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연구를 시작한다. 이번 연구는 당대 역사나 2차 참고 문헌들을 정리하기 보다는, 희랍어 문장들을 탐구하고 문법적 의미를 드러내는데 주력하려고 한다.

1. 발신자, 수신자, 인사


에베소서 1:1,2 개인번역


님의 원함을 통하여 메시아 예수의 사도인 바울이

[에페소스에] 있는 거룩한 이들

곧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이들에게 (보냅니다).


여러분에게 '거저'와

아빠 하나님과 주 메시아 예수로부터 평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힌 뒤 인삿말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때 동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개역성경에 나오는 "편지하노니", "있을지어다"는 번역자가 추가한 말들이다.

  ("있을지어다"라는 추가된 번역어는 마치 '지금은
거저와 평화가 없다'는 늬앙스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거저와 평화'가 현재 상태가 아닌 미래 기원이라는 오독의 여지를 남기진 않는가?
 영어를 배운 이들은 과거 시제, 현재 시제, 미래 시제의 구분에 익숙하지만, 사실 미래 시제는 엄밀히 말해서 '시제'라 부를 수 없다. '시제'는 '사실들을 저장하는 시간 구획'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래의 시간은 사실들을 저장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미래는 아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는 시제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전망'을 의미할 뿐이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희랍어에는 '시상'이란 개념이 있는데, 시상은 시제와 상(aspect)를 포함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 시상에는 1시상과 2시상만이 있다(1시상은 '현재'를, 2시상은 '과거'를 의미한다).  전자는 대화를, 후자는 과거 이야기를 말할 때 주로 사용된다. 이때 '미래 시제'에 관련된 동사들은 1시상에 포함된다. 

  따라서 "있을지어다"를 '지금은 없지만 미래에는 있게 될 것이다'로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이 전하는 '거저'와 '평화'는 지금은 부재하지만 나중에 도래할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저와 평화는 이미 도래했고, 도래했기 때문에 에클레시아는 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있을지어다" 대신 "있습니다"를 추가했다. 물론 이 술어는 원문에는 없는 것이지만.)

  3,4세기에 쓰여진 초기 사본들에는 [에페소스에]가 없다. 또한 바울은 오랫동안 에베소에 체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서에는 바울이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쩌면 <에베소서>라는 이름은 에베소서를 담아내기엔 너무 작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2. 긴 문장


좋게 말되신

곧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아빠,


그 분은 메시아 안에서 

곁하늘들 안의 모든 성령적인 좋은말로(εν),

우리를 좋게 말하시는 분 (입니다),

마치 그 분이 우리를 자신 안에서 

창조세계의 설립 이전에 선택하셨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그 분은 우리를 메시아 예수를 통해 자신 속으로,

그 분의 그 원함의 그 좋게여김을 따라,

그 분의 그 거저의 뚜렷에 속한 찬송 속으로,

입양하기로 먼저 결정하신 분 (입니다)

그 거저로 그 분은 우리를(에게)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받는 자 안에서,

[그이 안에서 우리는 그이의 그 피를 통하여 그 풀려남,

곧 그 잘못된 걸음들로부터 보내주심을 가졌습니다],


그 분의 그 거저의 그 넘침을 따라, 

그 거저로 그 분은 우리 속으로
모든 지혜와 이해 안에서 넘어서게 하고

그의 (자신 안에서 먼저 놓은) 그 좋게여김을 따라, 

우리에게 그 분의 그 원함의 그 신비를 깨닫게 하신 분(입니다),

그 카이로스들의 그 넘침의 오이코노미아 속으로 (말입니다),

그 결과 그 메시아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총괄갱신 (되었습니다)

하늘들 곁에 있는 것들과 그 땅 곁에 있는 것들이 그 안에서, 


그 안에서 우리도 상속이 결정되었습니다

그의 원함의 목적을 따라 모든 것들을 작동시키는 먼저 놓음을 따라 

우리는 먼저 결정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메시아 안에서 먼저소망하는 사람들이

그의 뚜렷의 찬송 속으로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도 그 참에 속한 그 로고스를

곧 여러분의 그 구원의 그 좋은알림을 들었고, 

그 안에서 여러분도 신실하여 

그 알림에 속한 거룩한 숨님으로 날인되었습니다, 

숨님은 우리 상속의 보증입니다,

그 보존의 풀려남 속으로,

그의 그 뚜렷의 찬송속으로.

 
  위에 보이는 글 전체가 한 문장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긴 문장을 구성했을까? 구성? 바울은 이 한 문장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일단 전체 골격을 그려놓고, 세부 내용을 들여다 보겠다. 바울의 사고는 '1) 님과 우리의 관계', '2) 그 사이에서 거저 발생한 메시아 사건' , '3) 그 메시아 안에서 우리와 여러분' 으로 이어지는듯 하다.


