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교회 오후예배
요한계시록 II
- 천국과 새 하늘과 새 땅
0.
저는 올 한해 동안, 창성 공동체에 성경 전체 이야기를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 하나의 이야기, 성경 전체에 강같이 흐르는 거대한 서사시. 그것은 오늘 우리의 삶을 바꾸는 이야기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확인했던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성경을 총 6막으로 봤었는데요, 그 기억들을 떠올려 보십시다.
1. 창조 이야기
2. 타락 이야기
3. 이스라엘 이야기
4. 예수 이야기
5. 교회 이야기
6. 새 창조
청소년들은 1번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3번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장년분들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은 거꾸로 갑니다. 즉, 우리는 새창조에서 창조로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한 지점, 우주가 뒤집힌 위대한 반전의 한 순간에서, 역사속에서 단 한번 일어났었던, 그 위대한 제사의 현장에서, 청소년들과 장년들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여러분과 제가 보려고 하는 말씀은, 계시록 마지막 장이고, 여섯 번째 막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기억을 1월 15일로 돌리면, 저와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인했습니다.
첫째, 계시록은 특정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닌, 하나님의 모든 종들을 위한 책이다.
둘째, 계시록은 하나님과 요한의 받아쓰기가 아니라, 요한의 문화와 지식와 문체와 개성들을 포함한 유기적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셋째, 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일들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이 십자가와 부활로 시작된 종말의 때이며, 우리는 지금 종말의 때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즉,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예수를 믿어 육체의 부활을 믿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삶을 위해 유기적 영감으로 주어진 책이 계시록이고, 우리는 지금 막 그 계시록의 마지막 내용의 펼치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마치 연어처럼 말입니다.
1. 천국에 간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다.
요한계시록 21:1,2 새번역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흔히들 "예수 왜 믿으세요?" 라고 물으면, 대부분, "천국 가려고요" 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일반입니다. 만약 죽은 자가 가는 곳을 천국이라 부른다면, 계시록의 마지막 장은, 그러한 천국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천국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줍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단어들은 주의 깊은 사용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각 단어들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은혜' 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어떤 일을 할 때, 원리 원칙을 지키지 않고, 대강대강 넘어가려고 하면서, "은혜로 해, 은혜로."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은혜라는 말을 바르게 쓴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를 가리우고 있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변하더라도, 우리는 그 언어가 가지고 있던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언어들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천국은 하나님 나라
천국. 불신자들은 '김밥'이라는 글자 뒤에 붙는 상호명이라 생각할테지만, '천국'은 성경 안에서도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천국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우리가 이토록 자주 쓰는 천국이라는 말이, 실제로는 마태복음 한 권 안에서만 국한되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왜일까요? 마태복음의 저자는 마태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인 마태가 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은 독특한 세계관입니다. 세상이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는 '우주'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주를 표현할 때는 하늘위의 하늘, 삼층하늘처럼, '하늘'이라는 단어를 중첩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하늘은 곧 신성함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표현할 때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정말 하나님께서 하늘 성층권 어디엔가 사실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꼐서는 하늘이 아니라, 모든 곳에 다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23:24
사람이 제아무리 은밀한 곳에 숨는다고 하여도, 그는 내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하늘과 땅 어디에나 있는 줄을 모르느냐?"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늘은 곧 신성함의 표현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하늘 나라'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죽어서 가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하나님의 나라'. 그래서 유대인에게 쓰인 마태복음과 이방인에게 쓰인 마가복음이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도 용어를 다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가복음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나라?
그리고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라는 단어 입니다. 이 '나라'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가 아닙니다. '왕권(kingdom)'입니다. 즉, '다스림' 입니다. 권위 있는 누군가의 다스림을 가리켜 곧 '나라'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다스림은 가거나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갈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다스림은 아래에서 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1,22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하나님 나라가 오는 나라라고요? 좋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야.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도 없는거야.”
