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저번 주에 함께 얘기했던 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다시 설명해볼께요.


1. 바야흐로 이성의 시대!



  그러니까 지금은 이성의 시대에요. 이성이 권좌에 올랐죠.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이성주의의 전통은, 이성을 모든 것을 판단하는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이성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성 역시 어떠한 토대를 가지고 있어요. 그 토대를 가리켜 전통이라 하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성이라는 왕이 타고 있는 배가 곧 전통입니다. 지난 300년간 가열차게 발달해온 과학의 전통은, 이 세계를 '우연히 생긴, 인과관계로 인해 닫힌 세계'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 위에서 이성은 모든 것의 심판관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성에 의해 사실과 거짓이 나눠집니다. 여기서 사실이라 함은, 과학이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이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거짓이거나, '신념' 입니다.

  이성의 머리 위에 신념들이 놓여 있습니다.(A,B,C,D...) 신념은 이성이 아직 판단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아직이지, 오늘날의 신념은 사실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오늘날 성서 이야기는 그저 신념에 불과합니다. 사실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이 아주 안타까운 것이죠. 과학은 인간의 목적, 세계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런 답변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과학의 전통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삶의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연히 존재하게 된,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그럼, 정말 그 아이가 우연한, 무의미한 존재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아이의 존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성이 왕이 된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2. 이성 아래 전통 있다!


  이성이 한 가운데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그림은 잘못되었습니다. 신념에는 이성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사상, 신념, 종교등, 모든 생각들은 '이성적'입니다. 굳이 이성을 중심에 놓치 않아도, 모두 이성을 가지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뭘 가지고 생각하겠어요? 사이비종교 마저도 얘기를 들어보면 그럴듯 합니다. 이 사람 말도 저 사람 말도 맞는 것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그럴듯하면 그것이 옳은 것일까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도구인 이성을, 자꾸 왕처럼 모시는 것입니다. 이성은 그저 도구에요. 절대적일수 없는. 왕이 되어서는 안되는.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성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이성 아래에 어떠한 전통이 있느냐 입니다.



  전통을 배라고 생각해봅시다. 세상에는 이성이 타고 있는 과학 전통의 배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모든 생각들은 각각의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과학적 이성이 기대고 있는 과학 전통이, 이 세대의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전통은 많고 생각도 다양합니다. 따라서 과학적 이성만을 중심으로 한 다원주의의 그림은 옳지 않습니다.

  다양한 집단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들의 갈등과 대화와 협력을 통해, 민주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것이 다원주의입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합의할 수 있겠어요? 생각의 근거가 다른데, 무엇으로 합의점을 찾겠습니까? 이성으로요? 모두가 이성적이니까요? 이성이 언제나 옳은 것을 찾아줄 것이라는 것은 환상입니다. 전통이 다른 두 집단은 합의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 전통에 대해서 흉금을 터놓고 대화할 여지가 없는한 말입니다.

  이런 예는 어떨까요?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군사 독재정권을 대항해서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것을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고, 어떤 특정 싸이트에서는 이것을 폭동이라 부릅니다. 그 양측이 합의할 수 있는 접점이 있을까요? 한 쪽은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의견일치를 볼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양쪽이 다른 생각의 근거, 즉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럼 그 전통은 비판받는가? 그렇지 않아요. 전통은 생각의 밑바닥에서 영향을 끼칩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세상 모든 문제가 이러한데, 어떻게 과학적 이성을 중심으로한 다원주의에서, 민주적으로 단일한 합의점이 도출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말이 안통하니까, 서로 깊게 관여하지 말고, 피하는 것을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개인의 삶의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위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각각의 전통들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이성으로 기준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의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합니다. 모든 전통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옳은 것을 사실, 아닌 것을 거짓이라 부르듯, 모든 전통들은, 전통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늘 평가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성적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들이 다 이성적이니까요. 다 그럴듯하니까요.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그 이성이 뿌리내리고 있는 전통입니다. 그리고 그 전통에 물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발견하는 전통들에게 다음을 물어봅시다.


1. 그 전통이 인간과 세계에 목적과 의미를 주는가? 

1. 그것이 정말 인간에게 좋은 것인가?



3. 현실의 파도 앞, 헛된 전통


  잘못된 전통 위에서 사람은 자신의 의미를 잃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잃습니다. 의미와 목적이 뭐가 중요하냐 묻는다면, 사람의 의미와 목적이 사람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살율 1위잖아요.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야할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잘못된 전통 위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론입니다. 그 시대의 전통, 우리가 지금 타고 있는 전통이 잘못되어 있음을 어떻게 알수 있죠? 현실의 어려움의 파도가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현실의 파도 앞에, 헛된 전통에 뿌리박은 생각들은 그 허망함을 드러냅니다. 저 전통의 배들이, 그리고 그 배위에서 만들어놓은 생각의 구조들이, 우리의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잠시는 해결해주는 것처럼은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뿐입니다.

  특히, 절대 헛된 전통이 넘을 수 없는 현실의 파도는, 죽음입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 인간이 만든 전통의 뿌리는 뿌리채 흔들립니다. 인간에게 절망을 안겨줘요. 그리고 현실의 파도를 잠잠케 하는 오늘의 마지막 그림. 그것은 우리의 뿌리, 우리의 전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4. 우리의 전통, 우리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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