1) 님과 우리의 관계


좋게 말되신 님
곧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아빠,
그 분은 메시아 안에서
곁하늘들 안의 모든 성령적인 좋은말로(εν),
우리를 좋게 말하시는 분 (입니다),
마치 그 분이 우리를 자신 안에서
창조세계의 설립 이전에 선택하셨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그 분은 우리를 메시아 예수를 통해 자신 속으로,

그 분의 그 원함의 그 좋게여김을 따라,

그 분의 그 거저의 뚜렷에 속한 찬양 속으로,

입양하기로 먼저 결정하신 분 (입니다)


  개역성경이 "복", "찬양"으로 번역하는 희랍어는 '에우로기아(ευλογια)'이다. 로기아(λογια)는 '신탁'이란 의미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로고스(λογος)'에서 왔고, 접두어 '에우(ευ)'는 '좋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복/찬양은 '좋은 말'이다. '님'은 좋게 말 되시기 합당한 분이시다. 그리고 님은 자신을 좋게 말한 이들을 다시 좋게 말하신다. 즉 이 '좋게 말함(ευλογια)'이 "신"과 "우리"의 관계이다. 님과 연결된 좋은 말의 관계는 메시아 안에서의 관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성령적인 관계이다. (개역한글은 내가 "성령적인"이라 번역한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를 "신령한"이라 번역했다. 성령과 무관하게 "영험한" 정도로 이해될 소지가 충분하지 않은가?)

  텍스트의 순서상 우리가 먼저 신을 좋게 말했지만, 선택에 있어서는 님이 먼저다. 님은 "자신 안에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다. 흔히 신학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주권적 선택"이란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인간은 할 것 없이 신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결정론이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신이 먼저 손 내밀었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신은 선택했으나, 인간은 그 선택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메시아 안에서 성령적인 "우리"는 그 선택에 좋은 말로 대답한 사람들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태초 이전의 신의 선택에 연결되고, 세상 이전에 있던 사랑에 화답한 것이다. "거룩하고 흠 없음"은 이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가 '현재는 불경하고 흠있는 창조세계'를 시간과 공간적으로 넘어서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해석이 영지주의라는 혐의를 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경하고 흠있는" 창조세계와 대비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그들은 창조세계를 떠나기는 커녕 오이코노미아의 책임을 짊어지기 때문이다. (오이코노미아에 대해서는 아래에)


  "자신 안에서"라는 정적인 의미에 "자신 속으로(εις)"라는 동적 의미가 추가된다. 즉 신의 결정(입법)은 다음과 같이 집행된 것이다. 우리는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입양되었다. 이 입양이 님의 뜻에 대한 님 자신의 평가이다: 좋게여김.

2) 그 사이에서 거저 벌어진 메시아 사건, "풀려남"

그 거저로 그 분은 우리를(에게)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받는 자 안에서,

[그이 안에서 우리는 그이의 그 피를 통하여 그 풀려남,

곧 그 잘못된 걸음들로부터 보내주심을 가졌습니다],
그 분의 그 거저의 그 넘침을 따라, 

그 거저로 그 분은 우리 속으로
모든 지혜와 이해 안에서 넘어서게 하고

그의 (자신 안에서 먼저 놓은) 그 좋게여김을 따라, 

우리에게 그 분의 그 원함의 그 신비를 깨닫게 하신 분(입니다),

그 카이로스들의 그 넘침의 오이코노미아 속으로 (말입니다),

그 결과 그 메시아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총괄갱신 (되었습니다)

하늘들 곁에 있는 것들과 그 땅 곁에 있는 것들이 그 안에서, 


  이제 주제는 "거저"로 넘어온다. 그 거저는 메시아 안에 있는 거저인데, 바울은 그 '거저'를 '우리의 구속'에 연결시킨다. '구속'이라 말하면 쇠고랑 차고 자유를 박탈되는 것을 생각하겠지만, 이 대목에서 '구속'이라 번역된 단어는 그 뜻과 반대로 '풀려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풀려남(ἀπολύτρωσις)이란 추상적인 차원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들을 전제한다. "잘못된 걸음들로부터(τῶν παραπτωμάτων)" 이기 때문에. 즉 메시아 안에서 "우리"는 잘못된 걸음들의 족쇄에서 풀려나, 그 잘못된 걸음들을 다시 걷지 않을 두번째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다시는 죄의 구체적 실천으로 회귀하지 않는 자유'인 구속은 출애굽을 모티브로 가지고 있다. '아폴뤼트로시스'는 '어디로부터(απο) 풀려남(
λύτρωσις)'이란 의미이고,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사건은 이집트"로부터"의 풀려남이었다면, 메시아 예수의 구속은 "잘못된 걸음들"로부터의 출애굽인 것이다. 

