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리'가 어떠한 우리인지 잘 보라.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신을 위해 죽는 자도 없는 그러한 우리다. 그렇다고 '나'가 없느냐? 그렇지 않다. 주를 향해 있으므로 그 빛 아래 모든 '나'들이 '있다'. 전체 안에서 개체가 묵살된 것도 아니요, 개체만을 주장하다 전체를 잃어버림도 아니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인류가 겪는 문제의 해결에 대한 담론이 대개 양 극단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한쪽은 나를 지우라 말하고, 다른 한쪽은 나만을 추구하라 말한다.
공동체는 차륜과도 같다. 그 속에서는 나도 있고, 전체도 있다. 왜냐하면 '중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이 무엇이냐, 주님이시다. 주님은 곧 차륜의 중심이다. 어떠한 주님이시냐? 죽고 사셔서, 산 사람에게도 죽은 사람에게도 산 소망이 되시는 주님이시다. 그 중심을 향해 있는 사람들은 곧 차륜의 외연이다. 중심을 지향하는 몸들이다. 그들은 중심을 향하기 때문에 개체화되어 파편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차륜이라는 전체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분명히 '있다'. 없지 않고, 있다! 그 중심과 몸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퀴살이다. 그 가지런히 놓인 바퀴살은 곧 가지런한 숨결이다. 곧 소통의 영이신 성령이시다. 그렇게 주께 소망을 둔 사람과 소통하게 하는 가지런한 성령과 죽고 사신 중심, 주님께서 함께 바퀴를 이루어 굴러가는 것이 공동체다. 이러한 공동체라면 그 속에서의 삶은 어떠할까? 당신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겪는 모든 소외와 아픔과 불의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결해나가는 공동 생활말이다. 기대되지 않는가?
더 충격적인 것은 "이를 위하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목적이 드러났다.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즉 모든 사람들의 중심이 되기 위함이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만한 삶의 소망이 되시기 위함이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으니 그 분은 정말로 온전한 소망이시다. 생명을 소멸하는 반창조의 세력을 꺾으시니 그 분은 참 왕이요, 그 분의 다스림을 받는 바퀴들은 그 분을 중심으로 생명을 추구하는 회전을 이어나간다. 그 중심보다 더 큰 반경으로.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다스리다' 라는 말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이 말이 교회 밖에서는 '대단히' 부정적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어제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그동안 다스림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온통 짜먹는 일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 주체를 따라 술어도 오염된게다. 그러나 여기서의 다스림은 부패한 관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다스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망이 되기 위해 함께 고난 받고, 자진하여 죽음에 넘기워지며, 다시 살아나신 분의 다스림이다. 따라서 그 분의 다스림이 폭력과 속임일리 없다. 개역성경에서는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의 주가 되려 함이다'라고 되어 있다. '주'. 곧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 분의 다스림은 가장 비천한 곳까지 체휼하심이요, 삶이 근원적인 문제를 신원하시는 다스림이다.
악한 세상 속에서 점점 어휘들은 오염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오염된 어휘들을 피해 계속 새 단어를 찾고 만들어야 하는가? 그 단어를 닦아서 본 의미를 드러내고 삶으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 오염을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라 생각한다. 다스림도 그러하다. 주께서 다스리신다. 그 다스림은 섬김과 사랑, 정의와 치유. 공동체가 그의 다스림을 실천에 옮길 때, 그리고 그러한 실천이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것이라 선언할 수 있을 때, 의미는 제대로 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과 숨이 하나될 때이다. 그래서 말숨.
[2]
그런데 당신은 어찌하여 하나님의 가족들을 판단합니까?
당신은 어찌하여 하나님의 가족들을 없이 여깁니까?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주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살았으니,
모든 무릎이 나에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고백하리라."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들이 자신에 관한 말을 하나님께 아뢰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공동체가 참으로 옳을진대,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가? 여러 다층적인 문제가 있겠지만, 바울이 자꾸만 언급하는 문제는 바로 '판단'이다. 바울은 단칼에 이 판단의 문제를 내려친다. 당신들이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는 문제의 근원을 물으라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주를 위하여 살고 죽는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며, 당신의 소유는 더더욱 아니다. 주께 속한 사람이다. 따라서 당신의 판단에서 벗어나더라도, 당신은 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 없이 여길 수 없다.
여기서 '없이 여기다'라 풀어놓은 단어는 '엑수데네오'로. '엑스'는 'from'이고, '우덴'은 'nothing'이다. 즉 우리 말로 하면 '없이 여기는 것'이다. 이 '없이 여긴다'에서 '업신 여기다'가 왔다. 이렇듯 전혀 다른 지역의 언어가 맞아들어가는 일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사람을 없이 여기지 말아라. 사람은 없는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났다. 사람을 없이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없이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ex nihilo 라는 중세의 교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는 정말 없음에서 왔는가? 세상 모든 것이 없다가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이것이 창조에 대한 바른 이해일까? 어쩌면 우리는 '우덴(nothing)'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주의 '생각'에서부터 온 생명들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근원은 '없음'이 아니라, '그의 생각'이다. 마치 사람이 생각에 있던 것을 글과 그림으로, 혹은 조형물로 구현하듯이, 창조주는 자신의 생각을 오늘 시간과 공간의 지평 안에 구현하여 숨을 불어넣어주셨다. 그러니, 우리의 근원을 없음이라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 '심판대'라는 말의 기본 의미는 '한 발이 덮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여기에서 '강단', '심판대'라는 의미들이 파생되었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세상에 속한 그 공간만큼의 자리에서,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그 앞에서 사람을 없이 여겼던 사람들이 어떠한 일을 겪게 될지 생각해보라. 당신은 그 분 앞에서 떳떳한지 돌아보라. 사람을 없이 생각한 사람은, 하나님도 없이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사야서 49장 18절을 인용한다. 이 구절은 바울이 좋아하는 구절인가보다. 빌립보서 2장 10절에도 같은 구절을 인용했다. 예수께서 사셨다. 죽음은 그의 발 아래 깔리는 물이다. 그는 물 위를 걸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그 예수께 모든 심판의 전권을 넘겨주셨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곧 그 예수 앞에 서는 것이다.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려지는 것은, 우리가 그 분 앞에 죄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혀가 자백하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자신의 삶이 없어지거나, 망각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은 기억하고 계신다. 사람을 없이 여겼던 우리네 삶이 그 분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명령이다. 우리를 심판대 앞으로 부르시는 그 분의 명령이다.
'고백하리라'라고 풀어놓은 말은, '엑소모로게오'라는 동사인데, 파자하면 '엑스(from)+호모(same)+로고스(말)' 이렇게 된다. '고백하다, 자백하다, 인정하다. 단언하다. 찬양한다'등 여러 의미가 있다. 나는 뒤에 구절을 염두하여, 각자 동일하게 자신의 삶을 주께 아뢰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고백하다'는 번역을 선택했다. 뒤에 "자신에 관한 말을 하나님께 아뢰게 될 것입니다"에서의 '말'도 '로고스'다. '하나님께 아뢰야할 자신에 관한 말'이라. 나는 어떤 말을 드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