의 음성이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로마를 사탄처럼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십니다. 끝까지 복수심으로 자신들을 채우려는 자들 앞에서 예를 갖추어, 온화하게 대하는 것이 인도적인 것입니까?
결국 예수는 아무도 죽이지 않으시고, 죽임당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께서 야기시킨 공포와 두려움은, 당시에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복수심에 점령된 이스라엘은 A.D. 70년에 결국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정작 인도적이었던 예수는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정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박사님은 그를 싫어하시는군요.
9) 감정적 요소
9) 감정적 요소
논쟁과 상관있습니다. 역사이니까요. 더불어 감정과도 상관이 있지요. 최근 제가 예수를 '티메'하는 것과 '덱소마이'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열정적인 것 자체는 좋은지 나쁜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에 열정적인지가 중요하겠지요. 박사님께서 언급하신 종교의 해악들은, 대부분 예수의 가치와 상관없이,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열심낸 경우들입니다. 그저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의 가치를 안다고 착각했던 경우입니다.(그렇다고 기독교가 예수의 이름으로 벌여온 잘못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의 가치와 상관이 없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진실, 정의, 섬김, 죽음을 각오한 고난(예수의 가치들이지요).등에 열정적으로 임한다면, 이것은 막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입니다.
10) 어떻게 교회들이 진보를 지연시켰나?
10) 어떻게 교회들이 진보를 지연시켰나?
법들을 생각해봅시다. 무언가를 법제화시켰을 때, 그것이 인간의 행복에 봉사하기는 커녕, 인간의 행복을 막는 경우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법 그자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유대의 안식일이 그렇습니다. 안식일 법은 좋은거에요. 일주일에 하루를 쉬면서, 창조를 축하하고, 몸은 생기를 회복하여, 다시 일할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 '법'을 쉬는 사람과 쉬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여, 한 쪽 사람들을 경멸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그것은 법의 의미를 오용하는 것이 되겠지요.
또한 어떠한 법이든, 그 법의 취지가 대중에게 설득되어, 자발성을 갖지 않으면, 그 법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과 거리가 멉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가 이렇게 했지요. 많은 것들을 법제화했고, 그 법들이 자율적으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어려움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진정한 진보를 위해서는 예수는 필수불가결입니다. 몸의 부활을 믿고, 죽기까지 섬기는 사람들로 인해 인류는 도덕의 새로운 차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일종의 예언이죠.
11) 두려움, 종교의 기초
포이에르 바하가 이렇게 말했었죠. 종교는 인간 두려움의 투영이라고. 인간에게 두려움이라는 본성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씨에스 루이스는, 인간이 사지의 훼손과, 영적인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원시 시절 영적 존재를 경험한 조상들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부활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종교가 생겼다고 하시지만, 사실 죽음을 두려워한 제자들은 예수님한테 혼났습니다. 풍랑이는 배에서의 사건 아시죠? 부활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뚫어내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만든 미봉책이나, 꾸며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과학을 통해서 극복하시겠다는 이야기는 이젠 흥미롭지도 않습니다. 지금은 2013년인데요, 기술로 인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를 예측하는 영화들이 쏟아집니다. 기술이 인간을 인간답게 했느냐? 그것은 박사님 시절의 꿈이었죠. 그 꿈은 개꿈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귀농하고, 기술과 멀리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담이 티비를 심심치않게 채운다고요.
12)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박사님 결론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지식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하나님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과학과 지식이 만들어낼 세계를 바라며 진보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악의 문제가 진동합니다. 진보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이요. 박사님 사실 적에는 싸이코패스라는 말을 못들어보셨겠죠? 세계대전 이후, 인종학살을 인류가 멈출줄 알았죠? 오히려 한시도 끝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대규모로 죽고, 죽임당합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들을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날마다 느낍니다. 사랑으로 해결하는 것이지요. 이 사랑은 유행가에 나오는 사랑은 아닙니다. 타인을 향한 진실한 마음,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자신을 밀어넣어, 화해를 만드는,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리고 하나님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이 사랑을 주신 분입니다. 아, 이러한 하나님을 애써 부정하고, 책상 앞에서의 지식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 생각하는 우상숭배자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일 거에요. 그 분이 나를 가만 두지 않으실 것 같은 공포는 어서 인간답게 살고 싶은 자아의 절규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은, 이 세계의 결말,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길거에요. 지식이 아닌, 예수를 통해.
러셀 박사님. 당신은 죽었지만, 아직도 당신의 허망한 생각을 따르는 사람들은 천지빼까리에요. 한 사람이라도, 이 글을 읽고, 예수의 부활에 관심을 가질수 있다면 좋겠어요. 진보의 신화를 벗어던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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