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중고등부 마흔 아홉번째 설교


0. 지난 이야기


  출애굽기는 그냥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의 그림들은 거짓말처럼 신약의 그림들과 연결이 됩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붓으로 삼아 쓰신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이런 얘기를 했었죠. God이 있고,gods가 있다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믿어버리면 그것은 신이 되버립니다. 공부가 하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공부는 여러분의 신이 되버린다는 것입니다. 게임이 하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삶의 모든 만족을 얻으려 한다면, 게임은 이미 당신의 신이 되버린 것입니다. 높은 연봉이 하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높은 연봉을 따라 당신의 삶이 이동하고 있다면, 당신은 다른 신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들은 God이 아니라 gods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고, 후자는 이방신들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신들을 만들어내지만, 그 '신들'은 신이 아닙니다. 참 신은  신'들'이라 불리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무소부재하십니다. 그 분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따라가고 있는 것은 신입니까? 신들입니까? 참 신이신 거룩의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잡신들입니까?


  잡신들을 따라 살았던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피조물을 지으신 그 분을 섬겨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믿던 잡신들을 다 뒤로 하고, 그 사람은 십자가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것만이 우리를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온전한 문임을 모든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아닙니까? 이 복음만이 우리를 사탄의 하수인 역할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로만 생각으로만 그렇고, 현실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사탄의 땅에서 떠나게 할 수  있습니다. 벽돌과 지푸라기만 바라보던 나의 인생이 저 지평선 위에 있는 가나안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추구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께 이르는 여행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문을 지나서 말입니다. 복음은 곧 하나님께 이르는 길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에 예수께서 서 계십니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살점이 흩어진 그 예수가 그 복음의 시작에 계십니다.


  그렇게 그 분의 죽으심이 나의 생명되었음을 믿는 자는 '세례'를 받습니다. 물과 성령을 지나므로  나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스데반은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광야교회'라 말했습니다.


  그러한 광야 교회 사람들의 식량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나입니다. 만나는 땅을 일구고 노동을 통해 얻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때에 따라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는 광야를 걷는 자의 참된 양식이었습니다. 그 양식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허기를 모르게 했습니다. 매일매일 만나를 먹으며 이스라엘은 힘을 얻어 그렇게 걸어갔습니다.

  광야같은 세상속에서 공동체를 이뤄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도 만나를 먹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만나를 주지 않으셨다고요? 아니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아들을 찢으사, 그 분의 살과 피를 우리로 하여금 먹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우리의 만나이십니다. 그 분을 먹어야만, 그 분을 마셔야만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까지 갈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광야를 걷는 와중에, 허기 지고 쓰러질 것 같고 영적 빈혈 증세가 찾아온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배고파서 그런겁니다. 예수를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12장 3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쇼. 그러면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십쇼. 그렇게 세례를 받으십쇼. 그리고 예수를 생각하십쇼. 예수는 누구이신가? 그 분을 생각하는 것, 그 분을 깊게 고민하는 것은 우리의 양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하는 참된 양식인 것입니다.


1. How should we then live?


  이제 좀 더 이야기를 진행해봅시다. 만나를 먹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광야 길을 걷던 이스라엘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 출애굽기 18장 13,14,15, 16절을 봅시다.


출애굽기 18:13~16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모세가 그의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당연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의 이방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도 이집트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있던 자리를 떠나, 자신들이 추구하던 것을 버리고 나니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속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모세를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생각해봅시다. 학자들이 추산하기를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최하 200만입니다. 그런데 그 200만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모세 혼자서 재판하고 있는 상황. 이것은 거의 절망에 가깝습니다. 아침만되면, 모세앞에 줄이 보이지도 않을만큼 줄이 늘어섭니다. 그리고 모세는 한 사람씩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각각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을 접한 사람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설교하고, 그 설교를 듣고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되물었던 말은 다름 아닌, 이런 말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예수께서 날 위해 죽으셨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우주의 구원자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었으니,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박사의 책 제목에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첫번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대표자 선정

  모세의 장인 어른인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와 조언합니다. 그것은 10명에 한 명씩, 50명에 한 명씩, 그리고 100명에 한 명씩 대표자들을 뽑아서 그들이 백성들을 재판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8:21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모세의 장인이 한 조언은 의미없는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과정이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출애굽기 19장에 와서 시내산에 당도합니다. 이제 그 산에서 법없는 자들에게 법이 수여됩니다. 그 법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2. 우리에게는 법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출애굽기 19장을 만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당도합니다. 그리고 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습니다. 우리가 확인했듯이, 이 율법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맥락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기준들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20장 부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았던 말씀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십계명을 받았고, 그 다음 제단에 관한 법, 종에 관한 한 법, 폭력에 관한 법, 소에 관한 법, 배상에 관산 법, 도덕에 관한 법, 정의와 복지에 관한 법,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 절기에 관한 법, 그리고 성막을 짓는 방법들을 받습니다.


  주중에 누군가 저에게 질문하기를, "그러한 율법들도 말씀의 일부인데, 이것들을 읽고 어떻게 삶에 적용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졌습니다. 당연합니다. 살아내야죠. 이 말씀들에도 오늘 우리를 향한 의미가 있죠. 그러나 오늘 이 모든 부분들을 다룰 수 없고, 오늘은 십계명만을 가지고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십계명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법이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처음 주어진 법이기도 하거니와, 이 십계명은 율법을 대표하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처음 계명과 네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계명부터 마지막 열번째 계명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관계입니다. 구원은 관계적이니까요.

  그리고 이 십계명의 말씀은 곧 다음의 신약의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마가복음 12:28~31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비단 마가복음 뿐만 아닙니다. 로마서에도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렇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법의 정체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광야를 살아가는 나그네들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법 입니다.



3. 법 지킴의 이유-I


  그리고 우리가 그 법을 지켜야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0:1~2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지키는 이유가, 그것이 법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복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은혜 때문입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은혜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전에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gratia 은혜의 의미는 '거저주심'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무엇을 거저주셨습니까? 출애굽기 20장 1,2절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노예 상태에 있었던 우리를 거저 구출해주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져 주시는 은혜의 구출작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법 없는 자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법지킴의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법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알파벳을 배울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I'라 부르겠습니다. 이것은 Irresistible grace 즉,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법지킴의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 출애굽의 사건에 대한 감사가 법지킴의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를 탈출 시키신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가 그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지킵니다. 어떻게요? 강제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압제가 아닌 자유로. 그렇게 지킵니다. 왜냐하면 그 구속하심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아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4, 그 법은 개인에게 주어졌는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봅시다. 이 '법'.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지키는 이 하나님의 법은 누구에게 전해진 것입니까? 개인입니까? 공동체입니까? 공동체 입니다. 성경의 그 어떤 책도 개인에게 주어진 책은 없습니다. 성경은 공동체에게 주신 책입니다.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게, 심지어 계시록 마저도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주신 책이지 개인에게 주신 책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배운 '법'도 개인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Chulchless born-againism에 중독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없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그리고 선생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목적은 개인의 잘 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공동체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공동체가 은혜를 알아서 모두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애쓸 때, 그 공동체는 갱신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각 개인도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 나중에 자기 자신도 변화되었음을 자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잠을 자야지 자야지 하는 사람이 오히려 깊이 잠들 수 없듯이, 개인의 변화를 바라고 바라는 사람은 오히려 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잘난 개인이 없어서 공동체가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지금. 곧 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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