  메시아 안에서 님이 베푸시는 거저는 넘친다. 희랍어 전치사 '휘페르(ύπερ)'의 연속이다. 동사 접두어로 쓰였거나 전치사로 쓰였을 때 붉은색으로 체크해두었다. 바울은 휘페르가 가진 '초월'의 의미를 사용하여 님의 거저를 표현하고자 한다. '구속' 받은 자는 풀려남의 자유를 거저 얻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지혜와 이해를 초월하는 깨달음도 거저 얻게 된다. 그 깨닫는 내용이 바로 앞에서 바울이 언급한 "신의 뜻(님의 원함)"인데,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한다.


-카이로스(시간)들이 넘쳤다. 집안관리(οικονομια)의 때가 되었다.
-메시아 안에서 모든 것들(하늘들 곁에 있는 것들 + 땅 곁에 있는 것들)이 메시아를 머리로 두고 요약된다.


  즉 이제 메시아 안에서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입양된 이들은 청지기로서 부름받은 이들이고, 바로 그들이 인삿말에 언급된 '거저와 평화'를 구현하는 창조세계 통치(집안관리)의 주체들이다. "머리로 두고 요약된다(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는 개역성경이 "통일"로 번역했다. 메시아를 머리로 두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그의 몸이 된다는 말이다. 그이의 몸은 부활했고, 그 부활한 몸의 일부로서 만물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만 부활하지 않는다. 만물이 부활하신 메시아 아래 요약/갱신된다. 곧 새 하늘과 새 땅.

3) 그 안에서 우리와 여러분


그 안에서 우리도 상속이 결정되었습니다

그의 원함의 목적을 따라 모든 것들을 작동시키는 먼저 놓음을 따라 

우리는 먼저 결정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메시아 안에서 먼저소망하는 사람들이

그의 뚜렷의 찬양속으로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도 그 참에 속한 그 로고스를

곧 여러분의 그 구원의 그 좋은알림을 들었고, 

그 안에서 여러분도 신실하여 

그 알림에 속한 거룩한 숨님으로 날인되었습니다, 

숨님은 우리 상속의 보증입니다,

그 보존의 풀려남 속으로,

그의 그 뚜렷의 찬양 속으로.


  "그 안에서", 즉 만물의 대문자, 만물을 자신 아래 요약시킬 수 있는 제목 같으신 그 메시아 안에서, 님의 결정(예정)에 의해 그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입양아들이고 청지기이며, 또한 상속자이다. 그들은 그들이 맡아 관리한 집안의 곧 주인이 될 것이다. 만물의 총괄갱신은 신약성경의 위대한 비젼이지만, 그 비젼은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와 상속으로 결론 맺는다. 이 인간중심적인 비젼이 "님의 원함"의 결론이다. "우리"를 입양하기로 결정한 님은 그 상속 또한 먼저 결정하셨다.

  이 상속이 개역성경에는 "기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기업(企業)이 아니라, 기업(基業)이다. "영리(營利)를 얻기 위하여 재화나 용역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조직체"가 아니라,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과 사업"이란 의미로 쓰였다. 앞으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상속"이라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만물의 갱신과 상속. "우리"는 그것을 먼저 깨달은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뚜렷이 드러난 님의 원함 앞에서 찬양하며 서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식을 들었던 "여러분"이 있다. "여러분" 역시 메시아 안에서 신실하여 그 알림의 보증이신 성령을 수여받았다. 즉 "우리"와 "여러분"은 함께 메시아 안에 있는 입양아들이고, 집안 관리인들이고, 상속자들로서 함께 연대한다.

  성령은 상속자임을 보증하는 날인인데, 이때 우리는 다시 '구속'의 또 다른 개념을 만난다. 앞에서 '구속'은 구체적인 죄의 실천으로부터의 풀려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구속이 성령 수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성령 수여는 "그 보존의 풀려남"과 "그 뚜렷의 찬양"을 확증한다.

  "그 보존의 풀려남"이라 번역한 경위는 이러하다. "보존"이라 번역한 희랍어 단어는 '
페리포이에시스(περιποίησις)'인데, keep safe, preservation을 의미한다고 되어있다. 파자하자면 '근처'라는 의미의 '페리(περι)'와 '함/만듬'이란 의미의 '포이에시스(ποιησις)'의 결합이다. 동사형태도 찾아보니 '근처에 두고 안전하게 보존하다'의 의미이다. 이떄 "보존"은 풀려남의 속성 혹은 결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풀려남은 인간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함'이다. 페리포이에시스가 사용된 다른 구절들의 용례를 살펴보자.


