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마태복음 9:9~26, 개인번역
그리고 예수는 거기를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셨다, '마태'라고 이야기되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의 글자들만 가지고는 그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성경 외의 정보들을 취합하고 연결하는 것은 성경 속 사건들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당연히 필요한 작업이지요.
'세관(τελώνιον)'은 당시 통행료를 받던 곳을 말합니다. 분봉왕 헤롯이 죽고난 뒤 이스라엘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통치됩니다. 헤롯 안티파스, 헤롯 아켈라우스, 헤롯 빌립. 그리고 예수께서 지나시는 "거기"는 '가르페나움(가버나움)'입니다. 헤롯 빌립 2세가 지배하던 지역에서 헤롯 안티파스가 지배하던 곳으로 넘어갈 때 지날 수 밖에 없는 접경지역에 위치해있습니다. 거기서는 통행료를 받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에서 조업을 하는 어부들은 가버나움을 통해 교역할 수 밖에 없으므로, 숱하게 마태에게 통행료를 갖다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어부 출신 제자들인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도 말입니다.
하나님께 상속받은 가나안 땅이, 이제는 이방 제국의 땅이 되었고, 그 땅을 지나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그 땅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내야합니다. 그리고 로마는 이 돈을 걷어가는 사람을 동족 유대인을 세워놓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세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민족 배반자로 보았고, 이스라엘의 배반자는 곧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세리들도 이율을 마음대로 조정하며,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의 등골을 빨아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리라는 직업군을 좋게 볼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분봉왕들이 로마의 수족이라면, 세리는 이스라엘을 긁어먹는 그 손의 손가락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마태'라는 사람도 그 세리들 중 하나였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그가 일어나 그이를 따랐다. 그리고 그는 비스듬히 누워 그 집 1에 있었다, 보라, 많은 세리들 즉 비뚤어진 이들이 들어와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보고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어째서 너희들의 스승은 저 세리들 즉 비뚤어진 이들과 함께 밥먹는 것이냐?"
예수는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한 이 말에 마태는 '일어나' 예수를 따랐습니다. 앞에서 '앉아있다'는 말은 '업무를 보다, 관할하다, 다스리다'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모르드개가 성문에 앉아있다거나, 바벨론이 많은 물위에 앉아있다는 말은 통치와 연관된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리, 재력,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어나다'라는 표현은 부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치 마태의 미래를 보여주듯, 그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걸어본 길이 아닌 길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따랐다"라 짤막하게 나온 표현은, "제자가 되었다"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세리 마태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세리도 자신의 제자로 호명했습니다. 2지파만 남은 이스라엘을, 다시 열 두 지파로 회복하겠다는 이 메시아에게는 민족 배반자도 그 새롭게 구성될 이스라엘의 일원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자신에게 스승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던게 아닙니다. 민족 배반자라 손가락질 당하는 자신이 메시아와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잔치를 베풉니다. 본문의 "그 집"은 병행본문인 누가복음 5:29를 봐서도 마태의 집이 분명합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비스듬히 누웠습니다. 비스듬히 눕는 것은 희랍 사람들이 식사하던 자세입니다. 오랜 포로기의 세월 속에서, 유대인들의 식습관도 자연스럽게 바뀌었습니다.
당시 "비뚤어진 자들(ἁμαρτωλός, 죄인)"이라 불리던 이들은 토라와 무관하게 사는 이들을 가리켰습니다. 외국인이나 성전 제의에서 배제된 환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특히 민족 배반자인 세리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로부터 떨어져서 자신의 정결을 지키는 것이 유대인의 중요한 덕목이기도 했습니다.
마태는 메시아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이것이 기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은 마태와 마찬가지로 비뚤어진 이들, 곧 세리같은 이들 뿐이었는데, 마태는 당시의 충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많은 세리들 즉 비뚤어진 이들이 들어와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든, 희랍어로 기독된 신약성경이든 "보라(ἰδοὺ)"라고 번역되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독자의 이목을 주목시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이 구절 자체에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하지 말아야한다고 말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태 본인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태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목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죄인들로부터 자신들을 격리시키고(혹은 죄인들을 격리시키고),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건'을 통해서, 더러운 제국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바리새인들에게 말하십니다.
그런데 그이가 듣고서 말하셨다.
