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끝난 아침, 예수의 나심에 관하여 생각합니다. 그 분의 나심은 12월 25일이 아닐 뿐더러, 그 날만 생각해야할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 주어진 고대문서가 증언하기를, 그 분의 나심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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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심'이라 번역한 말은 '게네시스'라는 단어입니다. 고대 희랍어를 배울 때, '창조'로 번역하던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제네시스, 자동차 이름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 처음에는 이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그이는 창조에 참여하시는,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날은 정말 '창조'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몸, 그 분이 이 땅에서 현실을 맞닥뜨리셨던 그 육체는 이 날 만들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고유함을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몸의 형태를 갖추고 이 땅에 드러나기 전에도 계셨다면, 그 분은 이전에도 계시고, 몸을 입어도 계시며, 몸이 죽어도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새 몸으로 계심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몸을 입기 전에도 있었고, 지금은 몸으로 있으며, 이 몸이 죽어도 있을 것이고, 새 몸으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첫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라 말한다면, 그 분의 '몸 창조'에 대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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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몸이 창조되기 이전, 그는 무엇이었습니까? 거룩한 숨결이었습니다. 예수의 인격의 출처가 거룩한 숨결이었다면, 우리네 인격의 출처 역시 거룩한 숨결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어떻게 구부러지고, 뒤틀리는지는 여기서 할 말은 아닙니다만, 하여간 모든 사람의 인격이 거룩한 숨결에서부터 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아니고서야 생명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아담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흙으로 구성된 몸, 그의 코에 들어온 하나님의 숨결. 그렇게 사람. 그러니 어느 사람을 만나더라도, '아, 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구나' 이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남편 요셉에게는 가슴이 덜컹한 일이었습니다. 결혼을 약속한 처녀가 갑자기 애를 임신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디카이오스'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전 이 단어를 가지고 저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기 이렇게 나오니까 참으로 반가운 단어입니다. 디카이오스는 약혼녀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디카이오스입니다. 즉 디카이오스는 선악을 가르는 신의 판단입니다. 즉 '사람은 살리되, 악은 소멸하는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로부터 온 사람은 살리되, 그가 거룩한 숨결로 숨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니 디카이오스는 살고 죽는 일입니다.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요셉의 판단을 통해서 마리아는 살 길이 열리고, 그녀를 망신줘서 내 위신을 차리겠다는 거짓된 마음은 죽었습니다. 요셉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남자를 참 잘 만났습니다.
요셉이 디카이오스한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우리 역시 디카이오스한 것을 떠올린다면, 그러한 생각들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했으나, 류영모 선생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하나님이 존재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선한 생각들이, 모두 그 신령한 분에게서 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하면, 우리가 선한 생각을 할 때, 그 분과 우리가 생각으로 연결되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선한 생각이 납니다. 그러니 그 생각 주시는 하나님이 분명히 계십니다." 그러니 선한 생각으로 하나님과 늘 연결되기를 힘씁시다. 내가 신의 판단에 따라, 선악을 분별하여 디카이오스하면, 하나님과 내가 '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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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는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해줍니다. 날개가 달렸는지 안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사'라 번역된 말은 본래 '말 전달해주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이 요셉에게 전달됩니다.
꿈을 통해서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는 흔한 이름입니다. 히브리 말로 읽으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구약의 유명한 인물, 모세의 바톤을 넘겨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간 인물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이름을 따라 자식의 이름을 많이들 짓지 않습니까? 한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따서 짓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좀 예외인거 같기도 합니다. 하여간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흔한 이름의 의미를, 주의 전령이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삐뚤어짐으로부터 구원 하리라.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나온 장소는 광야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유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의 천사는 '광야'라고 안했습니다. '삐뚤어짐'이라 말했습니다. 삐뚤어짐은 제가 '죄'를 풀어서 쓰는 말인데, 사람의 인격이 굽었다는 말입니다. 올곧지 않다는 말입니다. 인격이 곧지 않아, 디카이오스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아니라, 자기 판단에 사로잡혀, 개인과 사회가 온통 어그러진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간 '광야'를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 썼습니다. 이집트와 비교하면서 말입니다. 파라오에게 지배를 받는, 벽돌을 왕창 구워야 하는 이집트로부터 탈출해서, 광야로 나가야 한다는 설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광야는 또다른 이집트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1세대들이 '죄'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었습니다. 그럼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숙제는 무엇입니까?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서, 광야에서의 여정을 종결 짓는 것이 그의 숙제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가나안입니다. 하나님께 忠하여, 惡을 끝장내는 사람들이 얻는 땅이 가나안입니다. 속이 막혀있던(惡) 자들이, 위로 뚤려(忠), 디카이오스하게, 자신들의 본래성인 거룩한 숨결의 호흡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예수'가 합니다. 날 때부터 거룩한 호흡이 뚜렷한 이가 이 일을 합니다.
그리고 주의 천사는 이 일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게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볼 때는 <마태복음>도 과거 기록이지만, 이 기록보다 훨씬 이전의 과거 기록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7장 14절입니다.
