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건히 서지 못한'이라 풀어놓은 단어는 '아.스떼네오'. '아'는 부정접두어고, '스떼네오'는 '히스테미'로부터 유래한 '굳건히 서다'의 의미. 따라서 '아.스떼네오'는 '굳걷히 서지 못하다'가 된다. 개역성경에는 '연약한'이라고 풀어놓았는데, 하여간 '믿음이 단단히 서있지 못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하나'를 믿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단어가 [1] 본문의 처음과 끝에 등장한다.
나는 예전이 믿음이 굳건히 서지 못한 사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내치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심히도 찔린다. "그의 생각하는 바를 철저하게 하나하나 판단하지 마십시오" '철저하게 하나하나 판단하다'는 말은 '디아.크리시스'라는 단어인데, '디아'는 '관통하여, 철저하게'의 의미고, '크리시스'는 '판단하다'는 의미이다. 분명한 것은, 믿음이 무력한 사람의 생각을 낯낯히 파헤치고 그에게 '네가 틀렸다'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 결코 그를 세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방법이라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간음한 여자가 붙잡혀 왔을 때, 왜 그는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글씨를 쓰셨는가? 오늘날까지도 그가 무엇을 쓰셨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분 앞에서 죄인이 용서함을 얻어 다시 일어섰다는 사실만을 우리가 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을 생각해보자. 모든 것을 믿음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굳건히 선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 믿음이 삶의 모든 체계안에 적용되지 않아 이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판단하다'는 의미의 같은 동사가 여러번 등장하는데, 이런 사람이든, 저런 사람이든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판단'이다. 이 '판단'이라는 말은 '심판'이라 번역하는 말과 같은 단어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 판단할 수 있고, 또한 이 최초 인류로부터 시작된 잘못된 판단이 온인류에게 전염되어 온통 허상의 짐짝을 짊어지게 했기 때문에. 이 판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2]
먹는 이는 먹지 않는 이를 없이 하지 말고,
먹지 않는 이는 먹는 이를 (문제 있다) 판단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남의 종이 제 주인에게 굳건히 섰는지, 아니면 넘어지는지를
판단하는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그가 일어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채식주의자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당시 채식주의자들은 아마도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토라가 말하고 있는 음식규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 음식규정에 합당한 제대로 된 고기가 아니라면 먹지 않았다. 그런데 그 규정이 까다로워 그러한 고기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코셔'율법에 따라 도축된 고기만을 먹는다) 특히 고린도전서 8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어서, 이럴바에야 고기를 먹지 않고 풀만 먹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도 이 문제와 맞닥뜨리지 않았는가?
오늘날 교회에서 채식이냐 아니냐하는 문제가 당면과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가 그다지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은 음식이 아니다. 하나됨이다. "어떠한 생활 원칙 때문에 교회가 둘로 쪼개질 수 있겠느냐"의 문제이다. 대답은 당연히 "그럴 수 없음"이다.
"서로를 문제있다 판단하지 말아라." 바울은 말한다. 바울의 논리는 이러하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은 내 종이 아니라 남의 종, 곧 하나님의 종이다. 남의 종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할 자격이 너에게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 아니냐? 그리고 그 전에 너 역시 하나님의 종이 아니냐! 종이 종을 판단하는 건 자신도 판단받는 종임을 모르기 때문 아니냐!
그리고 등장하는 제3의 가능성. 당신이 넘어졌다 판단하고 있는 그 자가 일어설 것이다. 당신이 문제 있고, 실패했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자가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 3의 가능성 앞에서 우리가 타인에 대해 못박아두었던 잘못된 판단들이 무너진다.
어떤 문제 있는 사람이든지, 하나님이 그를 다시 일으키실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의 판단을 넘어 '하나'되게 한다. 바울이 앞에서 말했던 "모든 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일 것이다. 모든 것을 어찌 소화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이 그 사람 마저도 바꾸실 수 있다는 바로 그 소화액이 내 속에서 모든 분열된 판단들을 녹여 버리는 것이다. 어떠한 절망적인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굳게 믿는 것이 서로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뚫고 나가는 한 길인 것이다.
[3]
어떤 이는 어떤 날이 다른 날 위에 있다고 판단하고,
어떤 이는 모든 날이 같다고 판단합니다.
각각 제 마음에 가득채워 지켜 나가세요.
날을 생각하는 이도 주를 향해 생각하고,
먹는 이도 주를 향해 먹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고맙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는 이도 주를 향해 먹지 않으니,
하나님께 고맙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먹는 것외에 또다른 예를 든다. 바로 '날'에 대한 문제다. 음식 규정만큼이나, 절기 규정은 고대 문화 속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래서 1년 중 여타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몇몇 날들이 있었고, 이러한 인식의 저변 위에서 날들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우리는 알 수 있다. 특별한 날이 어디있는가? 모든 날이 중요하다. '오늘'이,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인간의 수평적 시간으로 가늠할 수 없는 위로부터의 새로운 시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졌다. 곧 카이로스다. 절대와 상대가 만나는 엊걸린 시간이다. 가온을 찍어야 할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바울 자신도 말하기를,
갈라디아서 4:10,11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인이 이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느냐보다 '하나'되는 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더 중요한 날이 있다고 생각하던지, 모든 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든지 간에, 어떤 생각이든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각각 제 마음에 가득채워 지켜나가세요" 그래서 어느 날이 되었든지, 중요하다 생각하는 날을 마음에 가득채워 그날을 올바로 살도록 실천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이란, 서로에 대한 판단보다, 서로 안에서 신적 희망을 발견하고, 사람이 사람 답게 서로를 세워주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다. 곧 그 날 하루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날이 된다. 그리고 이 한 날이 모든 날이 된다. 믿음이 무력한 사람이 모든 날을 믿음으로 소화하는 사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됨은 모든 사람들이 로봇처럼 일과가 같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됨은 곧 돌아가는 팽이의 중심이다. 지향점이 같아지는 것이다. 날을 어찌 생각하든지, 특정 음식을 먹든지, 혹은 먹지 않든지, 지향점이 같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시작하지만 바라보는 곳은 같다. 그 지향점을 바울이 dative를 줄곧 사용하면서 말하고 있다. "주님을 향하여" 그 분이 모든 공동체적 삶의 중심이시다. 서로 다른 면들을 다 품으시고, 그 품 안에서 잘못된 것을 끌어안아 고치시며, 공동체를 하나되도록 이끌어가시는 한 분이시다. 먹는 것도 주를 향해, 먹지 않는 것도 주를 향해, 내 고집, 내 생각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되시는 그 분께 날마다 가까지. 모든 날에 이르도록!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산다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께 고맙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줄 요약이다.
1) 서로 판단하여 분열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며,
2) 서로 생각이 아닌 실천의 접점에서 만나며,
3) 온전한 인간이신 그 분을 지향점으로 점점 올바름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본질젹으로 해결한 인간다운 삶, 공동체적인 삶이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