"강한 사람은 의사의 필요를 갖지 않지만 열악한 이들은 (의사의 필요를) 갖는다. 그런데 너희들은 가서 이것이 무엇인지 배우라, '긍휼을 내가 원한다, 희생이 아니라.' 즉 내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비뚤어진 이들을 부르러 왔다."
이 묘한 말을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강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이 사람들은 의사가 필요없는 사람들입니다. 의사가 예수 자신이라면, 예수가 필요없는 이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열악한 이들, 의사가 필요한 이들은 바로 죄인들, 지금 함께 비스듬히 누워 식사하고 있는 세리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여기서 "열악한"이라 번역 단어는 다른 구절에서는 그저 "악"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21:41, 개역한글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κακοὺς κακῶς ἀπολέσει αὐτούς),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이렇듯 '카코스'라는 단어는 악으로도 번역되고 병을 가진 것으로도 번역됩니다. 유대인들이 병자를 곧 악인으로 보았던 그 세계관을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이 악한 이들을 위해서 왔고, 악한 이들이야말로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수 자신도 긍휼을 위해서 왔지, 희생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당시 유대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말 그대로 적법한 원칙에 따라 드려지는 동물의 희생뿐만 아니라, 로마의 침몰을 가져오는 거룩한 희생이 되라도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예수는 이 '희생주의자들'에 대한 우회적 비판과 더불어, 인간의 희생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희생시키려는 악한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르다'라는 말 자체가, 제자로 삼곘다는 말인데, 예수께서 제자로 삼겠다고 한 사람은 세리와 같이,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족들을 희생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야 말로, 예수가 필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그이를 향해 와서는 말했다.
"어째서 바리새인들도 금식을 하는 중인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금식'은 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금식은 레위기 23:27~29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속죄일에 하도록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이 포로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고, '자발적인' 금식을 통해 이 대속죄일을 앞당기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이 금식은 지금 자신들의 시간이 '포로기'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른 시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한, 신혼방의 아들들은 애곡할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런데 날들이 지날 것이고, 그때 신랑은 그들로부터 들려버린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애곡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 주목해야 합니다. 분명 예수는 이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랑'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는 "날들이 지나면", '그 신랑이 들려버린다(ἀπαρθῇ, ἀπ + αίρω)'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애곡의 때입니다. 이 들려버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합니다. 메시아 예수를 빼앗기는 때가 곧 들려버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스가랴서가 예언하는 애곡의 때입니다.
스가랴 12:10, 새번역
내가 다윗의 백성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위에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부어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찔러서 상처를 입은 나를 보고 슬피 울 것이다. 마치 외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 것이며 맏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헌 겉옷에 새 천 조각을 옆에 던지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그 흘러넘침이 그 겉옷으로부터 들려 올라가기 때문이고, 더 열악한 틈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예도 '들려 올라감(ἀπ + αίρω)'이 언급됩니다. 첫번째 예와 같은 상황을 달리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새 천 조각"이 무엇을 의미하는 바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새 천 조각은 들려올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천 조각이 들려올라갈 때는 곧 애곡의 때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도 헌 겉옷에 새 천 조각을 '옆에 던지는('깊는'으로 의역됨)' 사람은 없는데, 이 일어나지 않을 일이 벌어졌다는 말입니다. 죄 없는 사람을 들어 올리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데, 그 예수를 헌 겉옷 옆에 던져버리고 함께 기워버리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앞에선 '애곡'이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열악한"이 등장합니다. 예수는 "열악한"을 자신이 필요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애곡의 날은 "더 열악한 틈"을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세리와 식사하는 것을 '악'이라 생각하지만, 메시아 예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이를 죽였을 경우 예루살렘에 찾아오는 것은 더 악한 상황, 곧 로마에 의한 멸망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도 새 포도주를 헌 부대 속으로 던지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부대들이 찢기고, 포도주는 밖으로 흘러넘치고, 부대들은 멸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새 포도주를 새로운 부대들 속으로 던진다, 그리고 양쪽 모두 보존된다."