그럼 도대체 뭐에요? 하늘에 있지도 않고, 갈 수도 없고, 오긴 오는데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의 답변이 21절에 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어.”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못합니다. 따라서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아멘 이십니까? 여기서 너희 안에서, 사람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나와 너의 관계, 여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옆에 있는 성도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 성도가 김태희 뺨치게 이뻐서가 아니라, 그 형제 자매와 함께 만들어갈, 관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간다'는 말은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바람직한 이유가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다'는 표현이고, 이것은 죽어서만이 가능한 것일 수 없습니다. 지금도 가능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으로 들어가는 십자가의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은, 지금입니다. 초대에 응하는 지금부터 나의 삶에, 정확히는 나와 관련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빨리, 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동참해야 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완전한 다스리심이 아주 아주,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2. 새하늘과 새 땅 그리고 교회
요한계시록 21:1,2, 새번역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끔, 천국을 갔다 왔다고 하면서, 계시록 21,22장에 있는 내용들을 간증처럼 말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거 그냥 꿈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들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 21장의 상징들은, 죽은 자가 가는 곳에 대한 그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의 그림입니다. 계시록 21, 22장은 마지막 날, 완전히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즉, 완전한 세상이 이 세계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
이쯤에서, 우리가 말하는 '영생'이라는 단어 역시 살피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생'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는 삶을 그저 고무줄 늘리듯 쭈욱 늘려놓은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즉, 영원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오게 될 다음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즉, 지금 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은, 다음 세대, 완전한 세상이 오는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 땅에 완전히 임하는 그 날의 그림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안에서의 영생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 땅에 완전히 임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영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세상. 이 땅으로 오고 있는 완전한 세상의 가운데 새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거룩한 도성을 유업으로 차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영생을 약속받은 사람들 뿐입니다.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이 거룩한 도성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입니다. 둘째 사망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라는 말에서 다른 것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교회, 즉,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교회를 두 개로 나누어 대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늘에 있는 교회와, 땅에 있는 교회를 나누고 있습니다. 계시록 12장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룰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짧게 이야기 하자면, 하늘에 있는 교회는 영광의 교회요, 지상에 있는 교회는 핍박과 시련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계시록 21장이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옵니다. 우리가 있는 이 지구와, 하나님의 완전한 다스리심이 만납니다. 그리고 지상 교회 역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완전히 맞이합니다. 핍박과 시련은 끝나고, 하늘과 땅이 영광으로 충만해집니다. 새 예루살렘은 지상의 교회에 완전히 임하는 천상의 교회입니다. 즉, 하늘과 땅의 결합.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하나님의 아들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3, 새번역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께서 거하실 곳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이 계시록 21장 3절은 너무도 중요한 구절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과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이후, 모든 민족중에 오직 한 민족, 그리고 그 민족 중에서도 신실한 남은 자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지, 인류의 대다수는 어둠속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 끔찍했던 타락이 아름다운 구속으로 완전히 뒤집어졌음을 선언하는 것이 계시록 21장 3절의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집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실 곳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이 사람들을 무엇이라 부른다고 했습니까? 교회라 부릅니다. 교회라 부릅니다. 교회는 누구입니까? 오늘날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반역의 열매를 베어물었던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과 연결된 모든 관계가 왜곡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완전한 역전이 계시록 21장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결말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꼐서 이 이 땅에 완전히 임하실 것이고, 그 임하심은 예수를 증거하는 사역을 부여받은 사람들, 교회를 통해 이뤄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견디어 내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날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충만한 그 날이고, 그 날에 새 예루살렘이 우리의 유업이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추구해야 하고, 이것을 위해 우리는 타협없이 견뎌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다스림과 그의 옳음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전하시리라. "
3. 새 창조와 부활
요한계시록 21:4,5, 새번역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그리고 그 날에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도 없고, 죽음과 관계 때문에 생기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과 세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입니다. 왜 입니까? 이것은 새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 그 분께서 죄 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썪을 것을 영원한 것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아멘이십니까?
지금 제가 이야기를 계속 전개해오면서, 한 가지 경계했던 사상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말할 차례입니다. 그것은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천국가기 위해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에 들여 보내시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낙원에 갑니다. 육체는요? 땅에서 썩습니다. 그럼 이것이 끝입니까? 이것이 정녕,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가 말하는 끝입니까? 우리가 바라봐야 궁극적인 목적이 죽어서 가는 천국에 있습니까?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끝이, 그저 나의 영혼의 안식처로서의 천국이라면, 그것은 부활과 무관한 소망이 될 것입니다.
4절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영생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마침내 그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묘하게 모세의 그림이 오버랩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 뒤에 숨기시고, 등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온유함이 승한 모세 조차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그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왜요? 우리가 죽음과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홀연히 부활하였고, 우리의 몸은 하나님과 온전히 관계할 수 있는 새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5절을 봅시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무엇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입니다. 여기입니다. 여러번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여기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부활한 자들이 걷는 곳은 구름 위가 아니라, 여기입니다. 영혼이 날아다니면서 살아다니는 삶이 아니라 이 땅을 육체로 걷는, 하늘의 도성이 아니라 이 땅으로 돌입하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저와 여러분과 이 교회와, 이 땅은 마침내 새롭게 될 것입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소망하십니까? 우리의 그 어떠한 것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쁜 소식보다 귀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이것을 소망하고 기다립니다. 우리가 질문하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한 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것이, 머지않아 이 땅으로 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어마어마한 그림이 부활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나 하나 구원받아 영혼이 하나님께 가는 그런 식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몸을 입은 자들이 걷게 되는 완전한 세상. 인간과 세상의 새롭게 됨. 이것은 말할 때 마다 설레는 것입니다. 가슴 벅차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완전히 이룰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다시 이 땅에 오시듯, 우리는 죽거나, 아니면 살아서 예수를 보게되겠지만, 먼저 죽은 사람도 죽음과 상관 없고, 살아서 주를 본 사람은 더더욱 죽음과 상관없습니다. 새로운 왕의 통치로 충만한 땅. 하늘과 땅이 하나 된 그 곳을 함께 보게 될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 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부활의 육체를 입고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4. 새 하늘 새 땅의 삶은 이미 시작되었다
옆 사람에게 이렇게 인사해봅시다. "죽어서도 만납니다. 잘하세요." 오늘 여러분과 관계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죽어서도 만날 사람들입니다. 징그러우신가요? 감사하신가요? 오늘 다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아니 이미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듯, 여러분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멘이십니까? 같이 삽시다.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추구하는 삶을 삽시다. 그럼 그 곳으로 하나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전해 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6, 새번역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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