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중요한 대목에 들어섰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논쟁적인 본문입니다. 천천히 미로를 헤쳐 나가봅시다.

 

1. 무엇이 문제인가?

 

갈라디아서 2:11~14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바울은 앞에서 자신의 사도됨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신적인 단절의 결과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에 대해서 이미 사도였던 자들도 동의했고, 서로 협력하여 사역지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도 아닐 뿐더러, 베드로의 권위를 빌려 남들을 설득할 이유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신적인 단절을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갖게된 자로서, 베드로가 복음의 핵심을 왜곡하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를 바로 잡았던 바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베드로를 쪽팔리게 하려고 과거사를 들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1) 갈라디아 교회들이 가진 거짓 권위들(유대인 사도들에 대한 권위, 유대인의 생활방식에 대한 권위)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2) 갈라디아 교회들이 오해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재정립 합니다.

 

  이 "안디옥 사건"의 경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한 상에서 먹었다(베드로도 그러했다).

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오자 베드로는 "할례자들이 두려워" 태도를 바꿨다.

3) 나머지 유대인들도 베드로의 외식에 동참했다(심지어 바나바도 그러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유대인들의 식사 예절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복음, 곧 메시아 예수의 왕되심의 소식과 그 소식으로 인해 출범한 그 공동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화목제사 이후 제물을 함께 먹는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 "이스라엘"을 구성합니다. 마찬가지로 메시아 예수의 죽음 이후 그의 살과 피를 먹는 식사는 하나의 공동체, "온 이스라엘"을 구성합니다. 아래의 구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24: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사도행전 10:40,41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메시아 예수 이전에는 죄 사함의 제사가 이방인과의 경계를 유지하는 이스라엘 구성원들에게 효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제사에 참여한 이들이 하나의 식탁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즉 그이의 죽음으로 죄 사함의 효력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게 되었고, 이로써 메시아의 사람이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하나의 식탁을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이 "누구와 식탁을 공유하는가?"의 물음은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와 같은 물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에 걸맞지 않은 답변을 내놓은 것이고요.

 

  메시아의 십자가 사건으로 경계가 옮겨졌습니다. 이전에는 유대인의 생활방식과 이방인의 생활방식에 놓여있던 경계가, 이제 모든 인간의 생활방식과 복음 사이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식탁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메시아께서 옮겨놓으신 경계를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은 격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동료 유대인들과 심지어 바나바도 다시 복음 이전의 삶으로 회귀하게 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베드로의 모습이 "위선(외식)"이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질책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a)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b)"

 

하였노라.

 

  이 두 문장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a)와 (b)로 나누어보았습니다. (a)인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함"은 베드로가 복음 때문에 더 이상 유대인들의 경계표지들을 지키지 않으며 유대인으로서는 이전에 누릴 수 없는 자유를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의 자유의 유익을 누리는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는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b)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유대인답게 살지 않게 되었으면서, 이방인에게는 유대인답게 살아야 함을 은연 중에 내비치고 있기에, 자신은 편하면서 남에게 짐을 지우는 격이 되었습니다. 위선입니다.

 

2. 우리는 누구?

 

  바울은 이제 주어를 "우리"로 바꾸어,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복음은 왕위 등극의 소식이자, 그 왕에 대한 소식은 이제 그 왕의 사람들, 즉 '선민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도 재정의합니다.

 

갈라디아서 2:15,15a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여기서 "우리"는 바울 자신을 비롯한 유대인 사도들을 말합니다. 이 구절 전체에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을 잘 포착해봅시다. "우리", 유대인 사도들은 나면서부터 유대인, 즉 선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 그리스도 예수를 믿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칭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메시아 예수의 믿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바울이 제시한 일화와 이 구절을 연결시켜 생각해본다면, 어려운 단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란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생활방식은 곧 이방인과의 구별을 발생시키는 '경계 표지'였습니다. 이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계 표지들을 유지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올바른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올바른 사람은 곧 메시아 예수처럼 믿는 사람뿐입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서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올바른 사람이라 인정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를 믿음"이라 말하든, "예수처럼 믿음"이라 말하든, 핵심은 예수의 삶이 자신의 삶에 반영되지 않으면 칭의는 불가능합니다. 즉 '예수를 통해 새 사람됨'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통해 새 사람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실수를 갈라디아 교회들이 반복하려고 합니다. 유대화주의자들을 따라 유대인들의 경계표지들을 답습하는 길로 돌아가려고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경계가 옮겨졌다는 사실과, 이제 예수의 복음 안에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메시아를 통해 드러난 선민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이 하나의 식탁을 공유합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은 '새 사람이 되려다가 율법 조항을 어기게 되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복음 아래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분명 율법의 규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율법 조문이 새 사람을 묶어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우리를 죄 짓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이제 메시아께서 허무신 것이 무엇인를 분별하고 그것이 허물어진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설령 성문화된 법조문을 어기는 일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이로써 메시아를 중심으로 재정의된 선민은, 율법 조문을 어기지 않으려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율법 조문을 어기면서도 이방인과 하나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딜레마는 율법을 어겨 죄인이 될지언정 사랑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돌파됩니다.  "용서받은 죄인"의 정체성이 복음의 정체성이고, 그들은 사랑 앞에서 율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메시아의 식탁에 함께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사랑 때문에 율법을 어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글자는 이들을 묶어놓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19~21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은 다시 주어를 "나"로 바꿉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은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음에도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를 떠올립니다.(신명기 21:23)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일관된 추구는 율법의 내적모순을 드러냈습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은 내가 더 이상 율법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나 역시 율법의 내적모순을 확인했고, 글자를 넘어 사랑하는 삶으로 넘어왔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래서 바울의 "이제"는 의미심장합니다. 메시아의 믿음으로 사는 삶은 율법에 얽매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버리신 사건 자체가 '율법을 완수하신 분에 대한 율법의 정죄'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옳지 않고 메시아 예수가 옳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몸을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는 나를 위하여 율법의 저주를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믿음이고, 바울은 같은 믿음으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왕이 이런 분이시니, 그분을 따르는 군사들도 이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때, 유대화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율법을 바울이 망치려 한다고 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메시아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율법의 한계를 명확히 합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선민이 될 수 없습니다. 글자를 넘어선 사랑의 사람만이 그 은혜를 알고 누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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