'신랑 - 어떤 사람'에 이어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로 복수 주어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헌 부대 속으로 던지는 일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간 부대들도 찢기고, 포도주는 밖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대들은 멸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죄가 없는 새 포도주를 죄악의 상황 속으로 던져버릴 것이고, 그 포도주는 흘러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를 어떻게든 자신들의 틀 안에 우겨넣으려고 했던 부대들은 말 그대로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새 포도주를 새로운 부대들 속으로 던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겐 멸망이 없습니다. 포도주도 부대들도 모두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를 새로운 부대들 속으로 던지는 장면 두 개가 이어집니다.
이것들을 그이가 그들에게 말하시는데, 보라, 지도자가 안으로 들어와서 그이에게 엎드려 인사했다, 그가 말하길, 2
"나의 딸이 지금 막 끝났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당신의 그 손을 땅 위에 얹으소서, 그러면 살 것입니다."
이 지도자의 이름은 야이로입니다. 병행본문인 누가복음 8:41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도중에 야이로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그이가 그들에게 말하시는데" 이후 찾아온 상황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과 상황이 서로 결부될 개연성이 큽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딸이 지금 막 끝났습니다"
딸의 시간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들의 시간을 포로기로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제자들을 연상시킵니다. 야이로의 시간은 딸이 죽어버린 시간, 더 이상 딸이 살아있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는 잘 찾아왔습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그는 딸에게 새로운 시간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일으켜져서 그를 따라갔고, 그의 제자들도 (따라갔다). 그리고 보라, 12년째 하혈하고 있는 여자가 향하여 왔고 그이의 겉옷의 그 술을 붙잡았다. 왜냐하면 여자가 자신 안에서, '단지 그이의 저 겉옷을 붙잡기만 하면, 내가 온전케될거야'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이가 몸을 돌려 그녀를 보시고 말하셨다.
예수는 "일으켜지셨"습니다.
로마서 4:25, 개인번역
그 예수는 우리의 삐뚤어짐 때문에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셨고, 또한 우리의 의를 위하여 일으켜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마태가 예수를 따랐듯이, 그를 "따라가셨습니다". 역할이 바뀐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 일으키시고, 예수께서 따라오라고 하셔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의 손에 의해 예수는 일으켜지시고, 또 그를 (제자처럼) 따라갑니다.
그러다 다시 새로운 사건이 끼어듭니다. 12년째 하혈하고 있는 여자가 등장했고, 이 여자는 예수의 겉옷에 달린 술을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가 나옵니다. 그녀가 속으로 "저 옷 술만 붙잡아도 내가 온전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움직여, 정말 그 옷 술을 잡아버립니다. 이 구절에서 "온전케됨"으로 번역한 단어는, 쏘조(σώζω)입니다. "구원받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죽어서 어디 가는 게 아닙니다. 온전한 삶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앞에서 언급된 일들을 정리시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은 포로기였습니다. 이 포로기는 이스라엘이 병든 시기였습니다. 이 병든 시기를 낫게 하고자 죄인들과 멀리하고, 또 금식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포로기를 끝장낼 메시아 예수께 신실하지는 않습니다. 새 천, 새 포도주, 신랑에게 신실한 사람은 이 12년간 하혈하고 있어, "비뚤어진 사람"이라 손가락질 받는 여자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근처도 가지 않을,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을 요구하지도 않을 이 하찮은 사람만이, 그이가 자신에게 새로운 시간을 가져올 메시아를 굳건히 믿고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당시 나이가 12세였습니다(누가복음 8:42). 12가 묘하게 겹칩니다. 여자가 고생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야이로의 딸은 성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자도 위기요, 딸은 이미 위기가 끝나버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또 숫자 12는 '완전'을 의미합니다. 여자의 고생이 다 채워졌음을 의미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이제 새로운 시간이 돌입할 때가 되었습니다, 메시아로부터.