데살로니가전서 5:9, 개역한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이때 "구원을 얻게 하신 것(εἰς περιποίησιν σωτηρίας)"에 페리포이에시스가 사용되었다. 구원이 전치사 '페리(περι)'에 걸린다면 "온전함 곁에서 행함을 위하여"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라면 "온전함의 보존 속으로"라고 번역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4, 개역한글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εἰς περιποίησιν δόξη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데살로니가전서 5:9에서는 전치사 에이스(εις)를 "구원을 얻게 하신 것"으로 이미 이뤄진 것처럼 번역했다면, 데살로니가후서 2:14에서는 "얻게 하려 하심"으로 목적(finalis)으로 번역했다. 전치사 에이스(εις)는 목적으로도 결과로도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문맥을 면밀히 검토해봐야 한다. 개역한글 번역자는 '구원은 이미 얻었지만, 영광은 앞으로 얻을 것'이라 생각함을 알 수 있다. "보존"이란 번역어를 적용한다면, 복음으로 부름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보존을 위함"이다.


히브리서 10:39, 개역한글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공교롭게도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페리포이에시스는 모두 전치사 에이스(εις)와 구를 이룬다. 이때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εἰς περιποίησιν ψυχῆς)"에 페리포이에시스가 사용되었는데, 이 구절 번역은 유독 페리포이에시스를 '구원하다'로 번역했다. 새번역은 "생명을 얻을"로 번역했다. "호흡의 보존을 위하여"가 적절하다.


베드로전서 2:9a, 개역한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λαὸς εἰς περιποίησιν),


  "소유된"은 에이스(εις)를 '목적'이 아닌 '결과'로 이해한 번역이다. 그러나 목적으로 이해한다면 "보존을 위한 백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 보존의 풀려남"과 대등하게 사용된 구가 "그의 뚜렷의 찬양"이다. 앞에서 "뚜렷의 찬양"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그 분의 그 원함의 그 좋게여김을 따라,
그 분의 그 거저의 뚜렷에 속한 찬양 속으로,
입양
하기로 먼저 결정하신 분 (입니다)

우리는 먼저 결정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메시아 안에서 먼저소망하는 사람들이
그의 뚜렷의 찬양 속으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그러므로) 바로 제가,

여러분을 따라 (있는) 주 예수 안에서의 그 신실함과 

모든 거룩한 이들을 향한 그 사랑을 들었기에,

여러분을 대신한 감사를 멈추지 않고

나의 기도들로 기억 합니다,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그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1) 지혜의 숨결과 그를 깨닫는 것 안에 (있는) 계시의 숨결을 주시라고,

2) 가온의 눈들이 이미 밝혀진 여러분이 아는 데 이르도록,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거룩한 이들 안에 있는 그의 상속의 뚜렷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3) 그리고 그의 강함의 힘의 작용을 따라 신실한 여러분을 향한 

그의 잠재력의 '넘어서는 큼'이 무엇인지를,

  [그 작용은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서 그이를 죽은 이들로부터 일으키시고

  그이를 곁하늘들 안에서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시며 발휘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아르케와 엑수시아와 잠재력과 주들과 모든 불리는 이름들 위에,

  바로 이 시대 뿐만 아니라 도래하는 시대 속에서도.]


그리고 모든 것들을 그이의 두 발 아래 질서잡고,

그리고 그이를 모든 것들을 위한 머리로 에클레시아에게 주셨습니다,

그 에클레시아는 그이의 그 몸이고, 

넘치는 모든 것들 안에서의 넘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송의 긴 문장을 끝낸 바울은, 이제 기도를 이어간다. 그 기도는 에베소의 거룩한 이들을 위한 기도인데, 바울은 그들의 신실함과 사랑을 들었기에 그것에 관해 감사하며 그들을 위한 세 가지 기도를 내놓는다 : 계시의 숨결(시작), 소망과 상속에 대한 지식(끝), 그리고 넘어서는 잠재력(과정).
  
  계시의 숨결은 에클레시아가 되는 시작이며, 소망과 상속에 관한 지식은 끝에 관한 앎이며, 넘어서는 잠재력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힘인데, 이 힘은 메시아 예수를 부활시키시고 승천하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의 힘이다. 모든 정치 권력 뿐만 아니라 왕들이 막을 수 없는 신적 능력이다.

  그 능력 안에서 만물이 그이의 두 발 아래서 질서잡히고, 메시아 예수를 머리로 두고서 모든 것은 총괄생신되었고, 될 것이다. 되었고에 해당하는 것이 교회고, 될 것이다에 해당하는 것이 창조세계 전체이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그이의 몸이자, 그이의 몸으로부터 만물에 이르게 되니 "넘치는 모든 것들 안에서의 넘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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