이사야 7:10~16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가끔 <신약>의 <구약>인용이 그저 맥락없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허나 주의 천사가 바보입니까? 맥락없이 아무 것이나 가져다가 인용하게? 성경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흐름 속에 몰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일도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흐름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으로 마침되는 그 하나의 흐름을 알고자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안맞다고, 세상에 하나의 흐름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될 말입니다. 거룩한 숨결이 지금도 줄곧 흐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구약 본문을 보는데, 이미 우리가 했던 말들이 다 들어있음을 봅니다. 제 말대로 대강 의미를 짚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징조를 구해. 그런데 깊은데서, 높은데서 구해." 그런데 아하스가 말합니다. "나는 징조 안구할래요. 하나님을 시험하다니요"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깊고 큰 징조를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는 일이! 그 사람이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게 될 때에, 가나안 땅을 얻으리라."
이 구절을 보는데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깊고, 높다면 기준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럼 어딜 기준으로 잡아야 깊고 높은가? 일단 사람 보라고 주신 책이니, 사람이 살고 있는 땅으로 기준을 잡으면, 깊은 것은 지반을 뚫고 내려간 지층, 멘틀, 외핵, 내핵. 이런 것일까요? 저는 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더 깊게 내려가고 내려가면 지구를 뚫겠지요. 그래서 우주 저편까지 이를 것입니다. 높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평화라는데, 그럼 그 지극히 높은 곳은 우주가 아니겠습니까? 우주(Heaven), 그 속의 지구(The earth). 하늘과 땅. 즉 깊고 높은데서 징조를 구하란 말은, '우주의 차원, 하늘의 차원에 이르도록 징조를 구하라'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왜 하게 되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이 났으니 말합니다. 그 하늘의 차원에 이르는 징조란 다름 아닌, 처녀로부터 아들이 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친다면, 해외토픽감 밖에 더 됩니까? 세상에는 신기한 사람이 필요한게 아니라, 구원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구원입니까?
악을 버리며 선을 선택할 줄 아는 일로 이 아이의 전인생이 뚫려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기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축하할 일이라면, 그가 이렇게 사셨기 때문에 기쁜 것이요, 우리도 그를 따라서 이렇게 살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한 생각으로 뚫려, 선악사이에서 디카이오스하게 판단하며, 그렇게 사람들을 건져내고, 악을 소멸하는 삶과 세상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상관없는 구원은 인간다움과 거리가 멉니다. 별로입니다.
이렇게 사는 예수는 여호수아입니다. 가나안을 얻습니다. 그 여호수아를 따라 함께 싸운 이들도 가나안을 얻습니다. 그럼 그 가나안은 무엇입니까? 지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서 진정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늘의 한 귀퉁이 차지하는 일로 알고 있으니 큰 일입니다. 하늘이든 땅이든 한 귀퉁이 살 곳을 얻는게 아닙니다. 온통을 얻는 일입니다. 전체를 얻는 일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와 함께 생각하고, 그와 함께 판단하며, 그와 함께 건져내고, 그와 함께 다스려나갑니다. 나의 삶과 세상 일을 그와 함께 봅(觀)니다.
예수는 "너희에게 허락된 징조는 요나의 징조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이 징조는 곧 부활이었습니다. 3일간 물고기 속에 들어갔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온 요나처럼, 죽었으나 3일 뒤에 살아나는 한 사람이 진정한 징조라는 말이었습니다. 부활 사건만 징조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의 출생은 하늘의 차원의 징조요, 그의 부활은 유일한 징조라니, 사실 징조는 어떠한 사건들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 곧 징조입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또다른 사건이 아니라, 그의 인격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했는데,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요, '그의 의'는 예수의 디카이오스입니다. 예수의 인격입니다. 그가 이 땅에 몸으로 출생하기 전부터 있었던, 사실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있던, 진정한 인간됨.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아들들, 우주의 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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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천사가 임마누엘이라 인용하고, 그 말을 번역해줍니다. 주의 천사는 번역 일도 겸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이 말 속에서 오늘 주욱 써놓은 소리들을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은 선한 것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선한 것을 생각하니 그 선함의 출처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으로 판단하니 나는 디카이오스 합니다. 내가 그렇게 판단하니까, 나를 통해 사람은 건져지고, 악은 소멸됩니다. 이것이 나의 본래 모습입니다. 나는 살과 피로부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 거룩한 숨결에서부터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구가 있기 전에도 흐르고 있던 한 흐름, 곧 성령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왔고, 거기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지구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지구를 왕과 함께 다스릴, 왕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다스리기 위해 우리의 인격을 회복시키십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이 이 말이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생각이 납니다. 선한 생각이 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곧 나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성령으로부터 왔음을 깨달았으니,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나신 그이의 출생과 같지 않습니까? 이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이 줄곧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나의 생각과 삶 속에서 분명합니다. 뚜렷합니다.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