"용기를 내라, 딸아, 너의 신실함이 너를 온전케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바로 그 시간으로부터 온전케 되었다.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자세가 이러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기. 그리고 메시아는 그녀를 '딸'이라 부릅니다. 앞에는 '하나님'이 생략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마르톨로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딸로 불리우게 된 새로운 시간. 그 시간은 그녀의 신실함으로부터 왔습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그녀의 신실함(생각 + 몸 움직임)이 그녀를 온전케 했습니다. 온전한 삶으로의 진입, 그녀는 오는시대를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그 시간으로부터" 라는 중요한 표현을 놓쳐선 안되겠습니다. 여자가 새로운 시간을 살게 되었음을, 같은 시간을 누린 마태는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른 "딸"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지도자의 집 안으로 들어가셨고, 피리부는 이들과 웅성대는 군중을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돌아가라! 왜냐하면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회당장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장례를 치를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피리부는 사람들(우리로 치면 곡하는 사람들)이 모여있고, 또 딸의 죽음을 위로하려는 마을 사람들로 집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죽음을 위해 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야이로는 "나의 딸이 지금 막 끝났다"고 말하며 딸의 시간이 이미 단절되었음을 선언했는데, 예수는 시간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십니다. 끝이 아니다. 금세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잠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이를 비웃었다. 그런데 그 군중이 다 내보내졌을 때, 그이는 들어가서 소녀의 그 손을 힘주어 잡으셨다, 그리고 그 소녀는 일으켜졌다. 그리고 바로 그 소문이 바로 이 땅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를 비웃습니다. 새로운 시간을 가져오려는 사람이 비웃음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꿋꿋하게 죽음을 위해 찾아온 이들이 모두 집 밖으로 내보내질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소녀의 끝장남을 믿고있던 이들은, 이 시간의 전환의 목격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태의 표현들 속에서, 마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가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일으켜졌다."
야이로는 예수를 일으켜, 자신의 삶으로 들어오시라 독촉했습니다. 그 결과는 새로운 시간, 죽음의 극복, 딸이 끝장난게 아니라 끝장 난 것은 포로기의 옛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마태가 살고 있는 유대 땅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마태는 이 소문이 퍼져나갔다는 사실에 대한 믿을만한 증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마태복음 9:9~26, 개인번역
그리고 예수는 거기를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셨다, '마태'라고 이야기되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그가 일어나 그이를 따랐다. 그리고 그는 비스듬히 누워 그 집에 있었다, 보라, 많은 세리들과 비뚤어진 이들이 들어와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보고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어째서 너희들의 스승은 저 세리들 즉 비뚤어진 이들과 함께 밥먹는 것이냐?"
그런데 그이가 듣고서 말하셨다.
"강한 사람은 의사의 필요를 갖지 않지만 열악한 이들은 (의사의 필요를) 갖는다. 그런데 너희들은 가서 이것이 무엇인지 배우라, '긍휼을 내가 원한다, 희생이 아니라.' 즉 내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비뚤어진 이들을 부르러 왔다."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그이를 향해 와서는 말했다.
"어째서 바리새인들도 금식을 하는 중인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한, 신혼방의 아들들은 애곡할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런데 날들이 지날 것이고, 그때 신랑은 그들로부터 들려버린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애곡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헌 겉옷에 새 천 조각을 옆에 던지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그 흘러넘침이 그 겉옷으로부터 들려 올라가기 때문이고, 더 열악한 틈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도 새 포도주를 헌 부대 속으로 던지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부대들이 찢기고, 포도주는 밖으로 흘러넘치고, 부대들은 멸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새 포도주를 새로운 부대들 속으로 던진다, 그리고 양쪽 모두 보존된다."
이것들을 그이가 그들에게 말하시는데, 보라, 지도자가 안으로 들어와서 그이에게 엎드려 인사했다, 그가 말하길,
"나의 딸이 지금 막 끝났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당신의 그 손을 땅 위에 얹으소서, 그러면 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일으켜져서 그를 따라갔고, 그의 제자들도 (따라갔다). 그리고 보라, 12년째 하혈하고 있는 여자가 향하여 왔고 그이의 겉옷의 그 술을 붙잡았다. 왜냐하면 여자가 자신 안에서, '단지 그이의 저 겉옷을 붙잡기만 하면, 내가 온전케될거야'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이가 몸을 돌려 그녀를 보시고 말하셨다.
"용기를 내라, 딸아, 너의 신실함이 너를 온전케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바로 그 시간으로부터 온전케 되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지도자의 집 안으로 들어가셨고, 피리부는 이들과 웅성대는 군중을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돌아가라! 왜냐하면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이를 비웃었다. 그런데 그 군중이 다 내보내졌을 때, 그이는 들어가서 소녀의 그 손을 힘주어 잡으셨다, 그리고 그 소녀는 일으켜졌다. 그리고 바로 그 소문이 바로 이 땅 전체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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